#8 아직도 울고 있는 '유아기의 나'에게 편지를 써보자
어렵고 쉽고를 떠나 어떤 문제든 깨끗한 해결을 위해서는 그 문제의 본질에 대해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소심의 원천 또한 마찬가지다. 아마도 유아기의 상처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여러 일들 또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분명한 원인이 있다. 다시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당시 그 일들에 대해 성인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접근해 보아야 한다.
제일 확실한 방법은 제일 큰 영향을 미쳤던 부모에게서 어린 시절에 발생되었던 그 일의 전체배경에 대해 들어 보는 것이다. 혹은 친척이나 가까운 지인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에 와서 안 좋았던 일들을 왜 들추려 하는 것인지 반대에 부딪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확실히 알아야만 한다. 분명 우리가 오해를 하거나 왜곡되게 알고 있는 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대해 들추어 내고 잘잘못을 따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불가피했던 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아직도 무의식의 바다에서 혼자 외로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린 나를 이해하고 안아주기 위함이다.
소심한 사람들은 개인에 따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부분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나를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가 현재 나의 발목을 잡고 있으며, 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어떠한 저항이나 항의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그 피해를 받아 들여야만 했던, 불가피한 수동성이 피해의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부모였다면...
이제 성인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게 큰 영향을 미친 부모를 사회인으로서, 친구로서, 같은 성인으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분명 그들도 힘들었음에 틀림없다. 세상의 폭풍에 시달리고, 삶에 찌들리며, 관계의 불공평, 불평등에 고통 받았을 것이다. 가정과 가족을 건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의무와 책임을 어깨에 지고 스스로를 지켜 가기도 사실은 힘겨웠을 것이다. 이제 같은 성인으로써 부모의 상황을 복기해보자. 과연 나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 수 있을까. ‘과연 나라면...’이란 가정 하에 과거의 일들을 필름처럼 돌려 보자.
과거 부모의 역할을 내가 해야 했다면, 상황이 바뀌어 졌을까. 그렇다면 나의 아픈 상처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나의 아픔은 오롯이 부모만의 책임일까. 사회적 문제에 의한 불가피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과거는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도 되돌릴 수 없다. 시간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과거는 지나간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가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현재까지 연결되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이름으로 무의식을 조정하고, 내 삶을 지배하려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퇴색되고 흐려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선명하게 남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크나큰 함정이 있다. 그것은 온전한 기억이 아닐 수 있다. 분명 우리가 오해하거나 확대 해석하여 잘못된 기억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 부분을 조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야만 한다. 이성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온전히 받아들여 풀 수 있어야만 한다.
부모와의 가슴으로의 대화는 분명 우리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다. 부모를 이해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준다. 역지사지의 관점은 당시의 부모와 지금의 나를 연결시켜줄 고리를 만든다. 모든 것이 부모의 책임이 아니며, 부모 또한 내게 가해자가 아님을 알게 해 줄 수 있다. 그들 또한 피해자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부모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젊고 혈기왕성한 연대가 아니다. 그들의 손을 잡고 가슴과 가슴이 맞닿을 수 있도록 포옹해 보자. 용서가 아니라 이제는 그들의 삶을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보자.
과거 부모의 행동과 생각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내 삶의 일부로써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이제는 내게로 시각을 돌려보도록 하자. 나의 소심은 어떻게 해야할까. 알게 모르게 형성된 나의 소심은 어떻게 대처해야만 할까.
소심한 사람들의 내면에는 아직 유아기의 어린 내가 울고 있다. 이미 몸도 마음도 훌쩍 커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내면 깊숙한 곳에는 힘들고 괴로운 상처를 받은 자아가 홀로 외로이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시간적 격리와 괴리감 속에 있는 어린 자아를 찾아 손을 내밀고 보듬어 안아 주는 것이다. 차가울 대로 차가워진 머리를 쓰다듬고 창백해진 볼을 부비며 눈물을 닦아 주자. 아무 말도 필요 없다. 단지 가슴과 가슴, 체온과 체온이 흐르고 통할 수 있도록 안아 주자.
그리고 어린 나에게 편지를 써보자. 당시 고통받던 어린 나를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어야만 했던 그 이유와 그 어쩔 수 없었음에 대해 낱낱이 고백해보자. 왜 내가 회피하고 도망갈 수 밖에 없었는 지에 대해 변명이라도 좋으니 털어 놓고 용서를 구하자. 설사 그것이 온전한 나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어리디 어린 자아가 위로받을 수 있도록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자.
편지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과거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 현재 사이에 발생한 괴리를 좁히는 것이다. 나는 하나여야 한다. 내 자아는 둘이 아닌 하나여야만 온전한 인격체일 수 있다. 이제 무의식의 바다 속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어린 자아를 꺼내 세상의 빛을 보도록 하자. 밝은 햇살 속에 행동하고 비로소 미소지을 수 있도록 새 전기를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