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미지 : <아이처럼 행복하라>, 알렉스 김 지음)
지난 4월 경제/경영/인문의 균형찾기 프로그램인 <에코라이후>의 오프수업을 경북 안동에서 가졌는데요, 수업이라고는 했지만 MT겸해서 1박 2일로 진행했었죠. 처음부터 지방에서의 수업이 예정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에코 3기 멤버 중 한명인 ‘알콩달콩’님이 매번 수업을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다보니, 미안한 마음에 4월엔 다 내려가자 했던게 발단이었죠. 그래서 간 곳이 바로 안동이었습니다.
사실 대단하지 않나요? 한달에 한번이라 할지라도, 학위과정도 아닌데 매월 오프모임을 위해 안동에서 서울까지 올라오는 정성이 말이죠. 놀기위해(?) 올라온다면 또 이해가 가겠지만, 토요일 오전 10시반부터 저녁 6시까지 주구장창 토론하고 발표하는 시간으로만 채워져 있는 힘든 수업... 게다가 한번도 빠지지 않는 그 지극정성은 운영자인 제가 봐도 정신적으로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 한다는... ^^
안동에서의 1박 2일은 아주 많이 즐거운데다가 유익하기까지 했습니다. 안동의 랜드마크 하회마을에 들러 탈춤공연도 보고, 하회마을 구석구석을 천천히 긴 호흡으로 둘러보는 시간은 기대 이상이더군요. 마치 이탈리아 베니스의 골목투어를 하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죠. 게다가 ‘호두씨앗’님이 예전 문화해설도우미로 활동했던 전력이 있던지라, 장소마다 곁들여지는 맛깔나는 해설 덕에 ‘이게 웬 호사인가!’란 생각까지 들더군요. 서애 유성룡 선생의 고택은 물론이고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병산서원, 그리고 안동하면 빼놓을 수 없는 퇴계 이황선생의 학교인 도산서원까지 모두에게 안동은 꼭 다시 오고 싶은 도시로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아, 먹방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안동 중앙시장에서의 찜닭! 매콤함과 달달함이 잘 어우러진, 게다가 양은 왜 그렇게 푸짐한지. 배 터지는 줄 알았다는... 다음날 먹은 오리지날 안동 간고등어야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 혹 안동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으시다면 꼭 한번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특히 초등학교 아이가 있다면 교육여행으로도 강추드립니다~
에구에구, 어쩌다보니 이야기가 안동 자랑(?)으로 흘러 버렸네요. 오늘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안동여행은 아니고요, 제목처럼 ‘돈 없이 or 적은 돈으로 즐기는 행복’입니다. 이 주제는 안동에서 진행된 4월 오프수업의 발표과제이기도 했는데요, 제가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돈이 최우선이라는 암묵적 순응 속에 살아가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가슴으로는 거부하고 싶지만, 머리로는 인정할 수 밖에 없죠. 국가와 사회라는 모든 시스템이 돈이란 혈액에 의해 움직여지다보니 돈은 좋든 싫든간에 제일 소유하고픈 물건이 되고 말았고,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돈으로 웬만한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세상에 살게 되었습니다.
1970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 교수는 행복지수 공식을 발표했는데요, 그는 행복이란 소유를 욕망으로 나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분자인 소유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혹은 분모인 욕망을 줄이면 줄일수록 행복은 커진다고 말했죠. 공식에 의하면 그렇죠? 자, 그렇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까요? 소유는 대체적으로 재화의 보유량을 의미하므로, 돈이 많다면 소유를 늘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소유란 곧 돈의 액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즉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은 커진다는 말로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말입니다(<그넘(?)이 알고싶다> 버전^^). 돈이 많다면 분모인 욕망 또한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돈과 욕망의 상관관계는 돈과 비례적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커지는 욕망의 속성이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본다면 돈이 많아진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 또한 커진다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분모도 같이 커지니까요). 실제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부자들을 봐도 그러함을 알 수 있고요.
욕망, 그 중에서도 상대적 욕망을 조절하라
그렇다면 행복지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맞습니다! 욕망을 ‘조절’하면 됩니다. 제가 줄이라는 표현대신 ‘조절’이란 단어를 사용한 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욕망은 2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절대적 욕망과 상대적 욕망이 그것인데요, 절대적 욕망은 살아가며 반드시 필요한 의식주와 같은 것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라 보면 됩니다. 즉 최소한의 기준 이상을 유지해야 하는, 다른 말로 본능적 요구란 단어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이 절대적 욕망은 채워지지 않을 경우, 제대로 된 인간의 삶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갖춰야만 하는 필수적 욕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 욕망은 좀 다릅니다. 이 상대적 욕망은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이 소유한 것에 대한 욕망, 즉 탐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시죠. 타인이 가지고 있는 그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없는지 말이죠. 그것이 내게는 절대적 욕망을 일으키는 재화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나 또한 가지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충동구매를 하거나 시기, 질투심에 괴로워한 적이 없는지 말이죠.
정리하자면 행복을 키우기 위해선 욕망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며, 욕망 중에서도 특히 상대적 욕망을 얼마나 잘 조절할 수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행복지수를 올릴 수 있는 비결이 될 것입니다. 절대적 욕망을 추구하되, 상대적 욕망을 잘 ‘조절’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한가지 비결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절대적 욕망은 제가 전에 쓴 글 <자본주의 시대에 잘 산다는 것(https://brunch.co.kr/@bang1999/17)>에서 말씀드린 것과 연결되는데요, 잠시 복습도 할겸 되새겨볼까요?
못 산다 < 의식주(최소한의 경제적 기준) < [못 산다 ≦ 잘 산다](상대적 기준)
의식주가 해결될 경우 우리는 ‘잘 산다’라고 말할 순 없어도 최소한 ‘못 살진 않는다’라고 말쓰드렸죠? 즉 평균이상이며, 상대적 기준으로 스스로를 ‘못 산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잘 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대적 기준의 ‘못 산다’란 개념이 바로 폴 새뮤얼슨 교수가 말한 욕망, 그 중에서도 상대적 욕망과 연결됩니다. 행복지수에서 상대적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면 행복은 커진다고 말씀드렸죠? 이처럼 ‘잘 산다’는 개념에서도 ‘못 산다’라고 하는 상대적 기준을 얼마나 배제하느냐에 따라 스스로를 ‘잘 사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는 거지요. 사실 행복이나 ‘잘 산다’는 생각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 특히 상대적 욕망을 잘 조절할 수 있다면 얼마든 행복은 우리 주머니 속에서도, 우연히 펴든 책장 사이에서도, 아이의 순박한 웃음 속에서도 찾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버렸고, 원래 쓰려던 주제와도 좀 벗어났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이야기 하나만 더 드리고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알렉스 김이 쓴 <아이처럼 행복하라>란 책에는 가난한 파키스탄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한 주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잘 읽어보시면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이야기들의 느낌을 보다 쉽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친구를 따라 폴로 경기장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도중에 건너편 가게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나는 그를 향해 셔터를 누른 후, 기꺼이 모델이 되어준 그에게 감사의 표시로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도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나처럼 생긴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습니다.
폴로 경기가 끝나고 사람들은 경기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말이 신기해서 말을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나를 보자 내 주위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날 어디를 가도 집중되는 시선 때문에 밖으로 나오기가 부담스러웠습니다.
밤에 갑자기 정전이 되었습니다. 마을은 캄캄해졌습니다. 더 이상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 마을을 구석구석 돌아다녔습니다. 사진을 찍고 구경하는 재미에 저녁식사도 잊었습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미스터! 미스터!”
낮에 나에게 손을 흔들어준 가게 주인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나를 알아본 것이 신기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가게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물론이라며 낮에 만났을 때처럼 웃으며 들어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가게 안은 밖에서 볼 때보다 좁았습니다. 메뉴판 하나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인에게 가장 흔한 메뉴인 치킨커리를 주문했습니다. 그는 잠시 앉아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주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10분쯤 지나 돌아온 주인의 손에는 치킨커리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제야 가게에서는 짜파티(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 화덕에 구운 빵)만 팔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나를 위해 밖에서 치킨커리를 사 온 것입니다.
미안한 마음에 커리에 손을 댈 수 없어 머뭇거렸습니다. 하지만 내가 먹지 않아 모두가 먹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치킨커리를 한 술 뜨자 주인과 종업원 모두 미소를 지으며 커리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늦게까지 이야기하며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음식값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친구를 위해 준비한 것이라며 괜찮다고 했습니다.
잠시 후 주인이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며 타라고 손짓했습니다.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갈 친구가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뒤에 타자마자 타이어에 펑크가 났습니다. 민폐를 끼쳐 미안하다고 하자 주인이 웃으며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