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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Jun 28. 2022

19년째 살고있는 아파트에 생긴
작지만 큰 변화(후편)

이웃사촌 간의 새로운 관계 맺기


☞ 19년째 살고 있는 아파트에 생긴 작지만 큰 변화(전편)




시간이 많지 않은 관계로 


다음 모임부터는 공연을 위한 곡 선정부터, 악보 출력, 공연을 위한 편곡 등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노래를 잘하는 분이 두 분 정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 실력에 ‘공연이라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창피는 빨리 당할수록 창피하지 않게 된다는 지론을 지닌 회장은 이미 창피함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 아니 극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냥 우리는 창피를 향해 돌진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메인 8곡과 2곡의 앵콜곡까지 모두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공연일(6월 25일). 회장은 너무 많은 인원이 모임으로써 맥주가 부족하지나 않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사람이 너무 없을까 봐 걱정이었죠. 그래도 이왕 하기로 한 거, 관객이 좀 있어야 공연할 맛도 날 테니까요. 5시 반쯤 공연이 6시부터 시작된다는 아파트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약간 비장해졌습니다. 잘해야 될 텐데. 드디어 야외 갤러리 작은 무대에 앉아 공연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주민들은 이곳으로 모이고 있었습니다.


회장의 인사말 이후에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별 것 아니다’ 생각했지만 그래도 살짝 긴장은 되더군요. 첫 곡 ‘사랑하는 이에게(정태춘, 박은옥)’의 간주가 시작되고, 우리는 목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민원 관계로 마이크를 쓰지 못하기 때문에 최대한 큰 목소리로 노래해야만 했습니다. 반응이 별로 없었습니다. 뜨뜻미지근한 정도라 해야 할까요? 살짝 곤혹스럽더군요. 뭐, 그래도 당.황.하.지.않.고 끝까지 불러야겠지요.


두 번째 곡인 ‘밤배’에 이어, 세 번째 곡인 ‘사랑해’까지 이어지자 점점 사람들의 숫자뿐 아니라 따라 부르는 사람들도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맥주의 힘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바랬던 입질(?)이 오자 회장의 기분도 좋아진 듯싶었습니다. 갑자기 맥주 한 잔 무료에서 두 잔 무료로 바꾸겠다 하더군요. 당연히 사람들의 호응도는 더 높아질 수밖에요. 그렇게 ‘모닥불’과 ‘바위섬’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이 이어지자 크진 않지만 ‘떼창’의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왠지 가슴이 뜨거워지더군요. 이게 공연의 맛인가 봅니다.


조용한 곡들에 이어 드디어 빠른 곡인 ‘연가’와 ‘라라라(조개껍질 묶어)’가 경쾌한 기타 리듬과 함께 등장하자 박수와 더불어 사람들의 호응은 한층 더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와 함께 준비한 메인 8곡이 모두 끝났죠. 그러자 한쪽에서 앵콜이 터져 나왔습니다. 앵콜송으로 ‘토요일 밤’을 부르고, 다시 앵콜을 받아 두 번째 앵콜곡인 ‘사랑하는 마음’까지 부르고 나서야 우리는 공연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한쪽의 취객(?) 분이 ‘앵콜은 최소 5곡은 불러야지!’라고 주장했지만 살짝 묵살해야만 했죠.



후련했습니다. 


그리고 뿌듯했죠. 달아오른 분위기는 대본에 없던 다른 분들의 참여도 유도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노신사분은 동네 자치센터에서 하모니카 재능 기부를 하신다고 본인을 소개한 후 멋진 하모니카 연주로 주민들을 흥겹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히 트로트가 유창한 하모니카로 연주되자 사람들의 더욱 흥겨워했죠. 그리고 이어 실제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는 젊은 두 분이 무대에 올라 단소와 대금 그리고 기타와의 콜라보를 보여주었는데, 정말 한여름 밤의 열기를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즐거움이었습니다. ‘가수가 왜 여기에?’란 의문을 가지자 어떤 분이 왈, 아파트 주민의 자제분이라고 하시네요. 찬조출연인 셈이었죠. 덕분에 우리는 귀호강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멋진 연주와 노래, 예기치 못한 기쁨이었죠.


뒤풀이는 북카페와 야외 갤러리에서 이어졌습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맥주를 마시며 오늘을 즐겼습니다. 노을이 지고, 서서히 어둠이 내리며 사람들의 수다는 깊어졌죠. 문득 여기가 어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제가 19년째 살고 있는 아파트의 한 공간이네요. 적막하기만 했던 이 공간이 이렇게 바뀌다니. 살짝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웃사촌들과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말이죠. 아내 또한 분위기에 취해 있는 듯싶었습니다. 최근에 저렇듯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죠. 이런 하루, 감사할 따름입니다.


느지막이 한 분이 맥주를 사러 오셨습니다. 만원을 내밀며 5캔을 달라고 하셨죠. 그러자 회장이 안된다고 하시네요. 왜? 분명 냉장고에 맥주는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거든요. 회장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팔수록 손해거든요.” 응, 무슨 소리지? 이번 맥주파티는 회장의 기획이기도 했지만 맥주 조달 비용은 전부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거였죠. 그리고 맥주 한 캔에 2,500원에 사 왔기 때문에 2,000원에 팔수록 손해였던 거고요. 그러니 회장 입장에서는 다 파는 게 목적이 아니라 차라리 남겨서 집에 두고 가끔씩 마시는 게 이득이었던 거죠. 참 별난 사람이긴 합니다.


뒤풀이 중 어떤 젊은 여자분이 아이와 함께 까만 봉지를 들고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일까 했는데 봉지에서 주섬주섬 아이스크림을 꺼내 주시네요. 왜? 그냥이랍니다. 공연하느라 수고도 했고, 또 이런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네요. 오~ 감동입니다. 이런 마음씀이라니. 물론 돈으로 쳐야 큰 금액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 마음과 정성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구나, 우리는 이렇듯 서로를 위한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펼칠 공간과 관계가 없었던 거네요.




회장은 합창단에 이어 아파트에 탁구 동호회도 만들었습니다. 무려 50여 명이나 되는 분들이 가입을 신청했네요. 물론 저도 했습니다. 올 1월부터 탁구클럽에 등록해서 열심히 탁구를 배우고 있거든요. 그는 아파트 지하 공간에 중고 탁구대를 매입해 탁구장을 만들었습니다. 동호회원들이 마음껏 탁구를 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겁니다. 그리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저는 코치가 되었습니다. 아직 실력은 모자라지만 완전 초보분들의 기초 정도는 감당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초보분들을 대상으로 조금씩 기초와 기본기를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제가 나선 것은 아니었지만, 주민들을 위해 저도 무언가 하나 할 수 있다는 것이 나름 뿌듯함이 되네요.


아파트가 변해가고 있네요. 삭막하고 무표정했던 딱딱한 콘크리트 공간이 인간미 넘치는 따스함과 관계가 더해지니 복잡복잡함과 더불어 사람들의 수다와 웃는 표정으로 가득해졌습니다. 진짜 이웃사촌이 되어가는 듯싶고요. 이제는 살짝 기대도 됩니다. 더 이상 이곳은 단절의 공간이 아니니까요. 사람들을 알아가니 대단한 분들이 엄청 많네요. 하지만 과거의 명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재, 그리고 이 같은 공간에서 우리는 어떤 시간들을 만들어 가느냐가 보다 더 중요한 거죠.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잘 즐기냐가 핵심일 겁니다.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관계가 더 깊어지면 정말 이사를 가야 할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쓸데없는 걱정이겠지만, 이 또한 고민이 아닐 수 없네요!


(끝)



* 덧붙임 : 한국아파트신문에 실린 아파트의 변화에 대한 기사

http://www.hap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5705





차칸양

"경제·경영·인문적 삶의 균형을 잡아드립니다"

- 재무 컨설팅, 강의 및 칼럼 기고 문의 : bang19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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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문학 배움터 '숭례문학당'과의 콜라보로 진행하는 경제책 함께 읽기 프로그램 <차칸양의 경제산책>이 9기('22년 7월)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이번 9기에서는 현재의 주식, 부동산과 같은 자산가격의 하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알고 있어야 할 2가지 책인 <돈의 역사는 되풀이 된다>(홍춘욱)와 <주린이가 가장 알고 싶은 최다질문 TOP 77>(염승환)을 준비했습니다. 더불어 2회의 온라인 독서 토론을 통해 최근의 경제 흐름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드릴 예정이니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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