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의 마지막 날, 밤 열한 시까지 이어진 야근을 마치고서 아무도 남지 않은 사무실을 나섰다. 대중교통이 일찍 끊기는 울산인지라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피곤한 몸을 겨우 이끌고 미뤄놓은 빨래와 집정리를 하던 중, 창 밖에서 불꽃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뿔싸. 그렇게 나의 서른은 첫사랑보다 은밀하고 열병보다 무자비하게 찾아왔다.
문득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게나마 그리던 서른은 과연 이런 모습이었나.
엄마를 졸라 핸드폰을 쟁취했던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창밖에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고, 중학교에 갓 입학한 나는 부모님과 발코니에 서서 감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스스로가 제법 대견한 마음이 들었는지 스무 명도 채 되지 않는 전화번호부 속 친구들에게 신년 축하 문자메시지를 꾹꾹 눌러 전송했다. 신년에도 이어갈 우정과 사랑을 다지며 그럴싸한 어른이 된 것 같은 엉뚱한 자부심에 젖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도 그랬다. 열아홉의 마지막 날엔, 고교 시절 매일처럼 붙어 다니던 친구와 함께 위조된 민증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었던 요란스런 호프집을 찾았다. 우리와 비슷한 꼼수를 부린 예비 이십 대 수십 명과 함께 카운트다운까지 해가며 스무 살의 신년을 맞았다. 대입도 확정되었겠다, 인생의 목적도 이뤘겠다, 꿈에 그리던 서울 라이프를 즐길 생각에 한껏 들떴던 스무 살의 나는 인생에 임하는 각오가 남달랐다.
군대에서 맞았던 신년은 더했다. 8월 군번인 나는 군대에서 마지막으로 맞이했던 신년에 상병 7호봉이 됐다. 당연하게도 휴가는 내 위에 있던 병장들이 모조리 나갔고, 애매한 기수라서 내무반을 지켜야 했던 나는 야간근무를 서는 동안 우득부득 이를 갈았다. 이듬해 5월에 전역을 하게 되면 예쁜 여자친구도 만들고 공부도 열심히 하겠다고, 인생에 최선을 다 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겠다고 악으로 깡으로를 외쳤다. 아무도 지워준 적 없던 부담을 어깨에 얹던 나는 책임감에 사로잡힌 어른이었다.
뭐, 이때뿐이겠는가. 대학교 마크가 크게 새겨진 과잠을 입고 금의환향하여 부모님과 함께 맞이했던 스무 살의 마지막 날에도, 가슴 찢어지게 아프고 힘들었던 스물넷의 마지막 날에도, '내일 일어나 뭘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며 맞이했던 스물일곱의 마지막 날에도, 나는 언제나 치열했고, 또 단단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제법 어른스러운 용모에 꽤나 단단하게 철학과 기준을 갖추고, 어쩌면 새로운 가족을 가지게 될 줄 알았던 나의 서른은, 안타깝게도 인생의 어느 때보다 위태롭다.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새해를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듯이 맞아버린 나는 적잖이 당황했고, 또 후회했다.
이립,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나이라고 했다. 과연 나는 진짜 이립이 되었나. 십 대 시절 수백 번 수천번 그려내며 기다렸던 이십 대는 이미지 트레이닝에 혹독했던 만큼 단단했고 준비되어 있었다. 말초신경까지 격동하는 온갖가지 자극은 지점토에 찍힌 손가락 자국처럼 이십 대의 나에게 그대로 아로새겨졌다. 때문에 나의 이십 대는 흥에 겹지 않은 날이 없었고, 서른의 나를 예습할 시간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그렇게 서른이 됐다. 마음을 확고히 먹는 것도, 도덕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도 어렵다. 내가 되고자 했던 서른과는 분명 괴리가 있다. 생각 속 서른은 야근에 지쳐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것에 소홀하지 않았다. 생판 처음 와본 외지에 혼자 살지도 않았으며, 그 때문에 이리 사무치게 외롭지도 않았다. 아직 누군갈 용서하기보단 미워하기가 쉽다. 애송이처럼 보이던 여자친구와 죽을 듯 싸우고 돌아서서 생각해 보면 진짜 애송이는 나다. 윤기 넘치던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해졌고, 배는 볼록, 얼굴엔 기름기가 좔좔 흐른다. 삼십 년간 스트레스와 맞서 싸워 온 간은 이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지 매일같이 물에 젖은 이불을 뒤집어쓴 듯 피곤하다. 개운하게 땀 흘릴 적보다 진땀 흘리는 때가 많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날보다는 회피하거나 돌아가는 날이 많아져 남성성을 잃은 기분에 우울하기도 하다.
그래서 결심했다. 더 이상 이렇게 버벅댈 순 없다. 이미 들이닥친 나의 서른, 예습은 못했지만 죽기 살기로 매달려 정복해 보자고. 멱살이라도 한 번 잡고 덤벼보자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은 지나왔던 나의 신년 맞이 행사는 멋진 삼십 대를 보내보고자 바치는 제물이요, 스스로에 대한 안타깝고 애달픈 묘사는 확고한 마음으로 바로서기 위해 외우는 염불소리다.
뭐, 그래서 여차저차 브런치를 시작해 보자 마음먹었다. 새로 글도 쓰고 예전에 써둔 글들도 짜깁기해 작가등록을 했다. 매 순간이 처음이었으면서도 어른스럽기 위해, 혹은 어른스러워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나의 이십 대를 지나 진짜 어른이 된 나를 보여주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서른의 나에게도 질서가 생길 거라고, 완성된 나를 다듬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어쩌면 새로운 자극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날에 쌓아온 기본기들을 모으고 모아 내가 깊게 연모하고 좋아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요량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면 어렵지만 공부할만한, 무거운 마음으로 읽으면 쉽고 유쾌한 주제의 글을 쓸 것이다. 아저씨의 내공을 무시하지 마라. 원래 무림고수는 후덕한 인상으로 상대를 방심시키는 법이니까.
혹시라도 (풋) 아저씨의 취향이 궁금하다거나, 취향 있는 아저씨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면 누구든 언제나 환영이다. 나의 글을 읽어달라. 또, 혹여나 나의 글 속에 잘못된 정보나 생각이 있거든 머뭇거리지 말고 채찍질해 달라. 진짜 이립이 되기 위해서는 바른말보다 좋은 약은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