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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 집은 미술관 May 20. 2024

하강(The Descent)

시신이 썩지 않는 통풍장치. 최초로 해석해 설명하는 액자의 비밀.

유튜브 채널 <내 집은 미술관>에서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첫 느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 작품을 대하는 관객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상하네… …왜 사람들을 액자 안에 구겨 넣었을까?”라고 말하기도 하고 “밀랍 인형 같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이 허리를 구부렸고 고개를 꺾기도 하고 발가락을 오므리고 있다. 모두 뭔가를 이루기 위해 공동체가 되어 애쓰고 있다. 이로 인해, “이상하다.” “답답하고 갑갑하다.” “신기하다.”라는 느낌을 갖는다. 작품을 대하는 첫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화가가 계획한 구성 장치다. 조금 더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그동안 이미 밝혀진 사실보다 더 놀라운 표현이 이 작품에 담겨있다. 죽음 다음에 있게 될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진 작품이며 신선한 공기가 유통되어 시신의 살이 썩지 않는 신비의 환풍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니만큼 시간이 걸려도 정밀하게 분석해 보려 한다. 긴 시간이니 편하게 보실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시고 잠시 쉴 수 있는 커피가 있다면 준비해 두는 것도 좋겠다.


작품의 크기가 관객을 압도한다. 220X262Cm. 실물 수준의 대작이다. 미술관의 도움이 있었겠지만 중세 시대의 작품인데도 여전히 그림에 살아있는 듯 윤기가 흐르고 색이 선명하다. 작품이 완성된 때가 바로 어제인 듯하다. 


미술관

이 작품이 전시된 곳은 스페인 회회 예술을 대표하는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다. 이곳에 전시된 로히어 반데르 웨이덴(Rogier van der Weyden)의 하강(십자가에서 내리심)이란 작품이다. 이 화가는 북유럽 화가를 떠올리면 손꼽는 로보트 캉팽(Robert Campin),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와 함께 북유럽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했던 한 사람이다.

이 화가는 북유럽 화가를 떠올리면 손꼽는 로보트 캉팽(Robert Campin),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와 함께 북유럽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했던 한 사람이다.


그림의 일생

사람에게 살아온 일생이 있듯 그림에도 그림의 일생이 있다. 1566년, 당시 북유럽 브뤼셀(Brussels)과 투르네(Tournai)가 전쟁을 할 때 이 작품이 지금의 스페인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그림은 화가의 공방에서 나온 직후에 그린 초기 작품으로 추정한다. 초기에 제작한 작품이 이 정도이니 그의 타고난 예술적 능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루벤 

루벤(Leuven)이라는 도시를 한 컷의 사진으로나마 보고 가면 좋겠다. 이 작품이 처음 제작되어 전시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루벤(Leuven)은 현재 벨지움(Belgium)에 있는 도시며 Dijle강과 Voer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사진에서 확인해 볼 수 있듯이 플랑드르 특유의 건축 구조가 눈에 띈다.


주문자

이 작품을 이해할 때 꼭 필요한 단어가 궁수였던 주문자이다. 

중세 그림에 있어 주문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그림의 특징이 결정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비용을 지불하는 쪽이니 갑인 셈이다. 주제가 정해지면 창작은 화가의 몫이지만 이 그림은 다른 그림에 비해 주문자의 영향이 크게 끼친 경우에 속한다. 

작품이 처음 선보인 석궁병 조압 예배당 Onze-Lieve-Rouw-van-Ginderbuiten)

주문자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당시 루벤이란 도시에 있는 석궁병 길드이며 자신들의 조합 예배당(Onze-Lieve-Rouw-van-Ginderbuiten)을 위해 의뢰된 것이다. 그래서 작품에 이들을 반영한 화가의 구도와 의도가 아주 강하게 드러난다. 

당시 석궁병들은 성곽 지역을 지키는 중요한 임무를 감당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이 조합원들의 위상 또한 대단히 높았다. 기록을 보니 자원 봉사자들인 이 길드 관리들의 간부는 그 도시의 매우 건강한 시민들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상남자인 셈이다. 멤버의 정원수도 60명으로 제한되었다.  


이 석궁조합이나 조합원들에 대해 조사를 해보니 단체그림이 있어 올린다. 이 한 장의 그림으로 당시 이들의 위상과 지역 내에서의 역할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림 설명에 암스테르담 조합원의 100번째 초상화라고 적혀있다. ‘의리’로 똘똘 뭉쳐있으며 조합원들 간의 끈끈한 우정이 느껴진다. 비슷한 인물의 유형이 있긴 하지만 실제 인물을 대상으로 그렸는지 얼굴 모습이 대부분 다르다. 오늘날로 얘기하면 단체 초상화인 셈이다. 현장의 격려와 단합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무 캔버스

작품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기 전에 먼저 알고 계셔야 할 사항이 있다. 오늘날의 캔버스에 해당하는 그림의 바탕이 되는 재질이다. 


지금이야 특별한 천이 보편적으로 활용되나, 당시에는 특별한 나무를 선정해 갈고닦아 바탕으로 활용했던 시기다. 미세하지만 수축과 팽창을 하는 재질이라 잘못하면 작품이 분리되거나 찢어진듯한 현상이나 비틀어질 염려가 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화가 역시 이 부분에 엄청난 주의와 노력을 기울였다는 기록이 있다.  


작품을 위해 최고의 발트해에서 생성된 오크(oak) 나무 패널 11장이 사용되었다. 화가의 세심한 정성뿐만 아니라 그를 도왔던 여러 조수들의 땀이 함께 들어 있는 작품이다.   

                                                                                                                              

구도 구성

그림의 뼈대 되며 작품 이해를 빠르게 할 수 있는 구도와 구성을 살펴보자. 여러 사람이 밀집되어 있어 복잡할 것 같지만 하나씩 들여다보면 쉽다. 가장 먼저 여러 시선들이 보인다. 


시선들                                                 

이 그림의 매력 중 하나는 서로 다른 시선들이다. 인물들이 마치 대리석으로 완성한 조각이나 또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것 마냥 행동이 일시 정지된 것 같아 보인다.  그렇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시선은 멈추지 않고 현재 진행 중이다. 


인물의 몸에 활 모양을 넣어 움직임을 넣었고, 각자의 다른 시선을 넣어 멈추지 않는 마음을 넣었고, 또 눈물을 넣어 인물들의 몸에 애통의 몸부림을 넣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뜯어보면 갑갑했던 첫 느낌이 사라지며 인물들에게서 어떤 움직임이 포착된다. 


여기에 더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덧칠이 가능한 유화를 사용해 이전의 템페라에서 볼 수 없는 윤택이 나는 효과를 냈다. 제자 요한이 입은 붉은색과 어머니 마리아가 입은 울트라 머린블루 Ultramarine Blue)의 색을 보라. 옷감에 비단결 같은 윤기가 흐르며 층층의 색의 농도가 달리 표현되어 색상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단색 속에 담긴 서로 다른 색상이 이동 중인 시선과 부딪혀 맑은 색상의 소리를 낸다.


그동안 투박한 벽화 색상에 익숙해 있던 관객들이 얼마나 감탄하며 신기해했을까! 


십자가 구도

작품 속 구도와 구성 중에 특이한 것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십자가 구도와 구성 역시 특별한 관심을 끈다. 4개의 십자가 구도와 구성이 있다. 

액자 자체가 십자가 형태를 띠고 있다. 상단 부분이 나무 십자가의 윗부분을 연상시킨다. 
작품 안에 예수가 달렸던 나무 십자가이다. 
여인의 허리띠에 십자가를 넣었다. 

다음은 매우 특별한 십자가 형상이다. 필자가 중세 명화 중에 가장 귀여운 십자가로 기억한다. 예수 머리 쪽에 있는 여제자 몸에 품고 있는 허리띠 십자가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가 걸었던 신앙을 따르겠다는 여제자의 귀엽고도 뜨거운 신앙의 마음이다. 

등장인물의 얼굴을 따라 형성된 십자가이다.

마지막으로 매우 특별한 또 하나의 십자가 구성이 있다. 등장인물을 활용했는데 화가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중앙의 예수를 기준으로 좌우의 인물들의 얼굴을 이으면 십자가 형상이 된다. 그렇게 볼 때 어머니 마리아는 이들 인물들에게서 살짝 떨어져 있는 광경이 연출된다. 필자는 이 부분 화가의 의도된 구성이라 여긴다.

당시 십자가 화풍을 염두에

당시 중세 기독교 명화의 특징을 보면 알 수 있다. 십자가 곁에 늘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이나 막달라 마리아가 있다. 특별하게도 곁에서 쓰러져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이 많이 담겨있다. 당시의 일반적인 그런 화풍을 감안하면 이 작품에서도 다른 작품에서처럼 십자가 곁에 쓰러져 있는 형상이 된다. 십자가 곁의 어머니 마리아를 염두에 둔 화가의 의도된 구성이라 여긴다. 


다음은 이 작품을 소개할 때 늘 등장하는 유명한 대조와 대비의 구성이다. 


평행

예수의 몸과 어머니 마리아의 몸이 평행을 이룬다. 이런 묘사는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의 특별했던 관계를 부각하며 예수의 죽음 후에도 그분의 신앙과 함께하겠다는 신앙의 의지로 볼 수 있다. 이때 마리아는 인류의 대표자가 된다. 


이렇게 평행을 이루게 표현한 데에는 하나 됨에 관한 성경적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성의 배경이 된 성경 구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요한복음 17:2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에베소소 4:3-6)


이런 상징이 두 개 더 있습니다. 팔과 눈입니다. 마리아의 왼팔과 예수의 오른팔이 함께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왼팔과 예수의 오른팔이 함께 평행을 이룬다. 이 팔을 쳐다보고 있으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대못에 살이 패인 아들의 손을 봤으면 아마도 이 손을 붙잡고 쓰러져 있게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화가는 냉정하게 거리를 두어 표현했을까? 이 팔 역시 전체 몸의 상징에 맞춰 일부분이나마 평행을 표시한 부분이라 볼 수 있으며 또 다른 해석을 해볼 수 있게 한다.


바로 예수의 신성과 어머니 마리아의 인성의 차이를 나타내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해석이다. 막달라 마리아를 나타내는 중세 명화인 이 작품을 기억해 보자. 

놀리 메 탄게레'(Noli Me Tángere). 티치아노. 1512."나를 만지지 마라" (요한복음 20:17)

부활한 예수임을 직감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만지려고 할 때 예수가 몸을 급히 피한다. 부활한 예수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 몸을 만질 수 없다고 언급한 부분의 그림이다. 이 기록은 신약의 난제로 꼽힌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어머니가 아들의 손을 잡지 못하게 표현한 것과 일맥 상통한 상징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노란 선 안에 있는 일직선이 보인다. 신과 인간의 경계선으로 해석한다.

아들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의 두 팔의 경계선을 보자. 이곳에 해답이라 생각되는 화가의 의중이 들어 있다고 본다. 


두 팔 중앙에 경계선 역할을 하는 수직선이 있다. 상하 일자로 경계를 이룬다. 화가는 이곳에 천을 활용해 선을 넣어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표현했다. 일반 관객들은 볼 수 없는 묘사로서 화가가 숨겨 묘사한 도상으로 해석된다. 부모와 자식 사이라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수 있지만 원죄를 지닌 인간이 넘을 수 없는 영역의 경계로 해석된다. 비록 두 사람의 손이 가깝지만 어머니가 만질 수 없게 묘사한 이유이다. 


눈도 마찬가지다. 평행을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눈동자의 모습이 동일하다.  


예수와 어머니의 몸이 평행을 달리며 몸 전체가 활의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묘사는 작품 의뢰인인 석궁병 길드를 의식한 구성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창의성이며 의뢰인을 배려하는 화가의 마음이 보인다.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숨 막히는 애통의 순간이지만 이런 표현을 생성해 냄으로써 작품에 동적인 비행의 움직임을 만들었다. 

화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궁수가 사용했던 활을 2군데 더 등장시켰다. 오른쪽과 왼쪽 구석에는 장식 무늬 속에 궁수 길드를 상징하는 활이 그려져 있다. 


숫자

작품 속에 숫자가 보인다. 중앙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예수를 제외하면 중앙과 좌우의 인물들이 숫자로 대조와 대비를 이룬다. 각각 3명씩 그룹 지어 있다. 비단 숫자만이 아니다. 일반 관객들이 설명 듣지 못한 교묘한 대조와 대비들이 넘쳐난다. 


남녀 비율과 의상의 색과 몸의 자세 그리고 머리 모양 등인데 이 역시 숫자로 표시할 수 있다. 인물 속에 담긴 대조와 대비를 자세하게 풀어보자.


인물

먼저 양쪽 맨 끝에 있는 남녀다. 남자와 여자를 등장시켜 무릎과 등을 구부려 대조와 대비를 이뤘다. 이 묘사는 관객의 시선을 중앙으로 인도하며 등장인물들을 더욱  밀집시키는 역할을 한다.  

양쪽에 그룹 지어 있는 3명의 인물을 살펴보면 이들 역시 여러 가지 대조와 대비를 이루고 있다. 우선 남녀 비율이 1:2, 2:1이다. 이들 속에 흰색 머리띠를 쓴 인물이 한 명씩 있고(노란색), 짙은 색 머리띠를 쓰고 있는 인물도(청색) 한 명씩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흰색) 머리에 아무것도 쓰고 있지 않다.  남녀, 머리 의상뿐 아니라 색을 활용하기도 했다. 붉은색 의상을 입은 인물이 한 명씩 있다. 

손 모양은 어떤가?  중앙에서 가슴을 정면으로 보이고 있는 남녀 인물들이 한 명씩 있는데 그들의 두 팔과 손동작 역시 대조와 대비를 이룬다. 여성은 어머니 마리아의 상체를 잡고 있고 남성은 예수의 하체를 잡고 있다. 


등뒤에 있는 인물들의 손동작도 마찬가지다, 왼쪽 여성은 오른팔을 보이고 있고 한 팔은 손끝만 보인다. 오른쪽 남성은 반대로 왼손을 보이고 오른손을 살짝 보인다. 

그냥 등장한 모습이 아니라 철저하게 대조와 대비로 인물들을 구성했다. 얼마나 고민하며 구성했을까? 화가의 노력이 전해진다.


네모의 구성

또 하나의 구성은 네모다. 위에서 언급한 숫자, 인물, 의상, 색, 손 모양 등과 함께 네모라는 도형의 구성이다. 분석해 볼수록 참 대단하다.  


이 네모 도형에는 얼굴과 팔, 다리가 들어있으며 위치적으로도 마리아는 아래쪽에 있고 막달라 마리아는 위에 있어, 이 역시 대조와 대비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맨 끝의 인물들의 발을 한 번 보자. 왼쪽 제자 요한은 맨발인 반면에 오른쪽 막달라 마리아는 맨발을 숨겼다. 이 역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게 한 대조와 대비다. 


이름 

1:어머니 마리아,  2:제자 요한,  3:마리아 클로파스,  4:마리아 살로메,  5:니고데모,  6:하인,  7:아리마대 요셉,  8: 하인,  9:막달라 마리

이 그림에는 모두 열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미술 사학자 Lorne Cambell에 의한 인물 지정인데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적는다. 아래는 그가 제시한 인물들의 이름들이다. 


중앙에 예수, 땅에 쓰러져 계신 어머니 마리아(1), 어머니를 부축하고 있는 제자 요한(2), 그 뒤에서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마리아 클로파스(3), 어머니 마리아를 바로 뒤에서 두 손으로 부축하는 마리아 살로메(4), 예수님 머리 뒤에 있는 니고데모(5), 사다리 위의 젊은 하인(6), 예수님 다리를 붙들고 있는 아리마데 요셉(7), 향품을 들고 있는 나이 많은 하인(8), 두 팔을 모으고 슬퍼하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9)이다. 


여기서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다. 필자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5번 니고데모는 부자 아리마대 요셉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7번 아리마대 요셉은 니고데모로 해석한다. 


분석을 싫어하는 분들은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그래도 미술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한 인물의 해석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특히 이 작품에서 두 인물이 지닌 상징과 숨겨진 도상은 너무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정확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주제로 아래에서 설명을 드린다. 


왜?

어쩌면 이 한 단어가 이 그림 감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겠다. 이 그림을 처음 대한 15세기 북유럽 당시 사람들을 상상한다면 21세기 우리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심하게 놀랐을 것으로 추측한다. 

당시 보통의 십자가를 주제로 하는 그림의 틀을 완전히 깨 버렸기 때문이다. 흔히 봤고 기대했던 배경이 전혀 없으며 특히 최소한의 공간조차도 사라지게 했다. 

Joos van Cleve, c. 1518-1520

이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미술 사학자들은 슬픔을 표현하는 새로운 창의적 해석과 표현법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생각지도 못한 화가 만의 도상 표현법도 한몫을 하며 잘 드러나지 않지만 능숙한 빛 처리도 일품이란 평가다. 왜라는 질문을 꽤 중요한 주제로 삼아야 하는 작품이다. 


수류탄

관객이 이 작품을 대하면 어떤 한 단어가 떠오르는지 묻고 싶다.  필자는 폭발력이 담긴 수류탄이 떠오른다. 

이 그림의 특징은 예수의 제자들이 지닌 애통한 마음을 밀도 있게 응축해 표현한 점이다. 그 갓을 기초로 등장인물들의 연극적 몸동작인 순간 멈춤과 인물들의 배치를 통해 표현해 낸 폭발력이다. 


그림 앞에서 찬찬히 각 인물들을 들여다보면 공간의 갑갑함이나 폐쇄된 공간의 느낌을 벗어나 그들의 슬픔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된다. 그러다 보면 사랑하던 사람을 잃어버린 아픔이 응축되어 수류탄처럼 폭발한다. 


인물들의 밀착과 갑갑한 구성을 빌려와 최대한의 슬픔과 애도가 그림에서 터져 나오게 구성한 점이 최대의 걸작 이유라고 본다. 그래서 군대서 경험했던 수류탄이 떠오른다. 


조각

등장인물들을 보면 옷만 걸쳤을 뿐이지 조각 같은 느낌이 든다. 매끈하게 조각해 다듬어 놓고 중앙에 배치시킨 예수의 몸을 보면 대번에 그런 생각이 든다. 시신이나 인물보다는 조각에 가깝다. 


화가가 인물을 이렇게 묘사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실제 조각들을 보고 자랐으며, 특히 로보트 캉팽(Robert Campin)의 도제 생활에서 시작된 조각 훈련으로 습득된 것으로 해석한다. 


화가의 아버지는 당대에 칼을 제작했던 주물의 명장이었다. 칼을 제작하는 전 과정을 지켜봤을 것이고 디자인과 활용성 그리고 주문자를 위해 했을 행동 등을 배웠을 것이다.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이렇게 매끈한 몸으로 묘사한 것에는 부활이라는 성경적 상징 부분을 염두에 둔 것으로도 해석된다. 아직 미술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다. 필자가 왜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지를 아래에서 설명드린다.  


바탕색 

그림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탕색이다. 바탕 전체를 슬픈 애도의 마음이 잘 드러나도록 단색이며 눈에 잘 띄는 황금색으로 입혔고, 그 슬픔을 극대화해 실제같이 전하기에 알맞은 실제 인물 크기로 구상했다. 


중세 기독교 회화에서 황금색은 천국의 상징이다. 죽음을 통해 구원받은 모든 인류에게 도래할 천국이 바탕색인 셈이다. 예수의 죽음과 잘 어울리는 색 선택이다.


이제부터는 화면 속의 인물들을 한 명씩 만나 자세히 살펴보자. 이들 인물들 속에는 일반인이 생각하기 어려운 여러 상징들을 관객들 모르게 심어 놓았다. 


예수. 상흔

예수의 시신이 십자가에서 막 내려졌다. 잔인한 채찍의 형벌이 몸에 있었지만, 화가는 채찍의 자국을 전혀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십자가 고난을 표현했는데, 실제 인물 사이즈를 적극 활용한 상처의 심각성이 드러나도록 했다. 


조각 같은 매끈한 흰색 피부 위에 단 한 줄기 붉은 피를 진하게 흘러내리게 했고, 상처가 깊게 파이게 묘사해 창에 찔림이 살인적이었음을 알렸다. 살 속의 뼈가 보일 정도다. 허리뿐만 아니라 양 손등과 발에도 깊게 파인 상처를 보인다. 관객은 매끈함의 조각상과 살인적인 상처의 대조를 통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신기한 극심함을 체험케 된다. 이 부분 잘 드러나지 않는 대조가 된다.


알몸

서있는 인물들과 달리 시선이 집중되도록 대각선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옷을 입지 않은 알몸의 표현은 당시 십자가에 처한 로마의 형법에 의한 표현이지만 예수가 원죄가 없음을 상징한다. 


이 알몸의 표현과 함께 시신을 감싼 흰 세마포 역시 성경 구절에 따른 표현이기도 하며 흰색의 상징을 활용한 원죄가 없는 예수의 무오성을 알린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마태복음 27:59-60) 


가시 면류관

십자가 예수의 상징인 가시 면류관을 보자.  화가는 고난당하신 흔적을 보이기 위해 머리에 쓴 가시 면류관은 벗기지 않은 채 그렸다. 몸에는 상흔이 없어도 관객들로 하여금 십자가 고통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이 가시 면류관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로마 병정이 예수를 조롱하기 위하여 씌웠던 가시나무로 만든 월계관이다. 말이 가시지 실상은 송곳니나 뾰족한 바늘과 같다.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마가복음 15:16-17)


완전한 것 같은 인체 묘사 중에 불편해 보이는 부분이 있다. 대표적으로 예수의 목이다. 다른 곳에 또 있다는 의미다. 


이미 시신이 되었음을 전하기 위해 중력에 잡힌 고개를 완전히 꺾어지게 묘사한 부분이지만 그래도 부자연스러움은 피할 수 없다. 수평이 강조됐고 뒤에 있는 인물의 얼굴이 좀 더 잘 드러나도록 강조할 수 있었지만 결국 신체 일부를 왜곡시킨 결과가 된다.


어머니 마리아 

자식의 죽음을 목도한 어머니 치고 땅바닥에 주저앉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하나님이며 동시에 인간이었던 자녀 예수를 낳아 키웠던 유일무이한 여성인 어머니 마리아의 쓰러진 모습이다. 


얼굴이 핏기가 하나 없는 석고 피부로 묘사했다. 죽은 자식보다 살아있는 어머니가 더 창백한 상태다. 옆에 있는 제자 요한이나 심지어 이미 죽어 시신이 된 아들 예수의 팔과도 색이 완연히 다르다. 살아 있는 것이 살아있는 게 아닌 심정의 표현이다. 


현재 제자 요한과 이복동생의 부축에 의해 그나마 몸체를 유지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두 다리가 정상적인 몸 비례를 벗어나 길게 묘사되어 있다. 왜일까? 


의상

어머니 마리아가 입은 옷은 상하로 연결된 간결한 의상이다. 중세 그림을 언급하면 늘 등장하는 마리아의 색이라 불리는 청금색 울트라 머린 블루다. 보석 값과 맞먹는 비싼 안료일 텐데 아낌없이 사용했다. 당시 의뢰인들의 재정이 얼마나 넉넉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재정이 넉넉하지 못할 경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와 같은 옅은 청금색이 등장한다. 중세 기독교 명화에서는 이 색의 짙고 옅음으로 인물의 중요도를 알리기도 했다. 


여성임을 감안해 소매와 치마 끝 단에 금색으로 수를 놓아 아름다운 디자인을 넣었다. 예수와 색으로 비교해 보면 간결한 색이다. 예수는 살색과 흰색이고 어머니 마리아는 청색과 흰색이다. 


다리

화가는 마리아 몸에 여러 가지 상징을 담았다. 그중의 하나가 의상 속에 숨겨진 다리다. 시선으로 의상의 끝을 쫓아가 보면 의외로 의상이 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구성한 고육지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 전체에서 보면 공간에 깊이가 없다. 다른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이 화가의 특이한 표현법이다. 그럴지라도 이 작품에서는 사다리가 있어 최소한의 안정된 필수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바로 그 공간의 깊이를 위해 마리아의 다리를 뒤쪽으로 깊이 넣고 의상으로 덮은 것이다. 이 구성 덕분에 아래 공간에 깊이가 더해졌다. 치마 끝 부분을 보면 당시 신발 디자인인 끝이 뾰족한 그녀의 신발이 보인다. 


손의 위치

마리아의 몸에 담긴 여러 가지 상징 중에서도 관객이 발견하기 어려운 상징이 있다. 두 팔에 담긴 상징인데 어쩌면 미술사 처음으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우선 두 팔의 상징이 의뢰인인 궁수를 상징하는 활의 의미가 있다. 또 하나는 예수와 함께하겠다는 신앙의 결의로 그녀의 왼팔이 예수와 같은 평행을 이룬다. 이것들 외에도 지니고 있는 상징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녀의 손의 위치다. 이 손에 담긴 상징을 해석하기 위해 예수의 손과 비교 곧 드러난다. 성경에 기록된 그녀의 일생에서 찾을 수 있다. 


니 마리아의 두 손의 위치와 예수의  두 손의 위치를 비교하면 특이함이 발견된다. 예수는 왼팔이 천국의 상징인 황금색 바탕 위에 있고 오른손은 십자가 피의 상징이며 대속의 상징인 붉은색 바탕 위에 놓여 있다. 

우연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화가의 철저한 계획적 구성의 결과로 풀이한다. 이 두 손이 있는 곳의 바탕과 위치는 예수의 하나님 되심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며 십자가에서 원죄를 사하시며 돌아가신 분이다. 색으로 언급하면 왕의 상징인 황금색과 십자가 피의 상징인 붉은색이다.

어머니 마리아의 두 손은 어떤가? 왼손은 자신의 몸에 올려져 있고 오른손은 해골과 제자 발 사이에 놓였다. 예수의 두 손과 마리아의 두 손 모두 특별한 한 선 위에 놓여있다. 화가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구성임이 분명하다. 이 특별한 선은 작품에 등장하는 특별한 한 제자를 위해 구성된 선으로서 매우 귀중한 선이다. 


오른손(죽음)

마리아의 두 손에는 죽음과 생명의 두 가지 상징이 들어 있다. 먼저 죽음 편을 보자. 오른손에 담긴 상징이다. 

간혹 중세 명화 속의 한 인물이 인류 전체를 지칭하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아래 해골과 뼈가 아담을 가리킨다면 여성인 마리아는 불순종을 적극적으로 행했던 이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 그녀의 오른손이 죽음을 상징하는 아담의 해골과 죽음이라는 육체의 한계를 지닌 제자 요한의 발 사이에 놓이게 한 이유이다. 결국 이 오른손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임을 알리는 도상이다. 

왼손(생명)

이번에는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던 인류를 회복시켜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의 수태고지를 알리는 상징이다. 지금 그녀의 왼손이 배 부분의 몸에 올려진 이유로 본다. 이 해석은 하나님께 높이 쓰임 받은 그녀의 충실한 신앙을 알릴 수도 있어 당시 가톨릭적 마리아의 해석에도 부합된다. 


마리아 몸의 위치와 이를 통해 구성한 그녀의 두 손의 위치가 결국 예수의 손과 일직선 상에 놓이게 하며 이를 통해 성경 속 핵심 내용을 관객에게 전한다. 이 작품이 중세 명화 중의 명화로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은 화가의 이러한 치밀한 구성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으로 본다. 


막달라 마리아

12제자만큼 신앙이 좋았던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보자. 부활 후에 가장 먼저 만난 제자가 여성인 이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림 속 막달라 마리아를 분석할 때 2군데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붉은 선 안과 밖의 영역이다. 


선 안에는 막달리아의 시선과 눈물과 양손과 반지와 예수의 발이 들어 있다. 이 작품의 제목처럼 위에서 아래를 향한 구성이다. 붉은 선 밖에는 그녀의 애통해하는 몸동작이 잘 드러난다. 슬픔의 극대화를 위해 특이한 모양의 팔을 만들고 몸을 비틀었는데 좌우 대칭을 이루며 무난하게 인물 속에 적응했다. 


길게 늘어뜨린 그녀의 터번을 먼저 보자. 흰색의 터번이 그녀의 머리에서 아래 수직으로 길게 내려졌다. 이 구성은 흰색의 이 터번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과 손과 반지와 특히 눈물이 잘 드러난다. 이 요소들을 강조하기 위한 배경 색이라고 보시면 된다. 사각형 안에 들어 있는 이들 요소들은 하나하나가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눈물

 

막달라 마리아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확대경 없이는 볼 수 없다. 흰 터번을 조금 어둡게 처리해 눈물 방울이 연하게나마 보인다. 유화를 활용해 실감 나는 눈물방울이 묘사된 것이다. 당시 발전한 과학에 힘입어 눈물에 빛이 투영되어 들어간 부분까지 묘사되어 있다. 중세 명화 속에 역작이 탄생된 순간이다.

 

반지

떨어지는 그녀의 눈물을 따라가면 오른손 넷째 손가락에 보석이 박힌 금반지에서 시선이 멈춘다. 관객에게 의문을 일으키며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요소다.


공개적으로 알리고 있는 이 금반지는 어떤 상징을 지니고 있을까? 그러고 보면 그녀가 어색한 타원형의 팔동작을 하고 있는 것이 이 반지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 금반지에 중요한 상징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관객으로서는 해석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작품 앞에 머물게 한다. 


반지를 살펴보면 중앙에 붉은색 계열의 작은 보석이 보인다. 사실화를 추구한 북유럽 플랑드르 미술의 진면목이 잘 드러난다. 


왜 막달라 마리아가 반지를 지니고 있는지 추정만 할 뿐 정확하게 해석한 것이 없는 상태다. 어쩌면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는 미제 도상일 가능성도 있다.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황금은 세월이 가도 다른 원소로 변하지 않는 물질이다. 그 점을 감안하면 비록 주님은 지상에 안 계시지만 말씀을 기준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신앙을 가질 것을 알리는 상징으로 해석해 본다. 


상상을 즐기는 일부 관객은 혹시 예수와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할 수도 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성경을 심하게 왜곡하는 큰 오류가 된다. 반지는 견고한 신앙의 도상이다. 구약의 제사장 옷에 여러 상징을 지닌 보석이 있는 이유이며 천국의 상징으로도 보석이 등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제단 상면과 전후 좌우 면과 뿔을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테를 두를지며” (출애굽기 30:3)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요한계시록 21:18-19)


몸동작

이제 그녀의 몸동작을 살펴보자. 아무리 봐도 참 특이한 동작이다. 이 불안정한 포즈는 좌우 대칭을 이루기 위해서이며 찌그러진 팔의 타원형은 여백을 줄여 비좁게 만들어 슬픔의 농도를 더 짙게 표현하는 효과를 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전체 그림에서 왼쪽의 여성들과 비교할 때 이 막달라 마리아의 슬픈 표현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화가는 이 마리아가 복음에 등장하는 신앙의 여인이라 좀 특별하게 표현하고 싶었을까? 다른 여인들의 의상은 단색인데 비해 막달라 마리아는 특별히 5가지 색의 천을 입혔다. 자극적이지 않으며 수수한 차림새다. 비중 있는 인물인 어머니 마리아의 색상보다 화려하지 않도록 옅은 색을 사용했다. 


허리띠

이 반지와 함께 허리에 찬 띠도 해석의 대상이 된다.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몸에 액세서리를 지닌 인물이다. 멀리서 보면 장식 같지만 이곳에 문자가 들어있다. “Ihesus Maria” 란 글자인데 번역하면 “예수 마리아”라는 단어다. 작품의 핵심 인물인 예수와 어머니를 상징한다고 보인다.  


이 띠의 정면에는 2개의 동그란 상이 있다. 이 부분 정확히 확인하지 못하고 지났는데 무엇일지 궁금하다. 


식물

막달라 마리아 발 밑을 보면 식물이 있다. 이 작품의 특징 중의 하나가 되는데, 하단 부분 전체에 걸쳐 식물이 있다. 이들 식물의 등장은 중세 기독교 명화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로서 작품의 상징이나 인물의 상징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식물은 엉겅퀴다. 독초로서 고난이나 십자가 형벌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끈질긴 신앙과 생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막달라 마리아 발에 있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그 옆의 식물에 작은 흰 꽃잎이 피웠다. 정확하게 식물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흰 꽃잎의 상징은 순수하거나 구원받은 천국 백성에 어울리는 구원받은 백성을 의미한다. 이 상징 역시 막달라 마리아의 신앙을 상징으로 보인다. 


왼쪽의 해골 곁에도 식물들이 있다. 이들 역시 죽음, 불순종 또는 새 생명에 관한 상징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다른 해석 

이 그림 속 두 인물인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에 관해서 살펴본다. 필자가 지정한 인물은 알려진 정보와 다르다. 


화가도 무척 고민했을 것이다. 비슷한 두 사람이지만 그러나 분명히 다른 두 성경적 인물이다. 관객들은 이들 두 사람을 어떻게 표현해 낼까 궁금하다. 아마도 이 화가처럼 최대한 성경 속 기록을 참고했을 것이다. 이들 두 사람에 관한 정보는 성경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같은 분석가들도 두 사람의 구분은 성경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 명화 속 탐정이 되어 이 인물의 실체를 함께 찾아보도록 하자.


아리마데 부자 요셉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다.

예수 바로 뒤에 있는 인물부터 살펴보자. 알려지기로는 밤에 예수님께 찾아와 구원에 대해 문의했던 니고데모다. 필자의 해석은 이 인물이 아리마데 요셉으로 판단한다.


현재, 십자가에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온몸으로 받아 들고 있다. 가슴과 무릎으로 받치고 있기에 두 다리를 힘겹게 벌리고 있다. 그의 두 손은 세마포로 시신을 감싸고 있는 중이다. 특이한 것은 그의 두 손이 보이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두 손을 보이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 표현으로 이 인물이 세마포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 


또한 등장인물 중에 머리를 가장 꼿꼿하게 세워 십자가 나무와 평행을 이루게 묘사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만큼 십자가와 관련이 깊은 인물로 묘사했다고 판단한다. 물론 등장인물 모두가 십자가와 관련이 있겠지만 구절 기록을 참고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직접 내려 옮길 수 있도록 요청한 인물이다. 머리를 세워 십자가와 평행을 이루게 한 것 역시 이 인물이 누구인가를 알리는 화가의 구성으로 본다. 


그의 의상을 보면 화려함과 천의 재질로 볼 때 한눈에 부자임이 드러난다. 특히 옷소매단과 허리 이하의 끝 단에 보면 큰 보석들로 치장했다. 줄줄이 비싼 보석들이다. 


그는 사람을 재판했던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었다. 이 기관은 유대교의 판관들 모임으로 최고 법원 기구인데 그곳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존경받는다는 의미에는 오랫동안의 연륜 즉 나이가 지긋함도 포함될 수 있다. 옆의 니고데모와 비교해 볼 때 이 인물이 나이가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최고의 냉정성과 재판에 대한 균형 감각이 요구되는 직업이다. 이에 걸맞게 수염을 보면 좌우 대칭을 이룬다. 그래서일까? 다른 인물과는 달리 얼굴에 눈물이 없는 듯하다. 나름 냉정하며 침착함이 얼굴에 묻어 있다. 화가가 그의 몸에 담아놓은 부자 요셉이란 인물이다. 


다른 소 주제들과는 달리 작품의 인물을 판단하는 것이므로 그림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구절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구절 속의 기록과 화가가 묘사한 인물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알아보자.


이 기록은 신약성경 처음의 4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성경도 중요한 인물로 취급한다. 여기서 그를 특징 지을 수 있는 단어에 유의하시기 바란다. 참고로 붉은색으로 표시해 놓았다.  4개의 기록 중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을 소개한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러 명령하 거는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마태복음 27:57-61)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 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백 부장에게 알아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마가복음 15:42-47)


그를 특징짓는 단어는 ‘부자’ ‘가서’ ‘ 당돌히’ ‘존경받는 공의원’ ‘세마포를 사서’ ‘선하고 의로운’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 두려워 숨기더니’ ‘후에’ ‘자기 새 무덤’ 등이다. 이 중에 신앙과 함께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물질 부분이 있음을 깨닫는다. 


두 인물 중에서 아리마대 요셉이 가장 크게 예수님을 내려받는 동작을 취한 사람이다. 이는 그가 직접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한 것과 일치하다. 그리고 자기가 사용하려고 준비했던 새 무덤에 예수를 안치하고 장사 지냈다. 


예수를 따라 죽겠다고 해놓고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신앙과 많이 다르다. 예수님이 그가 숨어 지낸 신앙인임을 왜 몰랐겠는가. 하지만 그를 마지막 임종에 대비해 신앙과 함께 가진 물질로 쓰임 받는 종으로 사용하셨다. 


특별한 단어 ‘부자’에 대해 살펴보자. 예수님이 30세에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만나고 함께하며 지냈던 대부분 사람들은 가난하고 사회적 약자이며 심지어 창녀와 세금을 착복한 세리도 있었다. 밤늦게 찾아온 니고데모가 신분과 학식이 높은 사람이었지만 그 외는 특별한 부자와 만난 기록이 없다. 그런데 부자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에는 새 무덤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의 재력의 규모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중동 유대 사회에서 무덤은 큰 재산이었다. 재정이 넉넉하지 않으면 소유하기 어려운 시대였는데 그는 무덤이 있었고 그것도 사용한 적이 없는 자신 만을 위한 새 무덤이었다. 그래서 부자라는 단어를 이름 앞에 붙여 그를 나타냈던 것이다. 그럼, 화가는 이를 어떻게 묘사했을까? 그의 옷을 보면 부자를 상징하는 여러 보석들이 의상 끝단에 주렁주렁 달려있다. 


니고데모

다음은 예수 곁에서 다리를 잡고 있는 인물을 살펴보자. 알려지기로는 이 사람이 아리마대 부자 요셉으로 알려졌지만 필자의 해석으로는 분명히 니고데모다. 


우선 밤에 예수를 몰래 찾아왔다고 했다. 유대 최고 지도자였던 만큼 그가 밤에 몰래 찾아왔다면 신변을 보호했던 하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서 있는 사람이 하인일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밤이란 특별한 시간대를 언급해서인지 이 인물에는 유난히 짙은(어두움) 색이 많다. 모자도 어둡고 두터운 코트 안에 입은 옷도 검다. 뒤에 선 하인의 목도리도 어두운 색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단순한 선입견일까? 아니면 화가가 밤 시간을 암시하기 위해 표현한 색일까? 알 수 없지만 밤 시간과 연관시켜도 될듯하다. 


화가가 묘사한 그의 외형을 살펴보자. 이곳에도 인물을 알 수 있는 표현이나 상징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림에서 드러나는 이 인물의 외형적 특징은 여유로운 의상을 입고 있다. 화려한 디자인과 색상과 고급 양질의 천이다. 의상이 무거워 보이지만 추운 북유럽에서 잘 견딜 수 있는 든든한 외투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사회적 지위와 대단한 재력을 가진 자임을 알린다. 


의상을 확대해 보니 디자인이 들어가 있다. 당시 플랑드르에서 유행한 의상이며 문양인 것 같다. 이 같은 표현이 가능한 것은 유화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천의 질감이 사실처럼 손에 잡힌다. 


현재 그는 예수님의 다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있다. 격앙된 슬픔을 참는 듯 얼굴에 핏줄이 보이고 눈에서는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무너져 내린 참담한 어머니 마음을 읽었을까? 그의 시선이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있다. 


이상은 화가가 니고데모를 외형적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이제는 왜 이 인물이 니고데모일까라는 기록을 근거로 접근해 보자.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

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1-5)


이 구절에 기록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복음이 무언지 구원(중생)을 상징하는 거듭남 등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얼마나 영생에 대해 무지한지 어머니 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야 하는가라고 반문을 할 정도다. 예수와 대화를 나눈 후에 그는 돌아갔으며 그 후의 기록은 없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갑자기 등장한다. 구절에 다음과 같이 짧게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요한복음 19:39)


과연 화가는 예수를 몰랐던 이 사람이 갑자기 그리스도인이 되어 등장한 사실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성경 기록이 전혀 없는 기간 동안 회심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 치밀하게 계산해 묘사했다. 이제는 더 이상 몰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아니다. 예수의 장례식을 통해 만 세상에 새 생명을 가진 인물로 알리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정말 드라마틱한 회심의 주인공이다. 

다음으로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매우 특별한 도상 때문에 이 인물이 니고데모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예수의 몸에서 흐른 피가 그의 몸에 떨어진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피는 기독교에서 보혈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상징은 죄를 사한다는 뜻이다. 예수가 피를 흘려 죄인을 대신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일 년에 한 번 짐승을 잡아 인간의 죄를 속죄했던 속죄일과 같은 행사이다. 


왜 하필 화가는 이 인물에게 예수의 피를 떨어뜨렸을까? 이런 표현은 명명백백하게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피 값”을 묘사한 것이다. 즉 예수가 피를 흘려서 산 목숨이란 뜻으로 성경기록에 나와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곧 언약의 니라” (마태복음 26:28)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기록한 내용을 분석하면 한 가지 큰 특징이 드러난다. 아리마대 요셉은 선한 재물을 강조했다. 그래서 이름 앞에 부자 요셉이라고 호칭했으며 새 무덤을 가진 사람임을 기록했고 예수가 그곳에 안장되었다. 


반면에 니고데모의 기록에는 구원에 관한 기록이 강조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재물을 강조했으면 아미마대 요셉으로 해석하고 복음이나 영생을 강조했으면 니고데모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한다. 예수의 피가 떨어진 인물이 니고데모임을 알 수 있는 두 인물을 비교한 결과이다.


신발

신발은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두 번째 숨겨진 표현으로 해석한다. 이 작품에는 이미 두 곳의 신체 왜곡을 언급했다. 예수의 목과 어머니 마리아의 너무 긴 다리다.  세 번째 왜곡이 이 인물의 오른쪽 발이다.


이 작품을 이미 알고 계신 분 중에 그의 오른발에 관심 갖는 분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회화사 최초로 해석해 설명드리는 부분일 것 같다. 


그의 오른발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하며 정상적인 발의 표현이 아니므로 분명히 특별한 도상을 지닌 표현이 맞다고 본다. 즉 화가가 교묘하게 관객들 모르게 숨겨놓은 상징이라는 의미다. 


오른발을 보면 신발이 벗겨지려고 하는 장면이 확인된다. 예수의 시신을 받아 내리는 중요한 장면에 왜 화가는 이런 엉뚱한 장면을 등장시켰을까? 신발에 관한 성경적 상징을 찾아보면 의문이 풀린다. 화가는 이 인물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왜 이 인물이 지금 신발을 벗으려고 하는 행동을 취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성경에서 신발을 벗는 행위는 모든 만물에 하나님이 계시지만 더욱 특별하게 임재하시는 공간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피조물이 신발을 벗는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대표적인 성경의 인물이 모세와 여호수아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을 벗으라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이 인물은 이전에 예수가 하나님인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밤에 찾아와 어떻게 영생을 얻는지 질문한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비록 예수가 죽은 시신으로 있지만 거룩한 곳임을 인지하고 신발을 벗으려고 하는 중이다. 즉 이제는 예수가 하나님인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구원받은 자임을 알리는 행동으로 해석된다.


시선

화가가 처리한 그의 시선을 통해서도 이 인물이 구원받은 인물임을 강조하는 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그의 시선은 어머니 마리아를 향하고 있는데 이 시선을 따라 선을 그어보면 지나는 곳에 예수의 양손이 있고 어머니 마리아의 양손이 있으며 제자 요한의 발과 아담의 해골이 있다. 


이들 요소들 모두는 인류의 원죄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원 주시기 위해 돌아가신 십자가 예수의 상징이다. 즉 부자라는 단어로 물질을 강조했던 아리마데 요셉 보다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등장한 니고데모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이 많은 하인

니고데모 바로 뒤에 있는 나이 많은 하인을 살펴보자. 현재 미술 사학자들 중에는 이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를 돕는 인물로 해석한다. 그 증거로 향품(몰약과 침약)을 들고 있음을 꼽는다. 막달라 마리아가 현재 두 손을 쥐고 있기에, 그녀를 대신해서 이 하인이 들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이 하인은 막달라 마리아와 연관된 인물이 아니고 바로 앞에 있는 니고데모와 연관되어 등장한 인물로 본다. 즉 앞에 있는 인물이 누군지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 등장시킨 인물로 여겨진다. 

이 인물의 등장은 그림 전체에서 대조와 대비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인물의 시선을 봐도 비록 향품을 들고 있긴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 보다는 니고데모 쪽을 의식한 시선으로 볼 수 있다. 특별히 그의 왼손이 막달라 마리아와의 경계선에서 니고데모를 향하고 있다. 이 하인에게 담긴 여러 묘사는 앞에 있는 니고데모를 알린다. 어떤 묘사들이 더 있는지 그 증거들을 계속 살펴보자.  


향품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을 대비해 여러 제자들이 시신에 바를 향품을 가져온 기록이 있다. 니고데모 역시 향품을 가져온 것으로 기록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 몰약(Myrrh)과 침향(알로에)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그러므로 향품만 가지고 이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를 돕기 위해 등장시켰다는 것은 옳은 해석이 될 수 없다. 

또 하나는 ‘백 리트라쯤’이라는 무게다. 이 무게는 약 34킬로그램에 해당되는 양으로 왕족의 제사에나 쓰일 양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의 재정이 넉넉했으며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린다. 가져온 양을 계산하더라도 도움이 필요한 니고데모 쪽의 하인으로 해석될 수 있다. 


녹색 가운

필자가 하인으로 불리는 이 인물을 눈여겨보는 것은 그가 걸치고 있는 의상인 넓은 녹색 가운이다. 녹색 가운 전체를 눈여겨보시기 바란다. 


녹색은 식물로서 생명이란 상징이다. 이 녹색 가운이 바로 앞에 있는 니고데모의 온몸을 감싸고 있는데 주시해야 한다. 이 의미는 니고데모와 연관된 인물임을 알리며 니고데모가 이제는 예수를 통해 새 생명(녹색)을 얻은 구원자임을 알린다. 니고데모를 에워싼 원 속에 하인의 녹색 가운이 보이는 부분(노란색 원)이 이를 상징한다고 본다.

비록 예수는 죽었지만, 복음의 열매는 맺어졌음을 녹색의 색으로 선포하는 기독교 회화 구성이다. 


세밀화

이번에는 세밀화란 주제로 중앙에 묘사된 화가의 특별한 한 구성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 주제를 통해 화가 역시 필자의 생각과 같이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귀한 분석이다.


화가는 세밀하게 선 하나, 점 하나도 세밀하게 찍으며 그렸다. 인물들의 수염에서 볼 수 있고, 예수의 턱에 면도된 듯한 촘촘한 수염도 그렇다. 


화가는 이런 실력을 그림 속 여러 곳에 어김없이 발휘했다. 이 젊은이의 의상에도 그의 세밀성을 발휘했다. 상의 안쪽에 두 종류의 색이 들어간 옷이 보인다. 위로 올라갈수록 그 간격이 줄어들지만 목 부분의 끝까지 좌우에 있는 두 색을 그렸다.


필자가 이 인물의 안쪽에 있는 두 색깔의 의상을 강조하는 데에는, 위에서 언급한 구분하기 어려운 두 인물을 확증하는 증거가 이 색에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왼쪽의 붉은색 상의는 십자가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이며 오른쪽 녹색 계열의 색은 새 생명의 상징인 녹색 의상이다. 


다시 성경을 배경으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 전체에 내재된 왼쪽의 십자가 사건과 죽음 후에 부활을 확신하는 오른쪽의 구원받은 새 생명이 담겨 있다고 본다. 전체 작품에서 표현된 좌우의 두 가지 내용을 이 젊은이의 옷감에 색으로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왼쪽 붉은색은 십자가 사건의 결과인 예수의 시신을 가리켜 바로 뒤에 있는 아리마대 부자 요셉임을 지칭하며, 오른쪽 녹색은 니고데모의 구원받은 생명을 의미하는 하인의 녹색 망토를 지칭한다고 해석한다. 배꼽 부분에서 살짝 갈라진 옷 역시 인물들을 가리키는 표시로 해석될 수 있다. 


색으로 구체적인 내용을 가리키는 것도 뛰어난 표현력이지만 사다리 위에 있는 점을 활용한 높은 위치 선정 또한 뛰어난 구성이다. 보면 볼수록 기막힌 구성력에 감탄을 하게 된다. 


지금 십자가 위의 젊은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대못 뽑은 역할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의 색으로 관객에게 말을 하는 중이다. 중세 명작 앞에 서면 수백 년 전에 칠해진 색이 전하는 말을 듣는다. 작지만 화가의 정밀한 구성력이 표현된 정말 뛰어난 색의 도상이다. 이 같은 해석의 결과로 관객이 작품을 볼 때 왼쪽 인물은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며 오른쪽 인물은 밤에 찾아와 후에 새 생명인 구원을 얻은 니고데모임을 확증한다. 


사다리 위의 젊은이

다시 시선을 올려 사다리 위에서 가장 고생하는 젊은이를 편안하게 만나 보자. 이 젊은이는 예수의 시신을 옮긴 사람이다.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한복음 19:38)


기록상으로는 예수의 시신을 옮긴 평범한 사람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중요한 상징을 지니고 있다. 아래의 단어별로 그가 지닌 상징을 분석해 본다. 


오른손

화가가 그에게 맡긴 가장 큰 역할은 십자가에서 예수의 몸에 박혔던 대못을 빼는 일이다. 그래서 그의 오른손에 예수의 손목에서 뽑은 대못 2개가 들려 있다. 이 대못에는 예수의 붉은 혈흔이 여전히 묻어 있다.

또한 그의 손은 십자가 상의 죄패를 가리킨다. 그 죄패에 INRI라는 단어가 적혀 있는데 “IESVS·NAZARENVS·REX·IVDÆORVM”의 약자로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실제 십자가에 붙여진 것을 기록한 것이다.


빌라도가 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요한복음 19:19)

그의 왼손 또한 바쁘다. 예수의 팔을 붙들고 있으며 도와주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몸을 석궁의 형태로 만들 수 있다.


돌출

이 작품의 특이성으로 꼽는 것은 화폭 밖으로 나와 있는 대못 끝 부분이다. 대못을 확대해 보면 대못 끝이 화폭 밖으로 살짝 나와 있게 묘사되어 있다.  보통은 모든 그림의 요소들이 화폭 안에 있는데 특이하게도 화폭 밖으로 나와있게 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특이한 요소다. 


왜 화가는 이런 시도를 했을까?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보기 어려운 매우 특별한 도상을 시도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한다. 다르게 설명하면 그림이란 공간을 뚫고 나온 물체가 있음을 알린다. 


많은 사람들은 이 그림을 평가할 때 밀폐 된 공간 속에 창조된 인물과 몸동작을 언급한다. 그러나 화면 밖으로 튀어나온 이 대못의 머리로 인해, 인물과 공간이 밀집된 것은 맞지만 밀폐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화가가 심어놓은 가장 창의적 도상이다.


화폭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대못은 시작에 불과하다. 반대로 화폭 뒤로 뚫린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즉 바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구조의 구성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통풍 장치의 완성이다. 


통풍장치

일반인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통풍 장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위에서 일하는 하인에게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십자가 위 젊은 하인의 머리띠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하인의 머리띠 끝 자락이 액자에 막혀 아래위로 갈라져 있다. 중력으로 이 천은 분명히 아래로 내려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바람을 타고 날리는 형상이다. 즉 이곳에 한 줄기 바람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상징이다. 화가가 대못의 끝으로 화폭의 공간을 뚫어 놓은 곳으로 바람이 들어온 흔적이다.  

그러면 이곳으로 들어와 천을 날리게 한 바람은 어디로 나갈까? 왼쪽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받치고 있는 제자 요한의 왼발을 보시기 바란다. 요한의 옷자락 끝 부분이 액자에 접혀 있다. 그 천의 끝자락은 현재 액자 밖으로 나가 있는 셈이다. 

한 줄로 요약하면 “대못 끝은 액자 밖으로 뚫고 나가 공기가 들어오도록 하고, 액자 한 곳에는 공기가 뒤로 흘러가도록 공간이 열려 있게끔 구성된 그림"이라는 의미가 된다. 바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구조다. 


화가는 관객들이 이 그림을 마치 밀폐된 곳으로 생각하게 그렸으나, 사실은 대못과 젊은이의 머리띠 천과 제자 요한의 의상을 활용해 바람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통풍장치가 있음을 숨겨놓은 것이다. 그럼 왜 화가는 이렇게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고 나감을 교묘하게 숨겨 표현했을까? 그 이유는 예수의 몸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분석으로는 예수의 부활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해석한다.


바람의 이동

전체 그림에서 바람의 이동을 보면 예수의 몸이 썩지 않도록 신선한 바람이 들어와 예수의 상처 난 몸을 거쳐 나가게 한 것으로 풀이된다. 


바람의 이동 경로는 대못의 끝 부분의 공간을 통해 이 그림 안으로 들어오고, 십자가 위에 있는 젊은이의 천을 휘날리게 하며 아래로 내려가 예수의 시신을 덮으며 제자 요한의 오른쪽 발 위에 있는 공간을 따라 화폭 밖으로 흘러 나가는 것이다. 


젊은이의 띠가 중력을 이기며 흩날리고 제자 요한의 옷깃이 밖으로 흘러 나가는 한 신선한 공기의 유통은 계속된다. 이 그림 속 예수는 이 명화가 살아있는 한 시신이 썩지 않는다. 


바람의 정체

예수의 시신이 썩지 않도록 하는 바람이 정체는 뭘까? 이 부분 정말 화가가 의도한 구성일까? 필자는 분명히 의도된 것으로 확신한다. 아래는 그에 대한 설명이다. 


참고로 그림의 배경인 성경을 참고하면 바람은 성령의 상징이다. 예수의 죽음 후에 이 땅에 오신 분은 성령이라고 예수가 직접 언급한 구절이 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6:7) 


예수는 비록 죽은 육체를 지녔지만 3일 후면 성부 하나님이 살리시고 분명히 죽어 있던 예수를 부활시키신다. 그리고 40일 후에 다시 이 땅에 심판주로 오실 것을 알리며 여러 증인들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필자의 생각은 일반적으로 이 작품을 설명하는 <예수의 십자가 내림>을 넘어서는 성령의 도래가 작품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예수의 십자가 내림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구성으로 볼 수 있다. 


이 부분 미술사 최초로 해석해 설명드린 것이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필자는 이 내용을 미술관 담당 큐레이트에게 보내어 검증을 받을 계획이다. 혹시라도 답장을 받게 되면 다시 한번 지면을 통해 알려드리도록 하겠다. 다른 인물들을 만나보자. 이들 인물들 속에 어떤 상징과 의미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마리아 살로메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에 비해 중요한 상징은 지니고 있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한 인물이라도 헛되이 표현하지 않았기에 명화라 불리는 것이다.


땅에 쓰러진 어머니 마리아를 뒤에서 부축하는 여인이 보인다. 슬픈 중에도 애교스러운 여인으로 묘사했다. 이 여인의 이름을 마리아 살로메로 추정한다.


목을 살짝 옆으로 꺾었는데, 이것은 옆의 제자 요한을 도와 어머니 마리아를 부축하며 팔을 당겨 예수님과 같은 형태의 석궁 포즈를 취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마리아 살로메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인 요한과 야고보 형제의 어머니이며, 세베대의 아내로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여인이다. 아래 구절을 보면 십자가 사건 때도 멀리서 처형을 지켜봤던 여인이며 십자가를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이다. 


“그중에는 막달라 마리아또 야고보와 요셉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마태복음 27:56)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마가복음 16:1)


그래서일까요? 화가는 재치 있게 이 여인의 가슴에 십자가를 지니게 했다. 가슴 한가운데 있는데 여인의 몸치장을 이용한 도상이다. 보일 듯 안 보일 듯 심어놓은 십자가 도상이 참 귀엽고 귀하게 보인다. 

이로서 그림 속 십자가는 모두 4개가 된다. 중앙의 나무 십자가, 십자가 형식의 액자, 이 여인의 가슴에 묘사된 허리띠 십자가 그리고 인물로 구성된 십자가이다. 


제자 요한


왼쪽에서 어머니를 부축하고 있는 제자 요한의 모습이다. 예수의 12제자 중에서 가장 아꼈던 애제자였다. 십자가 사건을 언급하는 그림에서 늘 젊은 제자로 등장하며, 특히 어머니 마리아 쪽에 있다. 어머니 마리아를 부축을 하거나 실신해 힘겨운 몸을 지탱해 주는 역할이다. 


이렇게 등장하는 데는 성경적 이유가 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 후에 어머니 마리아를 돌봐 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한복음 19:26-27)


그가 다른 남성 제자 들과 달리 예수의 시신에 관여하지 않고 어머니를 부축하는 것은 말씀에 따른 것으로 이런 행동은 사역을 행하는 즉각성, 실행성을 보여주는 매우 주요한 도상이다. 


이런 제자 요한에게 화가는 또 몇 가지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우선 어머니 마리아를 부축하며 몸을 예수와 동일하게 석궁의 형태를 만들고 있고 아래에는 해골, 손, 발 등이 나란히 있게끔 시선을 만드는 역할도 한다. 또 한 가지는 위에서 언급한 밀폐된 공간이 아님을 자신의 붉은 의상으로 알렸다. 


여인

애제자 요한 뒤에 한 여인이 울고 있다. 미술관측 설명으로는 “글로바의 마리아”이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요한복음 19:25)


요한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의 처형 장소에 있었고 장례를 위한 물품을 가져온 여인들 중 한 명으로 추정한다. 이 작품에서 이 여인의 역할은 얼굴과 몸동작을 통해 애통해하는 마음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녀 얼굴에 맺힌 눈물방울은 유화를 활용한 화가의 돋보이는 표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방울

이 작품 설명을 마치기 전에 이 작품의 명장면 중의 하나인 눈물 방물을 보자. 정말 훌륭한 역작인 부분이다.  이 그림의 정밀성과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인물들이 흘리는 이 눈물방울들이다. 


이 눈물방울의 묘사가 미술사에서 획기적인 것의 하나로 평가하는 것은 사실 과학 발전의 몫이다. 화가는 중세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사용된 템페라(Tempera)의 끝 부분과 유화의 시작점에 있는 시기였다. 이때 화가는 유화만의 독특성을 알아차리고 연구했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다. 화면 모든 곳에 유화의 장점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보석 같은 표현의 눈물방울은 단연 돋보인다. 영롱하고 수정같이 빛나며 정말 눈에서 흘러나와 떨어지는 것 같은 효과를 낸다. 


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화가는 눈물 흘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관찰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눈물방울이 더욱 관객들 마음에 새겨질 수 있도록 촉촉이 젖히는 눈동자, 미세하게 움직이는 눈썹과 이마, 격앙된 모습에서 관찰되는 꽉 다문 턱의 모습과 근육의 움직임… … 눈물방울과 연계된 얼굴의 모든 표정을 지켜보며 관찰하고 세밀하게 스케치했을 화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중세 북유럽을 대표하며 당시 가장 많이 복사된 그림으로 손꼽히는 데는 이러한 화가의 장인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글로바(clopas) 마리아 눈에 흐르는 눈물은 빛이 통과된 피부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치며

이제 그림 여행을 마쳐야 할 시간이다. 이 세대는 뭐든지 빨리 해야 하기에 그림 분석도 요점 위주로 설명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명화 앞에서는 빠른 지식 전달도 필요하지만 산보하는 속도의 느림 속에서 전달되는 풍성한 감성도 필요한 곳이다. 속도에 관한 한 마음 놓고 시대를 역행할 수 있는 곳이 미술 전시장이다.


이 그림은 십자가 예수에 관한 그림이지만 획기적인 공간 구성과 유화 사용과 인물 배치와 탁월한 도상 도입 등에서 미술사의 큰 획을 긋는 중세 명화다. 이렇게 유명한 작품을 세밀하게 분석해 설명드릴 수 있어 무척 기쁘다. 


정독하신 분들은 긴 시간으로 피로할 수 있겠다. 하지만 스페인 여행 중에 프라다 미술관을 들리시게 되면 남들이 볼 수 없는 명화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미 설명된 평범한 작품 해설을 넘어 배경을 참고하고 화가의 메시지를 찾아 열심히 분석해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갑갑하고 밀폐된 작품이 아니라 성령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바람이 늘 들어오고 나가는 신선한 작품임을 알아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감사

저는 다음 작품을 준비해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주님의 평안에 머무시길 기도합니다. 세계에 흩어진 명화를 찾아 세밀하게 그 내용을 살펴보는 새로운 명화 소개 코너.  


<내 집은 미술관.> 제공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위의 내용은 유튜브 채널 <내 집은 미술관>에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문을 열면 



중세로 


발길이 옮겨지는 곳.


중세의 관문 


유럽에서 


인사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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