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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 집은 미술관 Jun 26. 2024

변화산의 기적

루벤스 특유의 역동성과 이야기 전개가 담긴 중세 명작 

유튜브 "내 집은 미술관"에서 영상으로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미술관 (Musée des Beaux-Arts de Nancy)

영어로 Museum of Fine Arts인 미술관은 프랑스 Nancy에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 중 하나이다. 미술관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인  Stanislas 광장에 있는 건물 중 하나에 속한다. 미술관의 초기 수집품은 프랑스혁명을 피해 이주한 성직자나 귀족 가문의 재산을 압류해 모은 것이 시초였다.

르네상스부터 20세기까지의 예술품과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이탈리아와 스페인 회화 예술품, 아시아 미술과 이탈리아의 뛰어난 유리 공예품이 전시되고 있다.  

페루지노, 틴토레토, 얀 브뤼겔, 카라바조, 조르주 드 라 투르, 샤를 르 브룬, 리베라, 루벤스, 클로드 겔레, 루카 조르다노, 프랑수아 부처, 외젠 델라크로익스, 에두아누, 모네… … 이곳에 전시된 회화 작품의 작가만 봐도 작품 및 미술관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이 예술품을 품고 있는 건축물 또한 관광지로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중세 유럽 건축물 다운 고전적인 풍미를 풍기고 있어 관객의 호응을 받고 있다.


화가 (Peter Paul Rubens)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독일 태생으로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플랑드르(현, 벨기에) 화가이다. 

루벤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는 역동성, 강한 색감, 그리고 관능미를 추구하는 환상적인 바로크 스타일의 대표적인 화가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경(1577년 6월 28일 ~ 1640년 5월 30일)은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이자 외교관이다.  당시 플랑드르 회화의 중심이었던 안트베르펜에서 루벤스는 14살 때 토비아스 베르하이트와 함께 수습생을 시작했으며 르네상스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고 라틴어와 고전 문학을 공부했다.


루벤스의 고전 작품들은 고전과 기독교 역사의 박식한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그의 독특하고 매우 인기 있는 바로크 양식은 운동, 색채, 관능을 강조했다. 결국 이 특징들이 그의 화풍을 이룬다. 기독교 작품의 내용은 종교 개혁을 반대한 교황 측의 의견을 반영한 크고 거대한 성경적 바로크 예술 양식에 따라 제작했다. 이런 일로 그의 작품 내용을 분석하거나 감상할 때에는 개신교의 성경 66권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이 화가는 다른 화가와의 협업을 통해 비즈네스로도 성공을 거두었고 플랑드르 태피스트리 워크숍과 안트베르펜의 출판업자들을 위한 프런티스의 만화 디자이너이기도 했으며 유럽 전역의 귀족들과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인기 있는 그림을 생산하는 큰 작업장을 운영하기도 했던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한 마디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상남자다.


그의 특이한 이력은 자신의 회화력을 바탕으로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잉글랜드의 찰스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고전적인 인문주의 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점이다. 


유작을 통한 그의 평가는 다작의 예술가로 평한다. 마이클 자페의 작품 목록에는 그의 작업장에서 만든 수많은 복제품을 제외하고도 1,403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열적으로 일생을 바쁘게 살았던 그는 1640년 5월 30일 만성 통풍으로 심장 마비로 사망했고 현재 그의 무덤은 Antwerp에 있는 Saint James' Church에 있다.


구도

가장 크게 보이는 구도는 삼각형이다. 상단 꼭짓점에 예수가 있고 하단 왼쪽에 제자들이 있고 오른쪽에 마을 사람들이 등장한다.

다음으로는 산 위와 산 아래를 구분하는 중앙선이다.  예수와 마을에 남은 제자들 간에 시공간 차이를 나타낸다.

화폭의 꼭짓점을 잇는 대각선이다. 4곳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의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숫자의 구성

이 작품의 구성적 특징은 대조와 대비에서 숫자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9란 숫자다.  중앙의 여인을 중심으로 왼쪽에 제자들 9명 오른쪽에 군중 9명을 배치했다. 

다음은 숫자 3이다. 시선을 산 위로 올려보자. 변화산에 있는 인물들인데 공중에 3명, 땅에 3명이 있다. 

 

그림에 관해

이 그림은 3폭  제단화의 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 사연이 있어 짧게 살펴본다. 

이 작품은 빈센초 1세 곤차가 공작(Duke  Vincenzo 1 Gonzaga)이 의뢰한 것으로, 만토바에 있는 성 삼위일체 교회의 예배당(The Church of the Holy Trinity in Mantua)에 설치된 3폭 제단화였다. 


1797년 나폴레옹이 만토바를 점령할 때까지 이곳에 있었으나 나폴레옹 시대를 지나며 교회가 약탈당했고 현재는 떨어져 다른 곳에서 전시되고 있다. 


The Gonzaga Family in Adoration of the Holy Trinity (중앙 패널)

Peter Paul Rubens. 1604–1605. 381 cm × 477 cm. Ducal Palace, Mantua.

이탈리아 Mantua의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에 있는 그림으로서 당시 주둔했던 군인들에 의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심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의 모습이다. 자신과 관련된 얼굴이 초상화로 그려져 있어 조각으로 나누어 약탈해 간 것이다. 

현재는 복원되어 전시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 속에는 빈첸초 곤차가와 엘레오노라 데 메디치의 아들들이 여러 명의 궁정 경비대와 함께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의 의뢰인으로서 넣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림 중앙을 보면 가로로 둘로 나눠져 있는데 현재 이 부분은 재조립되어 만토바 공작궁에 전시되어 있다. 그림도 인생처럼 다사다난한 일생이 있다. 


Baptism of Chris (왼쪽 패널)

Rubens, Baptism of Chris, 1604-1605, Anversa, Koninklijk Museum voor Schone Kunsten

제단화 왼쪽에 전시되었던 그리스도의 세례 모습이다.  오늘 우리가 만나 볼 작품은 이 작품의 반대편인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그림요약

의문투성이인 이 작품을 요약해 드리며 시작할까 한다. 변화산은 예수그리스도가 제자들 앞에서, 광채가 나는 모습으로 변모한 장소로 유명하다. 이 순간은 성경에 기록된 몇 가지 기적적인 사건중 하나로, 신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게 만드는 현장으로 평가받는다.


예수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이 산에 올랐고 그곳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다. 이때 제자들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도 듣는다. 


이러한 변화산의 기적은 당시 예수의 존재를 완전하게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예수의 신성성을 더욱 확고히 하는 중요한 사건이 된다.  한 가지 질문으로 그림 감상을 시작해 보자.


왜?

이 작품을 대하는 관객은 늘 이런 의문을 지닌다. 작품 속 상단은 신성하며 기적적인 묘사인데, 왜 하단은 어수선할까?  왜 서로 다른 내용이 한 작품 속에 있나? 의아해하는 점이다.


이 작품을 처음 대하는 분이 있다면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의문과 달리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변화산의 예수님 변모 기적과 산 아래의 귀신 들린 아이는 별개의 사건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지만, 한 내용으로 봐야 하는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다른 주제로 왜 그런지 짧게 설명드린다.


예수

 이제 작품 속의 인물로 시선을 옮겨보자. 예수님의 하나님 되시는 힘찬 모습이다. 공중의 구름 위에 서 계신데 광채가 몸에서 빛으로 뿜어져 나온다.


한 손은 지상으로 또 한 손은 하늘로 강하게 뻗으시며 변화산의 기적을 드러내신다.  왼쪽에 있는 튜닉의 펄럭이는 흰색 천이 동적 장면을 연출하며 살짝 구부린 무릎이 콘트라포스트 자세를 이루어 권위와 함께 신성의 자연스러움을 더한다.


같은 주제인 라파엘로의 그림에서는 화려한 색채와 인물의 부드러움 속에서 몽환적인 기적의 느낌을 전하는 반면에, 루벤스는 조각 같은 강한 선을 통해 조금은 무겁고 침잠된 흰색과 회색계열의 톤의 색채로 신성의 권능을 표현했다. 화려함은 덜하나 오히려 구약의 신비감이 잘 드러난다.


몸을 둘러싼 원형의 구름과 그 속에서 드러나는 황금색 광채가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임을 알린다. 십자가 사건 이전이라 손바닥과 발등에 어떤 못자국도 보이지 않는다.


모세와 엘리야

신비에 싸인 구약의 제자인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이다. 성경학자들의 해석 중의 하나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은 구약 때에 죽었던 환영적인 제자들이 아니라, 실제 살아있는 제자들로 해석한다. 그래서 형체를 지닌 채 대화를 한 것으로 해석한다. 


신학적 해석이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던 기록을 참고하면 된다.


구약의 인물이 신약의 제자와 함께 기록된 것은 이 예수님의 복음 완성과 관련이 있다. 왼쪽의 인물이 모세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돌판 두 개를 지녔기 때문이다. 회화 속의 모세는 이 돌판 두 개를 늘 지니고 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애굽기 31:18)


그의 모습을 보면 자연스러우면서도 구약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에 걸맞은 힘이 느껴진다. 머리에서 광채가 빛나며 두 손에 십계명 돌 판을 지녔다. 오른쪽 돌 판은 앞 면이 보이게 했고 왼쪽 돌 판은 보이지 않는다.


왜 화가가 한쪽은 보이고 한쪽은 보이지 않게 묘사했을까? 여기에는 비밀이 담겨있다. 일반인들이 쉽게 찾지 못하는 상징이다. 우선 모세는 중앙에 예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이 돌 판을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왼쪽 손을 보면 이 돌 판의 문구를 보기 위해 취한 손동작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관객은 돌 판의 뒷면을 보게 된 것이다. 이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림 배경인 십계명 기록이다. 예수님이 제자들 데리고 변화산에 온 것은 자신의 하나 님됨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다. 


십계명에는 열개의 계명이 있는데 처음 네 가지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적혀 있고 나머지 6개는 우리들끼리 지켜야 할 계명이다. 그렇다면 현재 모세가 쳐다보는 10 계명은 첫 4가지 계명이 적힌 돌판이 유력하다. 첫 번째 계명이 그 유명한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창의적 표현을 창작하기 위해 붓을 잠시 내려놓고 성경을 연구했을 화가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진다. 중세 화가는 단순한 그림쟁이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검은 톤의 구름이 반만 전하고 있는 십계명 돌 판의 무게감을 무겁게 전달한다.

이번엔 오른쪽에서 비행하고 있는 인물로 시선을 돌려보자.  구약의 대표적인 예언자이자 선지자인 엘리야의 형상이다. 왼쪽의 모세와 달리 비행하고 있다. 단축법에 의해 그려진 묘사인데 손은 예수를 가리키고 시선은 관객을 향하고 있다. 그를 기록한 구절대로 하늘을 비행하고 있게 묘사했다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열왕기하 2:11)


살아있는 중에 하늘로 장소를 옮겼기 때문에 죽음을 통하지 않고 생을 마감한 신비의 인물이다. 그래서일까?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이지만 매우 다르게 묘사된 부분이 있다. 혹시 이 부분이 보이시는지? 후광이 없는 점이다. 왜 모세는 후광을 넣었고 엘리야는 후광을 넣지 않았을까?


필자로서는 참 신기한 표현법이라 다른 작품들을 살펴봐야 한다. 후광의 유무는 다르지만 두 인물에 공통점이 발견된다. 엘리야는 살아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장소를 옮겼고 모세 역시 죽었지만 시신의 장소를 모른다. 무덤이 없거나 알려지지 않아 무덤을 볼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단. 하단

 이 작품을 성경에 기반한 기초 지식이 없는 분들이 보시게 되면, 내용은 전혀 모른 채 외형적인 묘사와 미술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화가 루벤스의 화풍만 감상하시게 된다.

상단과 하단의 전혀 다른 것 같은 두 가지 주제의 연합은 십자가 이후에 예수가 안 계신 상황에서 시작될 제자들의 복음 사역과도 연관된다. 그래서 하단의 줄거리에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믿음과 복음을 전달받을 대상인 마을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우선 상단과 하단의 줄거리부터 살펴보자.  


상단에 난데없이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는데, 왜일까? 구약의 긴 시간 속에서 예수란 존재는 실체가 없이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신약에서 실체를 지닌 복음으로 이 땅에 오셨다. 신약의 제자들 앞에 갑자기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켜 보인 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시키고 예언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율법의 상징은 모세이며, 예언의 상징은 엘리야가 된다. 이 사실에 관한 기록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17)


결국 제자들이 따랐던 인간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니시고 구약과 신약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한 분임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림에서 이런 의미의 표현을 찾아보면 오른손은 하늘로, 왼손은 땅을 향하게 묘사한 부분이다.


이번에는 함께 있었던 신약의 제자들을 보자.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변모에 놀란 제자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잠자다가 일어나니 영광의 구름 속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얘기 나누고 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 말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누가복음 9:31-34)


작품에 이 구절의 기록대로 예수님의 영광과 몸에서 나오는 빛의 강열함을 처음 경험한 제자들의 경이로움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무척 무서워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 같은 표현은 인간이 지닌 죄성으로 인한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다.


주님이 변화산에 데리고 간 이 세 명의 제자는 소위 말하는 예수님의 애제자들이다.

이들은 이곳뿐만 아니라 십자가 처형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하셨던 겟세마네 동산에 함께 동행했으며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에도 그 집에 함께 동행했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세 명의 제자가 있다면 바로 이들로 해석해도 되겠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마가복음 14:32-33)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누가복음 8:51)


산 정상에 있는 인물들의 묘사와 표현은 이 화가의 화풍에 깃든 힘과 실제 일어난 것 같은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머리 위에는

이번 주제는 산 아래에 있는 제자들과 마을 사람들 머리 위 광경이다. 이 작품에서 관객들이 잘 살펴보지 못하는 부분이다. 분석하면 흥미로운 부분이 발견되는데, 이 역시 대조와 대비로 이루어져 있다. 왼쪽에 있는 제자들 머리 위부터 보자.


제자들 머리 위에는 하늘의 상급과 관련된듯한 표현이 있어 천국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과일도 보이는데 비록 하나이지만 매우 알차 보인다. 달랑 과일 하나만 등장한 것은 모든 과일의 대표적 상징이다. 해석을 통해 눈으로 본다면 모든 나무에 주렁주렁 널려 있는 셈이다. 


반면에 오른쪽 동네 사람들 머리 위에는 왼쪽과 비교에 빈약한 나무들만 보인다. 더욱이 왼쪽에는 없는 광풍까지 불어 휘어진 나무도 있다. 튼실한 과일은 전혀 없다. 건조한 토양으로 덮인 대지가 삶의 고난을 느끼게 한다. 왼쪽에는 없는 하늘까지 보이는데, 흰구름이 먹구름과 함께 있다. 세찬 광풍에 의해 하늘 한 구석으로 쓸려가는 구름이 내는 속도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불행한 삶이 있는 죄 아래의 세상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제자들과 마을 주민들 머리 위에 풍경에 담겨 있는 좌우의 대조를 살펴봤다.


손가락 

눈에 띄는 제자의 한 손가락이 눈길을 끈다. 관객들은 이 인물의 손가락을 따라 위를 쳐다본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열매인데 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특별하게 표현했을까?


여러 기록들을 참고해 보니 후에 이들 12두 제자들 대부분이 이방 땅에서 상상 못 할 방법 법으로 처형당했다. 그 점을 참고하면 이 열매는 죽으면서 전한 복음의 열매로 해석된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을 찾아봤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브리스 11:26)

열매의 위치를 전체 작품에서 봐도 하늘에 속해 있는 열매임을 알 수 있다. 천국에 맺어진 열매가 확실하다. 


큰 무리

산 아래의 왼쪽에는 제자 자들 그룹이 있고 오른쪽에는 동네 사람들이 무리 지어 있다. 이 광경 역시 기록에 따른 표현이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몸동작이나 표정을 보면 싸움하기 일보직전이다.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예수가 산 위에 올라가 있을 때 치유해 달라는 동네 사람들과 치유하지 못한 제자들 간에 실랑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이니 예수 같은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었는데 치유하지 못해 실망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예수를 향해 소리 질러 그림에 나오는 한 아이를 고쳐 달라고 외친 것이다. 


눈에 띄는 특별한 한 아이가 보인다. 귀신 들린 아이이고 양쪽에 있는 인물들이 부모이다. 귀신 들린 아이의 모습인데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다. 루벤스 화풍의 특징인 풍성하면서도 아름다운 육체는 아니지만 해부학에 능한 화가라 소년의 힘쓰는 근육을 잘 표현됐다. 이렇게 통제되지 않는 아이를 붙들고 있는 아버지의 오른발에도 힘쓰는 모습이 들어 있다. 


부모들의 눈을 보면 흰자위가 많이 보인다. 다른 치유 방법을 찾지 못한 부모의 경직된 얼굴이다. 그래서인지 크게 눈 뜬 그들의 얼굴 속에 예수님 아니면 아이를 살릴 수 없다는 부모의 마음이 읽힌다. 이 부모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이유는 예수가 이전에 기적을 행한 것을 목격했거나 전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얼굴을 다시 보면. 사생결단을 내서라도 예수께 아이를 고쳐 달라고 할 셈이다.

이 주제를 넘어가기 전에 아이의 피부를 한 번 더 보자. 회색의 피부로 묘사했으며 경련으로 몸을 비틀고 있고 입에는 흰 거품이 흘러내린다. 귀신 들렸다는 구절을 증거 한다.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누가복음 9:39-40)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의미 심장한 부분이 발견된다.

십자가 예수의 형상이다. 아이의 몸을 살펴보면, 후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대못에 박힐 때의 고통을 표현한 듯하다. 산 위에 있을 때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 처형을 언급했기에 이 사실과 연관시킨 표현 같아 보인다. 또한 이 아이 역시 외 아들임을 기록했다. 화가는 아마도 이런 아이를 찾아 살펴보고 그 특징을 파악해 표현했을 것입니다. 아이를 수소문해 찾아봤을 화가의 발걸음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화가의 발걸음이 새겨진 작품이다.


연결

이번 소주제는 연결이라는 주제다. 부모들의 손을 잘 봐주시기 바란다. 귀신 들린 아이의 곁을 살 펴보면 가족애를 엿볼 수 있다. 어머니의 오른손이 아이의 허리에 닿아 있다. 신기하게도 예수님이 창에 찔린 곳이다. 또 공교롭게도 아이가 벌린 양팔은 십자가에 못 박힌 형태다. 우연일까?


어머니는 아이의 왼손을 붙잡고 있고 아버지는 아이가 당기고 있는 옷의 천을 왼손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꽉 붙들고 있다. 아버지의 왼쪽 손아귀에 힘줄이 강하게 보인다. 이런 강한 표현은 아이에 대한 사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작품을 보면 부모가 온전히 아이를 감싸며 보살피는 형상이다.

 

중앙의 여인

이번에는 중앙에 있는 한 특별한 여인을 살펴보자. 그 정체가 모호하다. 비록 한 명이지만 대각선 구도로 살펴보면 이 작품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그만큼 중요성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누구일까?


우선 여인의 의상으로 높은 신분이며 영향력 있는 인물임을 알린다. 산 아래의 인물 중에서 평소 화가의 화풍에 걸맞은 풍만한 육체를 지인 여인이다.


그녀의 오른손은 귀신 들린 아이를 가르키고 얼굴은 예수를 향해있다. 아이를 구해 달라는 요청으로 보이는데 마치 가나안 혼인 잔치를 떠올린다. 그런데 구절을 찾아보면 이 여인에 관한 기록이 없다. 


필자가 본 이 여인에 관한 정보 세 가지를 살펴본다. 루벤스는 교황청의 권유에 따른 반종교 개혁의 신앙을 지녔고 이를 미술로 표현한 작가이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 마리아로 해석된다. 


또 하나의 정보는 작품에서의 위치다. 중세 기독교 미술에서 위치는 그 인물을 해석할 때 중요한 상징을 지닌다. 지금 그녀가 중앙에 있으며 예수님과 마주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 역시 어머니 마리아로 해석될 수 있겠다. 


마지막 정보는 몸과 양손의 형태다. 산 위에서 손을 벌리고 있는 예수에게 호응하는 몸과 손을 지녔다. 호응하는 이런 몸의 포즈를 미루어 볼 때에도 어머니 마리아가 맞는 것 같다.

왼쪽이 루벤스 작품으로 카톨릭적 구성의 작품이며 오른쪽은 귀도 레니의 작품으로 개신교적 구성의 작품이다.

결국 이런 묘사 역시 마리아를 경배했던 당시 종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영아 대학살" 사건 작품을 설명드릴 때 개신교와 카톨릭 작품을 비교 해석 해 설명드리려 한다.


이방인

오른쪽에 있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다. 후에 주님께서 고쳐 주신 것에 감사함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 두 손을 모은 청년도 보인다. 뒤편에 있는 흰머리의 노인은 손을 가슴에 대며 고개를 살짝 엎드려며 감사의 경의를 표한다. 싸움이 난 당시는 아니나 이전이나 후에 예수께 은혜를 받은 인물들이 있었음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의상을 보면 관리층이나 부유층 같다. 혹시 회개한 바리새인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기록에 당시 예수를 믿지 않았던 유대인 지도자를 언급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미행하기도 했고 감시하기 위해서도 왔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예수의 초자연적인 사역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후에 제자들이 이방 땅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이를 받아들인 구원 받은 인물들일 수도 있다. 즉 왼쪽의 열매와 대비되는 구성으로서 미래의 결과가 함께들어 있는 구성이다.


한 여인

오른쪽 군중들 중에 매우 특이한 한 여인이 있다. 그런데 변화산 변모를 기록한 누가복음 9장에 이 여인에 관한 기록이도없다. 어쩌면 화가가 임의로 등장시킨 인물인 듯하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라도 상징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 회화에서 가슴을 완전히 드러낸 것은 행실이 나쁜 여인임을 뜻한다. 주님 덕분에 목숨을 구했던 간음 하다가 잡힌 여인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루벤스 특유의 화풍 때문일 수도 있다. 루벤스가 창조하는 화폭의 인물들은 늘 풍성한 육체를 지녔다. 근육 묘사에도 능했기에 여인과 아이를 군중 속에 넣어 자신의 화풍을 살렸을 수도 있다. 


자녀인 듯한 곁의 아이는 울고 있는 중에 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 아이의 포즈를 어디선가 본 적 있어 무척 낯익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한 작품 속 아이의 포즈와 너무 유사하다. 

참고로 이 작품은 외설스러운 표현이 들어 있는 듯 보이지만 참 좋은 내용의 작품이다. 중세 명화 속에 담긴 상징을 이해할 수 있는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곧 이 작품을 영상으로 올려 자세히 설명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 (유튜브: “내 집은 미술관”)


제자 그룹

이 작품의 마지막 구성 부분인 왼쪽 하단의 제자들에게로 시선을 옮겨 본다. 12제자 중에서 주님을 따랐던 세 명을 제외한 아홉 명의 제자들 모습이다.


앞부분에 있는 제자들의 표정을 보니 마을에서 몰려온 군중들을 상대하느라 무척 힘들었던 것 같다. 아이를 고쳐 달라는 요청에 고쳐주지 못해 쓴소리만 듣고 있었으니 그럴만했을 것이다. 실망한 군중들이 막말도 했을 것이며 제자들 마음에 상처 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상상해 본다. 


앞쪽에 제자들 표정에서 그때의 상황이 실제처럼 전해진다. 나중에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군중들이 예수에게 제자들의 무능력을 일러바치기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누가복음 9:40)


군중들의 항의에 주눅이든 상황에 놓인 제자들에게 화가는 여러 가지 행동을 상징으로 심어 놓았다. 눈에 띄는 제자들을 만나 보자. 중앙에 큰 사이즈의 몸으로 노란색 천을 걸친 제자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왼손으로 말씀을 펼쳐 읽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이 부분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된다. 말씀을 기초로 기적의 능력을 베풀려고 한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하나님됨을 선포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번엔 어두운 영이 깃든 제자를 만나 보자. 맨 왼쪽에서 제자들과 방향을 달리하며 고개와 몸을 돌려 슬그머니 제갈길을 가는 한 제자가 있다. 다른 제자들과 방향이 분명히 다르다.  말씀을 든 제자는 당당하게 하늘을 향해 예수의 복음과 천국을 선포하지만 꽁무니 빼는 이 어둠의 제자는 은 30냥 받은 손을 숨기며 자리를 떠나려 하고 있다.


이곳 제자들 모두 두 손이 보이는데 유독 이 제자만이 오른손을 보이지 않는다. 제자들 그룹에서 이탈해 예수를 팔러 가는 가롯유다의 모습이다. 


그 외의 제자들 한 명 한 명을 살펴보면 그들 몸에 영적 신앙을 알 수 있는 동작을 심어 놓았다. 확대해서 살펴보면 그림이 더욱 재미있어진다. 당시 제자들의 심정을 관객이 바로 읽어낼 수 있도록 실감 나게 묘사했다.


화가 루벤스 특유의 실재감 넘치는 화풍의 결과다. 맨 앞에 있는 젊은 제자 한 명을 살펴보며 이번 그림 여행을 마친다.


특별한 한 제자

이번에는 여러 제자들 중에 단연 돋보이는 한 청년 제자를 소개한다. 당장에라도 말같이 뛰어나갈 자세와 풍성한 근육질의 몸매는 청년의 강인한 힘이 보인다.


이 같은 표현은 강인한 영성을 지닌 인물로도 느껴지게 한다. 몸에 새겨진 빛의 사용도 대담하며 그에 따라 신기한 부분이 드러난다. 튼튼한 팔뚝에 걸쳐진 두루마리 속의 의문의 문장이다.


이 청년 제자가 특이한 것은 바로 왼팔에 펼쳐진 이 두루마리 때문이다. 멀리서 얼핏 보면 옷감의 안쪽 흰색 천 같아 보이지만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로 해석된다. 여러 곳을 조사했지만 이 두루마리에 적힌 글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찾지 못했다. 그의 행동을 참고해 이 의문의 두루마리를 해석해 볼 수는 있겠다.


가장 어울리는 것이 무기가 될 말씀인 "전신 갑주"의 상징이 아닐까 한다.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대화로 나누신 말씀에 십자가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승천 후에 이방 땅을 향해 전도할 때 모든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무기로 주 신 것이 전신 갑주다. 만약에 이 해석이 맞다면 매우 중요한 그림 배경이 되기에 그 구절을 소개해드린다. 이 전신 갑주의 내용을 그림 속 청년 제자에게 적용해 보시기 바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에베소서 6:13-17)


혹시 이 영상을 시청하시는 분 중에 이 청년이 지닌 두루마리에 관한 설명을 하실 수 있으면 아래 댓글에 남겨 주시 기를 부탁드린다. 


함구령

이 변화산의 기록 중에 특이한 사항이 있어 알려드린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에 관해 함구령을 내린 부분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한 것을 목도하게 전에는 이 변화산에서 일어난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그 약속을 지켰다.


기록에 보면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한 증인이지만 산을 내려와서는 일체 이에 관한 기록이 없다. 입이 무거운 제자들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약속을 지킨 제자들은 예수께서 3일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야 이때에 관한 사건을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으로 남겼다.


아래 구절은 제자 베드로가 기록한 것인데 베드로가 순교한 후인 주후 약 66년 로마에서 기록한 것으로 추측한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 속에서 경험한 기록이다. 과연 변화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증인의 생생한 기록을 확인하시기 바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 후서 1:16-18)


이제, 그림 여행을 마쳐야 할 시간이다. 평범한 일상생활을 벗어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변화산으로의 그림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발생했던 기적을 간접 경험한 그림여행이 되셨기를 바라며 유익한 중세 명화 그림 감상이 되셨기를 기대해 본다.


떠나며

그림을 떠나며 바라보는 제자들의 다양한 모습에서 루벤스 화가의 역동성을 재확인하며 제자들의 서로 다른 시선을 읽는다. 하늘로 땅으로 이웃으로 향한 제자들의 얼굴에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향해야 할 시선은 어디인지 스스로 되물어 본다. 

제자들 전부를 대상으로 바라보면 특별한 한 인물의 모습에 마음이 짠하다. 가롯 유다의 생기 없는 어두운 얼굴이다. 손 하나가 보이지 않게 그려졌데, 저 때에라도 예수님께 돌아왔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면 그를 위한 용서와 회복과 구원의 말씀이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인류의 어떤 죄라도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영생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원죄로부터 사함을 받는다고 선언한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역대하 7:14)


작품 앞을 떠나 미술관 문을 열고 나가면 관객인 우리는 아스팔트가 깔린 내 살던 도시로 돌아간다. 그림 배경 되는 구절에는 변화 산속의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하고자 했던 제자의 염원이 있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미래의 그날이 있기에 감사하며 그림 여행을 마친다.


... ... ... 


저는 다음 그림 여행으로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 머무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에 흩어진 명화를 찾아 세밀하게 그 내용을 전하는 새로운 유튜브 명화 소개 채널. "내 집은 미술관" 제공이었습니다.

문을 열면 

곧 중세로 향하는 

유럽에서 

인사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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