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네의 목동들의 경배
반갑습니다. 그림여행에 오신 모든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작품 보다 화가가 더 관심을 받을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네Giorgio Barbarelii, 1478년∼1510)입니다.
30대에 요절한 화가라서 작품도 많이 남기기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유작은 명화 중의 명화로 불리는 작품들입니다. 독자분들께서도 이미 많이 보셨던 작품들인데요. 대표적인 작품이 <폭풍>입니다. 많이 보셨죠?
지금까지도 이 작품의 도상을 해석하지 못해 미술사학자들간에 공방이 오갑니다. 잠자는 비너스 시리즈를 유발시킨 작품도 있고, 근대 미술에까지 영향을 끼친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하구요. 오늘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전시된 목동의 경배를 살펴보며 12월의 크리스마스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작품을 만나니 첫 느낌이 어떤가요? 밝고 선명한 색채와 빛이 가득 넘치죠? 굴 안의 짙은 어둠과 밖의 밝은풍경이 대조를 이루며 색의 무게감 균형도 잘 유지합니다. 화가가 베네치아 학파를 한층 발전시킨 장본인이라 화려한 색상이 두드러집니다.
땅에 있는 아기 예수는 작아서 잘 드러나지 않죠? 반면에 밝고 우아한 푸른 채도의 의상을 걸친 마리아가 고귀한 자태를 취하고 있고 급히 뛰어온 목동들이 마치 순례자 모습으로 등장해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립니다. 의상과 행동으로 볼 때 개신교 보다는 캐톨릭 분위기가 드러납니다.
시원하게 트인 동굴 밖의 풍경과 넓은 바다 같은 하늘의 풍경은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떠올립니다.
특히 베네치아로 알려진 푸른 하늘 속의 핑크색상은 함께 화방에서 견습생으로 지낸 조반니 벨리니의 하늘을 연상케합니다.
이 작품에는 어떤 도상과 의미가 숨겨져있을까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의 구성을 살펴보면 화가의 화풍이나 그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게합니다.
우선 좌우를 보시면 오른쪽은 어두운 굴이 막혀있고 왼쪽은 트인 공간속에 밝은 자연이 등장합니다. 좌우의 이런 모습은 명암의 대조를 활용한 카라바조의 영향으로 볼 수 있으며 색상의 대조와 함께 목동들의 헤어진 누더기 옷과 화려한 의상의 요셉과 마리아 역시 대조를 이룹니다.
일반적인 아기 탄생과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죠? 왜그럴까요. 장소 때문입니다. 보통은 소와 말이나 나귀가 있는 외양관이 아니라 산 아래에 파인 굴 앞에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장소 선정은 성경 66권 기록이 아니라 외경을 근거로 하기 때문인데요. 외경에 임신한 마리아를 남겨두고 산파를 구하러 베들레헴으로 내려갔다라는 기록에 근거한 것입니다. 정경인 성경 66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누가복음 2:4-7)
아기 예수가 태어나 땅에 누워계시고 요셉과 마리아가 경배를 드립니다. 화가는 아버지 요셉의 형상을 최대한 부유하고 경건하게 묘사했네요. 보통 요셉은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등장하거나 마리아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화가는 그의 모자와 특히 왼쪽 어깨부분을 매우 밝게 처리했습니다. 의상에 빛을 더하니 금 같아 보이죠?
어머니 마리아는 전형적인 고귀한 성녀로 묘사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허리를 세운 채 두 손을 모아 예수께 경배합니다. 그녀의 살짝 옆으로 기운 듯한 모습과 얼굴까지 앳되게 그려 그녀의 순수함과 순종함이 잘 드러납니다.
주인공인 아기 예수께 더 다가가 볼까요?
아기 예수가 땅에 누워 계십니다. 땅에 누으신 것은 구유와 마찬가지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찾아오셨다는 구절을 반영한 것이며 흰 천은 원죄가 없으신 유일하신 분임을 상징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히브리서 2:6-8)
그런데 구유가 아니라 땅에 누워 계신 것이 낯설죠? 이것을 땅과 연관해 해석하자면 죄로 물든 땅에 원죄를 없애려 오셨기에 땅에 더 밀착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성경에는 인간과 함께 땅도 죄로 물들었음을 선포합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창세기 6: 11-12)
아기 예수가 볏단을 베게 삼아 누워 계시죠? 볏단은 먹는 빵의 상징으로 예수를 의미합니다. 돌아가신 후에 자신을 기념하라고 하신 구절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만찬의 의미입니다. 탄생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동시에 알립니다.
자 그런데요. 이 곳에 눈에 잘 띄지 않는 도상 하나가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연결하는 것으로 묘사된 의상 끝자락입니다. 마리아의 청색 천이 아기 예수를 담은 포데기의 흰 천을 아래에서 떠받치는 형상입니다. 연결의 상징이며 오로지 마리아만 할 수 있는 도상입니다.
이는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음을 상징하는 탯줄 같은 의미이기도 하고, 어머니로서 아기 예수를 섬기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원죄가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상징인 흰색 천과 함께 있음으로써 마리아의 고귀함을 알리는 경배 사상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배경이 되고 있는 동굴을 들여다볼까요? 정밀하게 살펴보면 흥미롭게 묘사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어두운 동굴이 요셉과 마리아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키죠? 특별히 마리아의 얼굴을 잘 드러나게 합니다.
멀리서 동굴을 보면 동굴 위에 등불 같은 것이 보이죠? 동굴을 밝히는 등불 같아 보입니다. 통통한 아기 천사인 푸토의 얼굴입니다. 어린 아이로 등장하기도 하고 이렇게 머리와 날개만 있는 모습도 있습니다. 성경 기록에 있는 천사는 아니고 상상으로 창조된 아기 천사입니다.
참고로 보통 아기 예수 탄생 장소로는 크게 세가지 장소가 등장합니다. 소와 구유가 있는 마구간이나 이 그림에서처럼 동굴 또는 제3의 장소입니다. 성경 기록은 외양간이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생활에서는 간혹 마구간을 산자락의 동굴을 파서 만든 곳도 있습니다. 이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입구 왼쪽에 우리 나라 시골의 사립문 같은 작은 나뭇가지를 잘라 만든 묘사가 있죠? 무척 친근하게 보입니다. 동굴 안과 밖의 경계선인 셈입니다.
이 작품에는 미래에 관한 묘사들이 있습니다. 최소한 2개의 상징들이 보이는데요. 그 중의 하나가 이 동굴에 있습니다. 눈 크게 뜨고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시선을 굴 속으로 옮기면 소와 나귀가 보이죠? 굴이지만 외양간입니다. 동굴 오른편에 있는 나무 안장입니다.
나무 가지들을 잘라 만들었는데요. 이 나무 안장은 미래에 십자가 처형을 향해 죽으시기 위해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기록을 상징합니다.
중세 전후 시기 기독교 주제를 그렸던 대부분의 화가들은 관객이 예상 못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상징화시켜 이처럼 숨겨 그렸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또 다른 도상으로 그려져 있는데요. 제가 다른 주제를 설명 드리는 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작품을 보면 유럽 분위기이지 아기 예수가 태어난 중동 분위기는 아니죠? 그러다보니 아기 예수 탄생에 늘 등장하는 천사들과 목동에 관한 언급은 없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장소에 따른 풍경은 다르지만 탄생의 기록에 있는 사항들은 최대한 표현해 놓았습니다.
왕의 탄생을 처음으로 알린 천사와 이를 확인시켜준 목동들부터 찾아볼까요? 참, 양도 있었죠?
얼핏 보면 천사도 목동들도 양도 없는 듯이 보이는데요. 이들 모두는 풍경의 입구 역할을 하는 양쪽 나무에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다가가 볼까요? 천사를 보면 목동들을 향해 손짓하며 왼손에 흰색 천을 날리고 있습니다. 이 흰색 천은 천사의 메시지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처음 아기 예수의 탄생을 목동들에게 전한 기록인 셈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누가복음 2:10-11)
땅에는 양을 치는 목동들이 있습니다. 이 목동들이 베델레헴으로 달려가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를 확인하고 경배를 올리며 마을에 왕의 탄생을 알립니다. 동굴 앞에서 아기 곁에 있는 안물들이 이 목동들입니다.
급히 달려온 목동의 모습입니다. 모자를 벗고 두 손을 모은 것과 무릎 굵는 것은 경건의 표현입니다. 화가는 양에게 꼴을 먹이는 초원의 목동 보다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묘사했는데요. 이 같은 표현으로 개신교 보다는 캐톨릭 화풍에 근거한 그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순례자의 도상은 조개껍질인데 이 상징은 보이지 않고 대신 지팡이와 옷의 헤어짐으로 묘사했습니다.
중세 전후 시기의 목동들 묘사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포착됩니다. 목동들은 양을 돌볼 때 필요한 특별한 지팡이 같은 도구가 있으며 허리춤에 목 동작업에 필요한 연장들이 보입니다.
이제 인물을 떠나 자연 속에 묘사된 요소들 중에서 상징을 지니고 있는 것들을 살펴볼까요. 특히 기독교 회화에서는 자연일지라도 다른 의미를 지닌 경우가 많습니다.
전체 그림에서 보면 목동 뒤에 작은 개울물이 흐르죠? 바위에서 흘러내린 물인데요. 이 물의 상징은 예수의 탄생이 인류에게 구원을 주신 생수가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시록 21:6)
위에서 나무 가지로 만든 안장에 대해 언급할 때, 가장 중요한 도상 하나가 있다고 언급했죠? 바로 잘린 모습으로 있는 이 큰 나무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완성을 의미하는데 죽은 나무의 이런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화가는 생명이 없는 잘린 나무를 등장시켰을까요? 너무 컸기에 앞을 가려서 잘랐을까요?
이 나무는 미래의 상징으로 십자가 나무를 상징합니다. 잘린 것은 이미 십자가가 만들어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의 탄생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한 것인데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전하는 예언적 도상입니다.
골고다 언덕으로 향할 때, 예수가 지고가는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대신 다른 사람이 지고갔다는 기록이 있죠? 그 무게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큰 나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가다가 시몬 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마태복음 27:32)
주변에 있는 자연을 활용해 예수와 연관시켜 전하는 화가의 메시지입니다.
동굴 밖의 저 넓고 아름다운 대지와 하늘은 화가의 삶이 담긴 베네치아로 알려집니다. 푸른 하늘은 빛을 반사 시켰던 베네치아의 바다가 되며 구불구불한 들판 같은 물길은 곤돌라가 지나 다니던 운하인 셈입니다.
시원하게 뻗어 있는 하늘을 볼까요? 하늘 아래에 우뚝 솟은 산맥들이 원경에는 푸른색으로 보이며 그 앞에 있는 산은 초록색입니다. 원경과 중경의 차이를 색으로 구분했는데요. 대기 원근법을 잘 활용했습니다. .
시선이 앞으로 옮겨질 수록 가옥의 사이즈가 크고 구조의 정확성을 띄며 다양한 형태의 가옥이 나타납니다. 혹시 사람이 살고 있나 훝어보니 바닷가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이고 집에는 불이 피어져있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바다입니다.
그런데 매우 특이한 광경이 포착됩니다. 무너져 내린 성의 탑입니다. 왜 이런 모습을 그렸을까요?
바다의 구불구불한 굴곡은 다사다난한 인간이 지나온 삶을 나타내며 무너진 성은 율법을 잘못 해석해 살았던 구약의 시간대를 알립니다. 지금 외양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이 온전케 하실 분이라는 기록에 따른 표현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태복음 5:17)
한 가지 참고하실 것은 성경과 관련된 그림에서 로마 유적이 무너져 내리거나 폐허가 된 성이 보일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니고 외경의 기록에 따른 내용입니다. 다만 이런 표현을 성경적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며 지은 가인의 성이라고 보셔도 되겠습니다. 결국 허물어진 성은 불순종의 도상이나 불완전한 율법 또는 구약 속 다윗의 성 등을 상징합니다.
기독교 미술에서는 이런 작은 묘사에도 색다른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 대하시는 분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저의 채널과 함께 하나 하나씩 배워 가시면 언젠가는 보는 즉시 해석이 될 것입니다.
이제 화폭에 하나 남은 부분인 왼쪽 집을 살펴보며 그림 여행을 마치겠습니다.
이 집의 주인인 듯한 한 노인이 턱수염을 기른 채 풀밭에 앉아 밖을 향하고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일 나간 자식을 기다릴 수도 있고 또 성경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 오시기를 예언하며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이사야 선지자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전체 그림에서 볼 때 노인의 크기가 작고 평범한 인물로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노인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노인은 특별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요. 그가 앉은 자세와 바라보는 방향입니다. 그의 시선의 방향이 예수 탄생 이전 시기인 과거를 바라보고 있고, 흰색 천 위에 앉아있는 것은 의도적인 모습입니다.
예수 탄생이란 주제에서 노인이 구약인 과거를 향해 쳐다보며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 외에도 또 다른 인물로 유추할 수도 있는데요. 남성이면 시므온이고 여성이면 선지자 안나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곳에는 남성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시므온으로 해석하셔도 좋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누가복음 2:25-26)
그림을 떠나기 전에 다시 봐도 가슴이 뻥 뚫어지는 시원 시원한 구성입니다. 오른편에는 돌산을 등장시켜 무거움과 견고함을 지니고 있고 왼쪽에는 길게 뻗어 있는 자연을 등장시켜 탁 트인 공간을 선사합니다.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쁨과 함께 밝고 선명한 의상이 눈에 띄는 Giorgione의 작품을 만나봤습니다.
발길을 돌리려 하니 한 군데에 시선이 머무는데요. 왼쪽의 잘린 나무입니다. 저 나무로 이미 만들어진 십자가는 어디에 있을까요? 화폭 안일까요? 관객 마음 속일까요? 관객에게 신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살펴봤습니다.
그럼, 저는 다음 그림 여행을 준비해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모두 평안에 머무시길 기도합니다. 세상에 흩어진 명화를 찾아 세밀히 그 내용을 살펴보는 명화소개 코너. <내 집은 미술관> 제공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을 열면
곧
중세로
발길이 옮겨지는 곳
유럽에서
인사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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