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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피로 예고된 구원의 서막

오리치오 젠틸레스키의 "수태고지"

by 명화 속 상징

수태고지

Annunciation

Orazio_Gentileschi_-_Annunciation.JPG Orazio Gentileschi, The Annunciation. 1623. 196 x 286 cm. Galleria Sabauda, Turin, Italy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누가복음 1:30-31)


제목을-입력해주세요_-001 (17).png 유튜브 <명화 속 상징>채널에서 영상으로 시청하세요.


안녕하세요. 명화를 찾아 떠나는 "명화 속 상징" 코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작품은 17세기 이탈리아 명화의 거장,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가 1623년에 완성한 《수태고지(The Annunciation)입니다.


이 그림은 아름다운 여성으로 묘사된 마리아의 가장 경건한 장면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세상의 모든 명화 중 가장 많은 피가 담겨 있는 충격적인 작품입니다. '수태고지'라고 하면 경건한 성경 이야기로만 알고 계실 텐데, 피가 가장 많이 그려진 명화라니 의아하시죠? 이 놀라운 대비 뒤에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구원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수태고지 사건의 이해


작품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성경적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수태고지’(개신교), ‘성모영보’(천주교), ‘성모희보’(동방정교회)라 불리는 이 사건은 누가복음 1:30-31, 3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령인 가브리엘 천사가 처녀 마리아를 찾아와 성령으로 아기 예수를 잉태할 것을 알렸고,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순종으로 받아들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신약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첫 시작인 에덴동산에서부터 이미 예고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했던 '원죄(原罪)'를 대속하기 위해, 죄 없으신 하나님 스스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십자가에서 대신 희생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구약 성경적 배경에 깊이 기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의 범죄 직후, 창세기 3장 15절에 '여인의 후손'을 통해 해결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남자의 후손'이지만, 오직 이 수태고지 사건을 통해서만 남자와의 육체적 결합 없이 성령 잉태로 '여인의 후손'인 아기 예수가 태어나게 됩니다. 즉, 수태고지는 단순한 잉태 고지를 넘어, 인류 구원의 서막이 열리는 사건인 것입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이탈리아 북서부의 산업 도시인 튜린(Turin,토리노)에 위치한 “갈레리아 사바우다(Galleria Sabauda)”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토리노는 알프스 산맥과 인접해 있으며, 종교적으로는 예수의 얼굴이 새겨졌다고 전해지는 '토리노 수의(Shroud of Turin)'로 유명한 도시이기도 합니다.”



전체적인 인상과 구도


작품은 시원하게 긴 세로 사이즈를 자랑하며, 관객의 시선이 낮게 설정되어 있어 전시장에서 올려다볼 때 더욱 깊은 경건함과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대각선 구도: 가로 세로의 대각선을 그으면 중앙 지점에 있는 가브리엘 천사의 오른손 손가락 끝에서 만납니다. 천사가 최대한 몸을 낮추고 손가락을 하늘로 향하게 한 이 동작은, 이 수태고지가 천상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명령임을 시각적으로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이 등분 구도: 그림은 좌우로 명확히 나뉘어 대비를 이룹니다.

왼쪽 (인간계의 상징): 마리아가 있는 부분은 붉은 커튼과 흰 침대보가 직선으로 차분히 내려진 정적(靜的)인 공간입니다. 마리아는 손을 들어 순종을 표하며 수동적(受動的)입니다.

오른쪽 (영계의 상징): 천사 쪽은 날개가 펄럭이고, 창문이 열려 비둘기가 날아들며 햇살이 강하게 쏟아지는 동적(動的)이고 능동적(能動的)인 에너지가 넘칩니다. 이는 성령의 살아 계심과 구원의 역동성을 상징합니다."

“분할구도(3:1, 2:1)는 화폭에 안정감을 줍니다.

침대에 있는 나무가 세로축를 이루며, 흰색 침대보는 가로축을 만듭니다. 이렇게 분할 선을 만들면 화폭이 각각 가로 세로로 균형을 이룹니다.”


인물 묘사: 순종과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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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인물은 각각 인간계(마리아)와 영계(천사)를 대표합니다.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다는 묘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실제함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마리아

“수태고지 작품 중 가장 앳되고 청순한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관객을 정면으로 향한 채 손을 들어 순종함을 표현합니다. 콘트라 포스트 자세와 함께 조용히 숙인 고개는 여성적인 매력을 발산합니다. 울트라 마린 블루의 화려한 청색 가운과 그 안의 짙은 적색 의상은 성가족의 삼색(청색: 자애, 적색: 사랑과 고통) 상징을 담고 그녀의 고귀함을 높입니다. 오른손과 이마에 비친 햇살은 처녀 잉태의 순수함을 강조합니다.”


가브리엘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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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듯 사실적이고 친근한 동네 청년처럼 묘사되었습니다.

맨발은 이 장소가 거룩함을 나타내며, 최대한 허리를 숙여 예의를 갖추면서도 손가락 끝으로 천상의 명령임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동작이 인상적입니다.”


색조의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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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단색 속에 숨겨진 풍부한 색조의 폭입니다. 젠틸레스키는 오른쪽에 창을 배치하여 자연광을 끌어들였습니다. 이 빛은 마리아를 눈부시게 비추는 동시에, 본래 단색(Monochromatic)이었을 색들이 햇살에 반사되면서 밝음(Highlight)과 어둠(Shadow)을 만들어내 다채로운 색조(Tones)의 향연을 연출합니다.


이러한 명암의 활용 덕분에 색감은 훨씬 부드럽고 깊이 있어 보입니다. 천의 재질과 더불어, 순수한 흰색 속에서도 검은색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고, 짙은 노란색 속에서도 어둠이 물든 풍부한 색조를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인물들의 손동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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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를 주제로 한 그림을 감상할 때, 화가가 많은 이야기와 도상(Iconography)을 심어 놓은 인물들의 손동작에 주목해야 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능동적인 손 동작을 볼까요?

가브리엘 천사의 동작은 이 그림의 가장 눈에 띄는 적극적인 동작을 연출합니다. 보통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을 건넬 때 손동작은 수평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젠틸레스키는 천사의 몸을 최대한 낮춰 구부리게 구성함으로써, 오른손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키도록 만듭니다.


꺾어 올린 고개와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까지, 이 동작 전체는 이 잉태가 천상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능동적인 의지를 담아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내면적 고백이 담긴 손입니다.

처녀 마리아의 몸짓과 표정에는 복합적인 내면의 심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고귀함을 나타내는 얇은 숄이 머리와 어깨를 감싸 여성성을 강조하며,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심리적 상태를 드러냅니다.


마리아의 왼손은 염려를 상징합니다.

왼손으로 청색 가운을 가슴 쪽으로 살짝 끌어당기는 동작은, 처녀인 자신의 잉태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는 실제적인 걱정과 두려움을 관객에게 전달합니다. 양쪽 볼에 붉게 달아오른 홍조는 어린 소녀가 느낄 수 있는 떨리는 마음의 온도를 상징합니다.


마리아의 오른손은 순종의 상징입니다.

이러한 두려움 속에서도 마리아는 오른손을 살며시 들어 올려 순종함을 표현합니다. 손바닥을 보이는 동작은 마리아가 자신의 신앙적 내면을 온전히 열어 보이는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그녀의 이 동작은 외적으로는 겸손하지만, 그 이면에는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는 굳건한 신앙적 반석이 자리하고 있음을 웅변합니다.


이런 손동작의 분석은 인물들의 단순한 자세를 넘어 그들의 심리와 신앙을 읽어내는 깊이 있는 해석이 될 것입니다.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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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앞에 직접 서면 작품 전체는 보이지만, 인물의 세밀한 얼굴 부분을 따로 떼어내 살펴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얼굴 부분만을 확대해 보면, 마리아에게 표현된 겸손함, 청초함, 순수함 등의 내면적 특징이 더욱 자세히 나타납니다.


마리아의 얼굴은 중앙을 정확하게 가른 가르마를 통해 그녀의 단정한 마음을 엿보게 하며, 조용히 다문 입은 수태고지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전달합니다. 넓은 이마와 분명한 이목구비, 그리고 붉은 홍조를 띤 볼은 그녀가 나이 어린 처녀로 상징되는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담고 있습니다.


바로 앞의 가브리엘 천사 역시 살아있는 눈매와 오뚝한 코, 날렵한 옆 선을 통해 마리아처럼 생동감 넘치는 젊은이로 표현되었으며, 전령으로서의 활달한 행동력이 얼굴 묘사를 통해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청자 여러분께 한 가지 현장 경험 팁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명화를 효과적으로 감상하기 좋은 순서는, 먼저 작품에 대한 지식(선지식)을 충분히 지니고 난 후에, 현장인 미술관에서 작품을 대하며 이를 확인하고 감상(후감상)하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작품부터 만나게 되면 외형적인 관찰만 하게 되기 쉽습니다. 미술관 현장은 인터넷처럼 나 혼자 사용할 수 없으며, 원하는 부분만 확대해 볼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작품에 설치된 조명 반사로 인해 제대로 응시하기 어렵고, 성수기 때의 인파는 깊이 있는 감상에 최악의 환경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선지식 후감상'의 원칙을 기억하고 미리 작품을 학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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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에서 두 인물이 대면(對面)하는 부분만을 떼어내 살펴보면, 비록 신성한 작품 내용을 변형시킬 우려가 있지만, 숨길 수 없는 것은 마치 젊은 남녀 간의 대면이 상상된다는 점입니다. 성경적 맥락을 잠시 제외하고 본다면, 한 젊은이의 적극적인 구애 장면으로도 상상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성경 66권 중에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책이 존재합니다. 바로 구약의 아가서(雅歌書), 즉 "아름다운 노래의 책"입니다. 이 아가서는 남녀의 사랑을 담고 있으며, 많은 구절에서 일상적인 연애를 넘어 격한 에로틱한 장면을 묘사하는 듯한 구절들이 나타납니다.


대표적으로 아가서 4장 1절과 5절은 이러합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으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 그리고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


처음 읽으면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이 성경책은 표면적인 남녀의 사랑을 넘어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사랑을 말하는 책으로서 해석해야 합니다.


화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 장면을 구성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으나, 성경적으로 깊이 해석해 볼 때, 이 장면은 인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격정적인 마음이 담긴 아가서의 한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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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색채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날개의 묘사입니다.


보통 다른 수태고지 작품들에서 천사의 날개는 화려한 색상으로 눈에 띄게 표현되곤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나타난 두 개의 날개—가브리엘 천사의 날개와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의 날개—는 모두 옅은 회색으로 처리되어 색조가 의도적으로 절제되어 있습니다.


젠틸레스키는 비둘기, 벽, 그리고 천사의 날개로 이어지는 화면의 오른쪽 영역 전체를 회색 톤으로 통일했습니다. 이처럼 색조를 조절한 이유는,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고 중앙의 인물들(마리아와 가브리엘)에게 강조를 집중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절제된 색채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날개는 비록 흑백처럼 보이지만 컬러 못지않은 사실성과 자연스러움을 지닙니다. 조용히 펄럭이는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 듯, 가벼운 깃털의 촉감까지 느껴질 정도로 뛰어난 표현력을 자랑합니다.


비둘기(색체 전략)

오른쪽 상단, 열린 창문을 통해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날개를 완전히 펼친 채 막 들어오는 모습은 화폭에 강력한 생동감을 불어넣습니다. 처녀 마리아의 다소곳한 동작과 가브리엘 천사의 큰 움직임에 더해, 이 비둘기의 역동적인 뛰어듦은 장면에 활력을 더합니다.


흥미롭게도, 젠틸레스키는 비둘기와 가브리엘 천사의 날개 모두를 옅은 회색으로 구성했습니다. 이는 전체 화폭에서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도록 색조를 통제하여 중앙 인물들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흑백 톤은 왼쪽의 화려한 색채(마리아의 청색, 붉은색)와 극적인 색채 대비를 이루어 마리아의 순수성과 처녀성을 상징하는 흰색의 백합화를 더욱 또렷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줍니다.


천사의 날개의 표현력은 경이롭습니다. 이 날개만을 확대해 살펴보면, 창가로 들어온 햇살에 의해 만들어진 명암이 날개깃의 농도를 세밀하게 달리하며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덕분에 날개는 포근하고 가벼운 깃털이 손에 잡힐 듯한 촉감을 전달하며, 천사가 수태고지를 끝내고 떠나갈 때 실제로 사용될 것 같은 정밀한 사실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관객은 이 날개를 눈으로 확대하여 그 실제성과 신성함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붉은 천


이 그림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요소이자 가장 멋진 장치는 바로 배경을 이루고 있는 붉은 캐노피 침대 천입니다. 다른 수태고지 작품들을 살펴보면 커튼의 아랫부분을 묶어두거나 간결하게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젠틸레스키는 이 붉은 천을 화폭 전체의 배경이 되도록 넓게 펼쳐 구성했습니다.


더욱이 주목할 점은, 이 배경의 붉은 천과 마리아가 입은 속옷 혹은 겉옷 속의 붉은 의상이 같은 색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화가가 이처럼 붉은색을 중복하여 강조한 이 구성에는 이 작품의 핵심을 관통하는 지극히 중요한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과연 젠틸레스키는 이 붉은 천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요?



피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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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으로 활용된 이 붉은 천은 십자가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많은 양의 피가 마리아의 몸을 관통하여 아래로 흘러내리는 형상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원래 명화 속에서 캐노피 침대의 커튼이 이처럼 배경 전체를 이루도록 펼쳐져 있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보통 커튼이 펼쳐져 있더라도 단정하게 펴져 있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반으로 접혀 있어 침실 내부를 반쯤 보이게 합니다.


이러한 표현법은 남성이 부재한 침실임을 강조하여 마리아의 처녀성을 상징하기 위함입니다. 혹은 천을 한쪽으로 몰아놓고 그 끝 부분을 동그랗게 모양내어 묶어 놓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젠틸레스키의 이 그림 속 붉은 천은 앞서 언급된 전통적인 방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 천이 배경 전체를 장악하고 마리아의 몸을 향해 흐르는 듯 구성된 것은, 단순히 침실을 묘사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 피의 흐름이라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화가의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의도 때문입니다."


피로 상징되는 배경의 붉은 천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흐름이 두 군데로 나뉘어 구성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왼쪽 천 부분은 직선으로서 아래로 즉시 흘러내리게 묘사되어, 우리가 일반적으로 천을 펼칠 때 나타나는 평범한 모습입니다. 반면에 천의 오른편은 큰 폭으로 격렬하게 접혀 출렁이고 있으며, 접힌 부분이 관객의 시선을 아래로 향하도록 화살촉처럼 방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화가는 왜 이렇게 큰 폭으로 거칠게 접혀 출렁이도록 표현했을까요? 그 이유는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는 인류를 향한 지극히 깊고 넓고 큰 사랑의 유일한 증거이자 산제물로서의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격정적이기에 단순히 조용히 흘러내리는 물처럼 묘사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붉은 천의 종착점입니다. 노란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을 따라가 보면, 배경으로 펼쳐진 붉은 천이 마리아의 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끝 부분이 좁아져 마리아의 청색 의상으로 연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화가는 침대의 천을 십자가에서 흘리는 피의 도상으로 활용하여 흐름을 넣고, 그 흐름이 마리아의 몸으로 들어가도록 구성한 것입니다. 이 구성을 통해 피를 상징하는 붉은 천이 인류를 대표하는 마리아 몸 전체를 관통해 흐르며, 결국 피로써 온 몸을 온전히 감싸 원죄를 사하셨다는 성경 십자가의 핵심 내용을 완벽하게 시각적으로 형상화했습니다.


다만 여기서 피의 흐름에 출렁이는 역동성을 넣기 위해 커튼에 큰 폭의 주름을 만들었습니다. 이 격렬한 출렁임이 보이시죠? 필자가 본 도상 중에서 이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극적이며 특별한 방식의 십자가 피의 흐름을 담아 묘사한 작품은 없습니다. 이 부분이야말로 젠틸레스키의 창의성이 절정에 달한 지점이라 한참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또한 이 커튼에서도 화가의 색에 대한 뛰어난 표현력이 잘 드러납니다. 붉은 단색일 텐데도 다양한 붉은 색조가 우러나며, 빛에 대한 관찰과 활용력, 그리고 표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은혜의 출발선과 종착점


이 그림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데, 바로 하나님 은혜의 출발선과 종착점이 묘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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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아래로 물밀 듯 쏟아져 내리는 피의 원천인 붉은 커튼의 상단을 자세히 보시면, 그 출발점인 케노피 상단에 해당하는 천의 막대가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첫 출발, 즉 기원(起源)을 논할 때, 수태고지라는 은혜를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제일 원인(Uncaused Cause)이 없으신 분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출애굽기 3:14) 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자기 선언처럼,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창조주이심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이 피흘림의 최종 목적지는 마리아가 서 있는 바닥으로 명확하게 명시됩니다. 이 땅입니다. 온몸을 적시며 흐른 피가 몸의 끝 부분인 발바닥을 덮은 것은, 인류의 모든 원죄를 덮어 온전히 사하셨다는 구원의 완성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현재 제가 설명 드리는 이런 도상 해석은 화가가 처음부터 의도했는지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림 감상에서 작품 배경을 참고해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상 후에는 관객의 새로운 창의적 해석이 탄생합니다. 화가의 손을 떠난 회화 작품이 관객에 의해 새로운 문학적 해석의 창작물로 제작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의 선순환(善循還)적 발생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시작이 없는 붉은 천의 상단과 끝 부분인 인류의 발바닥 하단을 덮은 천의 숨겨진 은혜의 상징을 살펴보았습니다.


아울러 천사의 발에 신발이 없음은 이 장소가 신성한 곳임을 뜻하며, 이는 성경 구절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는 출애굽기 3장 5절 기록에 따른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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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아래 두 작품을 비교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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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dd.jpg 1601. Crucifixion of Saint Peter by Caravaggio. Santa Maria del Popolo, Rome. Italy

미술사를 거시적으로 살펴보면, 화가 개인의 완전한 독창적 창의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대단한 창의적 결과물은 결국 자연으로부터의 모방과 기존 대가의 영향 속에서 재창조되는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젠틸레스키의 이 작품 역시 카라바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를 확인하기 위해 두 작품의 유사성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카라바조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인물의 볼록한 엉덩이 부분과 천의 색감, 그리고 발바닥 묘사 등을 비교해보면 포즈마저 비슷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두 화가 모두 천의 질감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방식에 능숙했으나, 그 표현 방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하게 동일한 것은 빛으로 생성된 어둠을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즉, 강렬한 명암 대비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창출하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법) 기법을 공통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이 두 거장을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쌍둥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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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수태고지》에는 흥미롭게도 쌍둥이 작품이 존재합니다. 오늘 우리가 상세히 살펴본 튜린 작품보다 일 년 앞선 1622년에 제작되었으며, 현재 이탈리아 제노바의 Basilica di San Siro 성당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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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확연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제노바 버전은 얼굴 묘사에서 약간 무딘 감이 느껴지며, 특히 배경이 되는 천이 짙은 청색으로 처리되어 튜린 버전의 강렬한 붉은색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줍니다.


작품 전체의 색조 톤이 훨씬 어두우며, 핵심적인 부분인 배경 침대의 천에서 격한 출렁임이 없고 밝은 적색이 아니라는 점은, 튜린 버전에서 해석한 '십자가 피의 역동적인 흐름'이라는 독창적인 도상이 이 시기에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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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 제노바 버전은 인위적인 미술관 환경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신앙의 현장인 성당에 전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닙니다. 작품의 내용이 성경에 기반한 만큼, 실제로 교회 건물 안에 있음으로써 관객 또는 신자에게 더욱 정겹고 생기가 도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현장 속의 미술관은 작품과의 친밀도를 높여주며, 일반 미술관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직접적인 접촉과 작품의 진정성을 더욱 진하게 느끼게 해주는 귀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마치며


젠틸레스키의 《수태고지》를 통해 간결하면서도 현실적인 앳된 여인으로 표현된 동정녀 마리아와 바위같이 단단한 그녀의 신앙적 결단, 그리고 격한 천의 울렁임 속에서 인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십자가 사건의 피흘림까지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수태고지의 잉태와 함께 장차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임을 묘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 담긴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명작입니다.

함께 그림 여행에 동참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채널을 통해 명화 속에 숨겨진 상징이 온전히 이해되는 시대가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내용이 유익하셨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시고, 구독과 알림 설정으로 다음 명화 여행에도 꼭 함께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는 다음 작품으로 곧 찾아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 머무시길 기도합니다. 세상에 흩어진 명화를 찾아 세밀히 그 내용을 살펴보는 명화소개 코너, <명화 속 상징>제공이었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50923_151627.jpg "테이블 11번"


"문을 열면

중세로

발길이 옮겨지는 곳.


유럽에서

인사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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