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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ng Juha Oct 27. 2020

프롤로그

당연히 계속될 줄만 알았던



유난히 비가 많이 왔던 올해 여름, 나는 이유 없이 곧잘 아프곤 했다. 재작년부터 운동을 쉰 적이 없었는데 더 이상 운동을 지속할 수 없을 만큼 호되게 아파야만 했던 7월, 잘 지내는 줄로만 알았던 고무나무가 과습을 견디지 못하고 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가지의 외피로 하얀 수액들이 스며 나와 말라붙은 채로 서서히 죽어가는 고무나무를 지켜보며 나는, 함께 죽어간다고 느꼈다. 하지만 함께 죽는 대신 어떻게든 이 나무와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이 나무는 내게 그냥 고무나무가 아니라, 나 혼자 살던 작은 집으로 찾아온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명체, 그러니까 요샛말로 '반려식물'이었기 때문이다.

"동병상련이구나."
"꼭 살아야 해."

나는 나무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매일같이 나무에게 "살아달라"라고 말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실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은 않았는데, 그 말은 곧 내게 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루는 잔뜩 체해서 기력이 남아있지 않은 몸을 움직여, 난생처음 화분 갈이를 해주었다.

그날은 때마침 엄마가 죽을 잔뜩 사들고 집에 들른 날이었는데, 죽은 반도 먹지 못한 채 고스란히 냉장고에 넣어야만 했다. 당시 식음을 전폐하게 만든 부동산 문제를 엄마에게 털어놓으며 울고 토닥임을 받는 사이 금세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엄마와는 보름에 한 번, 길면 한 달에 한번 정도 얼굴을 보는 사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십 년을 헤어져 살다가 작년 시월부터 다시 보기 시작한 사이이기도 했다. 그런 엄마와 함께 죽을 먹으며 아무에게도 공유할 수 없던 어려움을 털어놓는 일들은 누군가에겐 무척 당연한 일이지만, 일 년 전의 나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기댈 수 있는 어른이 생긴 것만 같아 안도했고 엄마와 함께였기에 한결 수월하게 케케묵은 흙을 비워내고 새로운 흙을 채운 화분에 고무나무를 옮겨 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뒤 고무나무는 죽었고, 나는 죽을 것 같이 힘들었음에도 살아났다.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아프기 이전과는 사뭇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되었다. 어쩐지 한 번은 죽었던 것만 같기 때문이다.

연거푸 심하게 체하여 며칠을 죽은 듯 지내야 하던 날들이 지난하게 반복되던 여름이 지나가고 벌써 만추, 겨울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아주 짧고 강렬했지만, 당연하게 여기던 건강한 몸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던 시간들, 당연하게 여기던 엄마의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시절들, 그 모든 게 지나가고 벌써 나는 인생의 어떤 자리에 와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행으로 시작하는 푸시킨의 시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나는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또다시 그리움이 되는 

나는 삼십 대 중반이고 여전히 젊으며 이 시의 마지막을 이제는 알고 있다. 엄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베갯잇을 적시던 통속적이고도 신파스러운 시절을 지나, 마침내 적게 그리워하고 많이 감사할 수 있는 계절을 산다. 이 글은 당연한 듯 당연하지만은 않게 찾아온 시절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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