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괴물
드라마를 잘 안 본다. 영화의 속도와 강도에 익숙해지다 보니 드라마는 늘어진 테이프를 듣는 느낌이 들어서다. 추천이나 우연찮은 기회로 취향에 맞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지만 꽤 오래된 일이다. 우리나라 드라마를 꼽자면 비밀의 숲 정도. 시즌 2도 나와서 기대했는데 조금 보다가 재미없어서 관뒀다. 최근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 자의 반 타의 반 하는 것들이 있다. 오디오와 TV 애니메이션 보기 그리고 드라마.
영화계가 코로나로 얼어붙자 배우들이 조금씩 안반극장으로 넘어왔다. 황정민 그리고 정우성이 다시 안방극장으로 돌아왔으니까. 그래서 스케일도 커진 것 같다. 원래 기대했던 드라마는 조승우가 나오는 “시지프스”였다. 4화까지 보고 관뒀다. CG는 돈이 없어서 그렇다 치자. 하지만 긴박한 상황에서의 연출은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노하우도 없고 디테일도 없어서 후진 거다. 도저히 못 봐주겠더라. 맥락상 양보해줄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마저 봐주면 이 드라마는 메세지만 남는다. 영화의 스케일을 안방으로 가져오려는 시도가 이렇게 무너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뱁새 가랑이가 아주 쫙 찢어졌다. 치워버리고 눈에 들어온 것이 신하균, 여진구 주연의 “괴물”이다. 시지프스와 같이 광고를 했던 작품인데 딱히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시지프스에 실망해서 꿩 대신 닭이라도 먹어야지 하고 보기 시작했는데! 꿩보다 맛있다.
괴물은 미스터리 심리 스릴러를 표방한 장르물이다. 만양이라는 곳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을 두고 두 경찰과 마을 사람들이 얽히고설킨다. 동생은 사라지고 열 손가락 끝만 돌아온 사건의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동식이라는 인물이 범인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되어 간다는 것이 메인타이틀이다. 20년 전 실종사건 이후 그는 경찰이 된다. 그리고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잡기 위해 선을 넘는다. 괴물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니?라고 묻는다. 동식에게는 경찰로서 수호해야 하는 보편적 가치인 정의감과 내 가족을 해한 이를 잡겠다는 개인적인 차원의 복수의 감정이 뒤섞여 있다. 누구보다도 법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로 인해 융통성 없는 사람 취급을 받지만 동생을 찾기 위해 아주 가볍게 넘어버린다. 동갑내기 친구인 경찰과 상관도 공모자다. 정의를 행하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 용서될 수 있을까? 사실 정의가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복수라면? 괴물에서는 경찰청장을 앞둔 또 다른 주인공의 아버지와 동식의 친구인 시의원, 만양의 부동산 개발 사업을 발을 담근 건설사 대표가 등장한다. 이들은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공모를 한다. 동식의 무리들과 대치하는데 이 구도에서 누가 선이고 악이고를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 상대적으로 동식의 편에 마음이 가지만 깔끔하진 않다.
타이틀도 의미심장하다. 1화부터 8화까지 각 2편씩 에피소드 소제목이 데칼코마니처럼 쌍을 이룬다. 속다-속이다, 나타나다-사라지다, 낚다-낚이다 등으로. 내가 기어이 당신의 거울이 되어야 거기에 다다를 수 있다는 슬픈 알고리즘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 드라마를 보면 박훈정이 각본을 쓰고 김지운이 감독한 “악마를 보았다”가 떠오른다. 박훈정의 세계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세계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당한다. 악마를 보았다, 마녀, 신세계 등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마지막에 괴물이 된다. 같은 괴물이라도 방범이 다른데 찍힐 수 있다. 밟고 서야 한다와 밟고 설 수밖에 없다로. 마녀와 신세계가 전자라면 악마를 보았다가 후자라고 할 수 있겠다. 드라마 괴물도 마지막 모습이 후자였으면 좋겠다. 아직 반이 더 남았다.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