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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립국 Feb 21. 2024

오늘의 서술, #62 화양연화의 앙코르와트

비밀얘기


 지난해 봄부터 아이들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다. 상담같은 전문적 영역의 일은 아니고, 자유롭게 쉬고 놀 수 있는 공간의 관리자 역할이다. 재미난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같이 해보고, 영화도 보고, 운동도 하고 내 의지에 따라 하고 싶으면 이것저것 많이 해볼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이다. 순수하게 놀고 있는 모습에선 동심을 동경하다가도, 어른들처럼 영악한 애들을 보면 얄밉기도 하고, 이유가 있는 비뚤어진 모습을 보면 짠하기도 하고 도를 넘어서면 혐오스럽기도 하고 그렇다. 여튼,


오늘은 이따금 오던 한 아이가 심심하다며 근처에 오길래 대화를 했다.


좋아하는게 뭐냐? 똥이요. 

똥 좋아해? 동생이 똥을 먹어요.

자주 먹어? 아니고 저번에 한번 맛보고, 또 한번 그랬나...

부모님이 알아? 아니요.

내가 강아지랑 같이 사는데, 우리 강아지는 안 그래. 근데 똥을 먹는 강아지는 불안증세때문에 블라블라~ 부모님이 알고 있는게 좋지 않을까 블라블라~


이런 대화를 하다가 내 옆자리 빈 의자에 푹 안더니, 


선생님, 비밀인데 이거 선생님한테만 말해줄게요. 우리 엄마, 친엄마 아니에요. 새엄마에요.


 비도 오고, 아무도 없어서 이야기했을까. 별로 슬프지 않다며 담담한 표정으로 내 질문에 답하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몇분을 그렇게 보냈다. 이걸 좋다고 해야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순간이 좋다. 가끔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았는데, 문을 열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준비? 저쪽이 나에게 무엇인가 털어놓으려고 몇번이고 고민하고 타이밍을 재고 했을 준비에 비하면 난 귀만 열어주면 되는 것. 물론 그냥 날이 이래서 아무 이유 없이 말했을 수도 있다. 이유가 어떻든 누군가의, 세상의 비밀이 나에게 흘러들어오는 이 순간이 좋다.


 경험상 이런 이야기는 속으로 이미 정리가 된 이후에나 다른 사람에게 전달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별로 슬프지 않다는 말을 믿는다. 그 말을 나에게 할 만큼  약하지 않다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거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대상은 누구여도 상관없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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