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는 유전자, 요아힘 바우어
이 책의 제목이 <공감하는 유전자>이지만 읽으면서 공감보다는 '공명'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근래엔 다양한 매체에서 '공감'을 이야기하지만, 내가 지내는 환경의 특성(공대-공대생으로 가득한 남초 회사) 때문인지 내 경우엔 실제로 공감을 잘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보기란 꽤 어려웠다. 심지어 스스로 공감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중에는 나도 있음)도 들여다보면 자신의 생각을 '인지'하는 쪽인 경우였다. 그만큼 생각이 아닌 감정을 인식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현대인이 자신의 감정을 잘 돌보며 살아가는 일도 드물다고 한다.
현대인의 대부분이 자신의 감정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그게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그리고 본인이 그렇다는 걸 잘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란 존재가 가족이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회사에서 일을 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기 때문인 것도 있겠다.
회사, 즉 공적인 영역은 일반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 혹은 사람들의 감정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 문제는 사적인 영역에서, 2인 이상일 때 생긴다.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감정 또한 알아채지 못하여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한참 인기인 금쪽이 시리즈에서 항상 문제가 생기는 지점과 맞닿아있지 싶다.
그 때문에 나는 공감보다는 '공명'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공감'은 그 뜻 자체가 '감정 이입'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감정과 생각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여 타인의 어려운 이야기를 듣고도 자체 판단하며 "괜찮아, 별 일 아니야~"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한데 '공명'은 고유 진동수가 딱 맞을 때 그 파동으로 진동이 커지는 것을 의미하므로 상대의 말과 행동, 몸짓, 표정으로 인해 마음이 울리는 느낌이 들어버리는 단어로 느껴져서인지 그 자체로 훨씬 더 와닿았나 보다.
#의미_지향적인_삶, #공존과_공생, #교육
내가 뽑아본 이 책의 굵직한 키워드이다.
아이를 낳고 나서 이 경험을 모든 여성이 반드시 해야하나? 같은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꽤 오랫동안 스스로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돌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는 일은 초보 엄마에게 녹록치 않은 일이라 내가 과연 돌봄이 적한한 사람인가? 하는 의심을 했고, 그게 스스로를 힘들게 했었다.
지금은 돌봄이라는건 인간에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나자마자 네 발로 기다가, 두 발로 섰다가, 세 발로 느릿느릿 걷다가 가는게 사람의 인생이라면, 그 중에 타인의 적극적인 돌봄이 필요 없어 보이는 때는 두 발로 서있는 때 뿐이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누군가의 적극적인 돌봄 속에서 성장한다. 나도 그랬고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그랬다. 성인이 된 지금은 내가 누군가를 돌봐야 하나?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돌봐야 한다. 왜냐면 나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늙어질 것이고, 그 때 다시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가 미국식 사고가 팽배한 우리나라에 큰 울림이 되길 바란다.
- 의미 있는 삶은 누군가를 돕는 일이고, 누군가와 공존하려는 노력을 해야하고, 그런 사회가 자연스러워지도록 그리고 사회에 작은 사람들이 소프트랜딩할 수 있도록 아주 작은 사람들을 교육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아래는 책에서 밑줄친 부분은 발췌했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내용만 적어둔 요약본이므로 전문을 다 읽는 것을 추천한다)
삶에 대한 '의미' 지향적인 태도와 사회 친화적인 자세는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공공심은 우리 인간에게 긍정적이고 건강에 이로운 유전자 활동 패턴을 이끌어낸다.
의미 지향적인 삶을 살기로 설정된 내면의 태도는 내적으로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효력을 발휘한다. 즉 이러한 삶의 태도는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도 이로울뿐더러 미래의 도전과 난관을 극복해낼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옮겨놓는다. ... 철학적 의미의 '좋은 삶'이란, 크고도 작은 이 지구에 머무는 인류로서 우리가 서로 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참된 삶'은 무언가를 꾸준히 찾아 헤매는 일들과 관련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칭했다. 흔히 이를 행복이라고 옮기는데, 나는 '좋은 삶'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어떤 좋은 것을 가지고 싶은 욕망과 개인의 단기적 욕구가 즉각 충족되고, 많은 노력 없이 스스로 만족하고 자기 행복을 누리는 상태, 이것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티포스(Aristippos)의 이상이었다. 그에게 있어 삶의 목적과 의의는 단순한 쾌락과 즐거움이었다(그리스어로는 헤도네Hedone).
환자의 행복을 위한 처방전에 무엇이 빠져있는지(그렇다면 환자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 살피게 되었다. 무엇이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지, 무엇이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지 유심히 관찰하면서 어떤 진료가 도움이 될지 연구하는 것은 정신 질환을 대하는 두 가지 치료 전략 중 하나다. 두 번째 접근버븐 불행에 영향을 미친 요인을 찾는 것으로, 이는 환자에게 달려 있으며 치료에도 환자가 직접 기여할 수 있다. 즉 환자의 고유 생활양식과 삶을 대하는 내면의 태도, 이로부터 나타나는 행동 양식을 파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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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건반 같은 우리의 유전체
인간의 건강과 질병에 결정적인 것은 누군가가 '좋은' 또는 '나쁜' 유전자를 물려받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개별 인간의 삶 속에서 유전자의 활동이 어떻게 조절되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각 인간은 스스로 영향을 가할 수 있다.
사회적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도달할까
한 연구에 의하면, 정신적 스트레스 같은 비물리적인 사회적 경험이 우리의 몸속으로, 체세포 안으로, 유전자 안으로까지 이른다고 한다. 인간의 몸은 자신이 겪은 사회적 경험에 대해 생물학적 변화로 반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심리학적 특성이 생물학적 특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몸은 심리적인 것을 신체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삶의 자세는 유전자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담배와 술처럼 오래전부터 악명이 자자했던 악당들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결여된) 철학적 태도 또한 우리의 건강에 장기적인 해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셜 게노믹스', 우리가 사회적 존재로서 더불어 사는 방식과 공동의 삶을 대하는 사고방식이 우리의 신체적 구조에 반영된다는 뜻이다.
노년의 고독이 '위험 유전자 클럽'의 활동 패턴에 실제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렇지만 사회 친화적이고 에우다이모니아적인 태도가 내면화된 노인들의 경우는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상당히 보호된다는 것. 아울러 삶에 대한 의미 지향적 태도는 노년기 인구의 유전자 활동 패턴에 독자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에우다이모니아적 태도가 내면에 자리잡고 있으면 장기적으로 해로운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 유전자들의 활동이 줄어들었다.
자유 의지로 타인을 돕는 사람이 '이로운 유전자'를 활성화시킨다
미국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동기 부여와 집중력, 사회적 행동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관계다. 이들은 사람이 필요하다. 곁에서 동행해주고, 마음을 전해주고, 바른 길로 안내해주는 누군가가. 아이들이 허용 한계선을 넘을 때, 누군가가 애정 어린 태도로 언행을 바로잡아주고 경계선을 그어주는 일은 아이들의 성장에 매우 중요하다. 이처럼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위해 캘리포니아에서는 '제너레이션 익스페인지'라는 세대 교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자신의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느끼는지 설문 조사도 받고, 위험 유전자의 활동이 어떠한지 검사도 받았다. 설문 조사 결과, 멘토들은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삶이 의미 있다는 감정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경험을 했다. 주변 사람들과 내적으로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도 훨씬 강해졌다. 또한 멘토들의 위험 유전자 활동을 3회에 걸쳐 측정 분석한 결과, 잠재적으로 건강에 해로운 유전자들의 활동이 지속적으로 크게 감소되었다. 뚜렷하고 특징적인 위험 패턴의 감소는 3개월이 지날 때쯤부터 관찰되었다.
멘토들처럼 공공심을 키우며 타인을 자발적으로 돕는 사람들은 비단 타인에게만 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좋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 이런 사람들은 정신 건강과 삶의 질이 개선될뿐더러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심혈관 질환과 암 그리고 치매 같은 신체적 질병의 위험을 감소시키는 유전자 활동 패턴을 불러일으킨다.
자유와 자발성 없이 '좋은 삶'이란 없다
의미 지향적인 삶을 위한 노력은 결코 강요나 명령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가 진정 원해야 가능하다.
이른바 인간성 또는 인간애라 불리는 우리 내면의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 태도와 행동으로 실현된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욕망은 타인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선택한 (스스로를 향한) 사려 깊은 태도의 표출에서 기인한다.
불안과 스트레스, 질병 유발자들
만성 염증이 생기고 퍼지는 이유는 두뇌의 불안 중추의 과잉 활성화에 있었다는데, 실험 대상자의 스트레스 수준이 이에 영향을 미쳤다. 불안에 관여하는 신경 연결망의 활동이 격렬해질수록, 실험 대상의 스트레스가 심해질수록 전 신체에서, 특히 혈관 내벽의 염증 작용이 더욱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로써 인간의 신체적 측면에서 볼 때 '좋은 삶'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모든 것이다.
우리가 위기와 불공평, 부정적 감정과 갈등을 잘 다루는지, 모든 새로운 상황에서 해결책을 잘 찾아내는지, 그때마다 모든 구성원들이 불안 및 스트레스 없이 잘 살아갈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유전자는 도덕성을 만들지 않지만 선을 가능하게 한다
유전자는 '좋은 삶'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이는 우리 인간이 스스로 절대 끝나지 않는 자기 탐색 과정을 통해 알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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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의 전제 조건
사회적 소외는 심리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인간은 개인적 관점에서는 의미 지향적 삶을, 사회적 관점에서는 사회 친화적 공존의 삶을 살도록 정해진 존재다. 이 둘이 합쳐진 것이 '좋은 삶'이며,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성'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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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은 말 그대로 '중추적인' 의미가 있다. 인격은 생물학적 내면세계와 사회적 외부 세계 사이의 접점에 위치한다. 인격은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오는 자극을 수용하고 해석하며 자기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 또한 사회적 접촉을 담당한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과 외부의 사회 환경에서 조우한 것을 '경험'하며, 자기 자신과 주변 환경에 '행동'을 취한다.
각 인격은 자기 이해가 있으며 사적인 내면의 삶, 성찰하는 내적 영역이 있따. 인격은 스스로에 대해 깊이 사고할 수 있으며, 외부의 시선에 자신이 어떻게 비춰질지 상상할 수도 있다. 의미 지향적으로 살고 싶은지, 아니면 자기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를 포기할 것인지의 여부 또한 인격의 영역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이는 현재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 상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자아 연결망의 발견
인간은 모두 내면에 자기가 누구인지에 관한 생각과 신념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이처럼 스스로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마음이론이라고 하며, 전문가들은 동명의 이론으로 이를 설명한다. 우리의 이런 생각들이 얼마나 객관적인지 또는 옳은지 하는 질문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만 이러한 생각들이 존재하고, 우리가 '인격'이라 칭하는 것이 이러한 생각들을 형성한다는 사실은 '객관적'이다.
공감, 인격의 필수 요소
하지만 공동의 삶을 일구고 함께 일을 하거나 사적인 관계를 맺는 곳에서는 이 정도 표현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이런 데서는 상대방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서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인간은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물과 구별된다. 사회적 공간 속에서 우호적 공존과 연대가 가능하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기술 중 하나가 바로 공감이다. 공감에는 인지적(사고적, 지성적) 층위와 정서적 층위 그리고 행동적 층위가 있다.
공감의 인지적 층위는 다른 사람의 내면 상황을 '의식적으로' 고려하는(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리는) 능력, 행동의 동기를 유추하는 능력, 행동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능력과 관련 있다. 정서적 층위는 말 그대로 감정 이입을 하는 능력에 해당된다. 감정 이입은 주로 의식적인 통제 바깥에서 일어난다. 한 인간의 기쁨이나 슬픔 또는 고통은 보통 우리가 이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전이된다. 행동적 층위는 직관적인(대개 무의식적인) 측면과 사고적인 측면을 다 가지고 있다.
타인을 도우려는 행위는 내면의 도덕적 태도에 의해 촉진된다. 공감은 다면적인 현상이다. 또한 인지적 층위와 정서적 층위 그리고 행동적 층위가 함께 작용할 때 비로소 공감의 온전한 특성이 드러난다. 이들 세 가지 층위는 각기 다른 두뇌 활동 체계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자아는 다른 사람과 분리될 수 없다
갓 태어난 아기는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을 아직 구별하지 못한다. 생이 시작될 때 '나'와 나에게 중요한 '너' 사이의 신경세포 결합은 평생 유지된다.
우리 고유의 자아 안으로 들어와 신경적으로 엮이는 '가까운 타인'에는 우리가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가족 구성원이나 친구들은 물론이고, 본보기로 삼는 사람이나 저명한 인물 또는 존경하거나 흠모하는 정신적 스승들도 포함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인격의 신경적 표현이 친밀하거나 중요한 타인과 결합된다는 말은 우리의 자아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인간들과 결코 분이될 수 없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이 잘 지내지 못하면 우리 자신 또한 잘 지낼 수가 없다. 이러한 결합 덕분에 우리는 타인의 처지가 되어 생각할 수 있고, 타인의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우리가 타인의 입장이라면 어떨지 상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이를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말하자면 거의 자동적으로 행한다. 만약 우리가 이를 '의식적으로' 행한다면 다른 사람의 행동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 명령에는 타인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한다는 전제 조건이 내포되어 있다. 이를 풀이하면, 보편적 원칙은 나만의 관점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관점의 전환 또는 정언 명령 안에 묵시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사람들은 주요 인물과의 관계에서ㅡ아이일 때는 부모나 조부모 또는 교사나 멘토 같은 비교적 좁은 범위 내에서 택하지만 나중에는 보다 확장된 범위 안에 있는 롤 모델이나 인생의 스승과의 결합에서ㅡ겪은 가치를 내면화한다. 비록 도덕적 가치가 철학적 담론 속에서 추상화된 것이라 할지라도 가치는 여전히 관계의 산물이다. 그러면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도적덕으로 부적격하면, 특히 어린아이의 경우, 도덕적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것.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런 정신적 부모 자식 관계를 보여주는 아주 오래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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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의 인격이, '자아'가 다른 사람의 관점과 내면의 동기가 무엇인지 의식적으로 생각(상상)할 수 있는 능력은 공감의 도 가지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의미 지향적인, 에우다이모니아적인 '좋은 삶'을 바라보는 입장에선 이처럼 인지가 강조되는 첫 번째 요소가 감정에 방점이 찍힌 두 번째 요소보다 더 중요할지 모른다.
한 인간에게서 흘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공명을 일으키는 신호는 음성 및 문자 언어와 신체 언어를 모두 포함한다. 몸짓, 표정, 시선, 자세, 움직임 같은 신체 언어적 신호는 말같은 음성 언어보다 감정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한다. 공명이 일어날 때에는 대부분 음성 언어와 신체 언어가 동시에 작용한다. 그런데 둘이 엇갈리면 음성 언어보다 신체 언어가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신경세포의 공명 현상이 인간의 공존과 공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누군가에게 공명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눈빛으로 응답하거나 몸짓으로 반응하거나 말로 답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먼저 공명으로 내가 상대방을 '인식'했음을 상대가 느끼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공명을 통해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암시하는, 나의 공명에 내가 덧붙인 '추가적인 평'을 상대에게 건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이 우리에게 일으킨 공명은 '발신자'에게 되돌아가며, 이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여기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아무런 공명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잠녀 공기처럼 취급되는 것으로, 상대방이 나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거나 나를 공명할 가치가 없는 사람처럼 여기는 것이다(이 둘은 보통 한꺼번에 일어난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인간관계가 일어나는 공간에서 반사 및 공명 과정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분명해진다. 즉 공명의 상호 교환은 인간관계의 본질을 이룬다. 공명은 마치 시계 안에 들어 있는 정밀한 톱니바퀴와도 같다. 동기 부여와 생의 활력에 중요한, 인간 사이의 애정과 사랑이 대체 무엇인지 다시 질문을 던지자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부여하는 호의적인 또는 다정한 공명이라고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공명으로 응답하려면 세심함, 직감, 적당한 순간과 적절한 정도를 아는 육감이 필요하다. 타인에게 연인이나 배우자처럼 중요한 누군가가 되려 하거나 그에 준하는 신뢰 관계를 형성하려 한다면, 상대방과 공명하는 기술은 결정적인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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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특성이 아니다. 하지만 이를 발달시킨 가능성은 타고난다. 인간의 공감 능력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의 초기에 충분한 공감을 경험해야만 한다. 아이들을 공감 어린 자세로 대하는 것이 그 토대다.
애정 어린 양육 없이 공감은 없다
인간의 신생아는 운동, 감각생리, 인지적 발달이 다른 포유동물에 비하면 대략 2년 정도 뒤떨어진다. 따라서 인간의 젖먹이는 이 시기에 자기 주변 인물들과ㅡ보통 처음에는 어머니와ㅡ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유대를 맺는다. 이러한 이유로 '나'와 '너', '자아'와 '중요한 타인'같은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젖먹이에게 아직 자아가 없더라도 주변의 애착 인물들은 아기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즉 사회적 접촉을 맡아주는 담당자가 없더라도 어른들과 소통이 가능하다. 젖먹이와 애착 인물이 무의식적이자 직관적으로 계속 거울처럼 반영하며 아무런 의도 없이 서로를 아주 많이 모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사소통은 앞에서 다뤘던 것처럼 신경세포의 공명 체계를 통해 일어난다.
애착 인물은 젖먹이의 생존 표시, 움직임, 자율 신경계 자극 수준, 음성 표현에 공명한다. 애착 인물은 갓난 아기를 인식할 때 또는 직감적으로 모방할 때, 자기 고유의 시선으로 자신의 공명 반응에 무언가를 추가로, '표지'나 '평가'를 덧붙이게 된다.
젖먹이가 애착 인물에게 일으킨 공명 반응은 아기에게 감지된다. 즉 갓난아기를 돌보며 애착 인물이 보인 반응은 다시 아기에게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 전체 '놀이'는 양방향의 과정이다.
젖먹이가, 그리고 나중에는 어린아이가 자기 애착 인물에게 일으키고 또 자신에게 되돌아온 공명은 아이에게 근본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하나는 아이의 편인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먀, 다른 하나는 아이가 '누구인지'에 관한 것이다. 세심하고 다정한 공명은 아이에게 그가 이 세상에서 환영받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된다는 신호를 건넨다.
이렇게 되돌아온 공명으로 얻은 정보(그의 편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는 아이 안에 저장되며 어린 자아의 중심을 이룬다. 이 자아의 신경세포 상관자는 아이의 전두엽에서 생애 첫 2년간 자리 잡기 시작한다. 아이에게 일어난 공명의 전반적인 방향성에 따라 인격이 발달한다. 자기가 사랑받고 있으며 또 그럴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인격, 아니면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인격으로 말이다. 더하여 아이에게 저장된 공감의 경험은 후에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직접 감정 이입을 하고 또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내면의 틀로 작용한다.
생후 3년부터 아이는 타인과의 관계 및 협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데, 이때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올바른 길로 안내해야 한다. 아이의 공공심이 발달하도록, 주변 사람의 관점을 고려하도록, 그중에서도 특히 같이 노는 또래 친구의 관점을 고려하도록, 즉 기다리고 나누도록, 자기 충동을 억제하도록 가르쳐야한다. 말하자면 원활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필수적인 것들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 위층에 있는 연결망의 기능은 내면에 자기 관찰자를 세우고, 자신의 충동을 전반적으로 억제하는 능력을 정착시키는 것이다. 즉 원만한 공동체 생활에 필수적인 기능을 내부에 설치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의 공감 능력은 직접 공감을 해보는 것으로만 발달된다. 이는 단순 공감이 아닌, 아무 조건 없이 확고히 유지되는 깊은 신뢰 관계 속에서 경험한 감정 이입이어야 한다. '확실한 애착' 관계가 없으면 아이는 지속적인 불안과 걱정 속에 살게 되며, 이런 경우 아이는 공감 능력을 제대로 발달시키기가 너무나 어렵다.
아이를 교육하는 방식은 인류학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시대화 문화에 따라 달라지곤 했다.
아동 및 청소년들은 인간애로, 다시 말해 관심과 애정이 가득한 교육으로 '이루어지는' 존재다.
아이들에게 놀이를 허락해야 하는 이유
아이들의 공감 발달을 촉진하는 데 가장 간단하면서도 동시에 제일 효과적인 방식은 바로 아이다운 놀이를 하게 하는 것이다 또래들과 서로 어울려 자연스레 놀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아이가 아이다움을 누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여섯 살 이하의 아이들이 또래 친구들과 직접 어울려 놀이를 할 때는 부모나 교사 등의 애착 인물이 곁에 머물며 틈틈이 지도를 해야 한다.
즉 역할 놀이는 상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며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다른 사람의 관점을 겪어보고 느껴보고 탐색해보는 기회를 아이에게 무제한으로 제공한다. 놀이는 아이다운 공감 훈련에 제격이다.
아이들의 공감 능력을 높이기 위해 부모와 교사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책 읽어주기가 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ㅇ느 공감의 주요 요소인 사회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교육이 '좋은 삶'에 미치는 영향
그보다는 교육적인 관계의 의미를 무시하는 데 있다. 우리 서구권 국가에 사는 아동 및 청소년들은 대부분 물질적으로 충분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다. 반면 아이를 북돋우고 자극하는 인간적인 애정과 관심은 부족하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공명을 찾는 행위다.
관계 지향적인 교육은 공감과 자연스러운 권위,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 학교 차원에서 말하는 공감은 아동과 청소년들의 인격에 초점을 맞춘다는 뜻이다. 아이들의 관점을 고려하며 그들을 (시각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깊이) '바라보는' 것이다.
공동 학습 없이는 아이들이 세상을 제대로 탐구하고 세상에 몸담으며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자연스러운 권위는 엄격한 조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른 무엇보다 교사들 사이의 그리고 부모와 교육자 사이의 긴밀한 상호 협력을 요한다. 오늘날 이들 사이에는 협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교사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동 및 청소년을 진심으로 좋아해야 한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의사는 실험실이나 병리학 연구소에 머물러야지 환자들과 접촉하며 자기 생을 보내서는 안 된다.
운동, 음악, 연극, 문학과 관련된 활동은 그 무엇보다 공감 능력을 크게 향상시킨다. 스포츠를 하는 사람들은 타인과 관계를 잘 맺고 규칙을 준수하며, 타인을 격려하고 갈등을 잘 다루며, 존중과 공평을 지키고 타인을 신뢰하며, 공감적으로 행동하는 방법을 배운다. 음악을 할 때도 서로 간의 조절, 조율, 동기화, 관점의 전환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다.
문화적 삶 없이 '좋은 삶'은 없다
문화적 활동과 문화적 경험의 핵심은 인간의 창의적인 자기표현이 무한히 가능하도록 (공동으로) 기여한다는 점이다. 문화와 문화 경험 그리고 문화 행사는 공감의 심실이자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제3의 무언가(음악, 춤, 연극, 영화, 문학, 그림, 다른 예술 잡품 등)를 넘어 인간을 서로 연대하게 한다. 인간 사이의 공감은 앞서 설명했듯이 직관적 공명과 의식적 사고를 통해 상대방의 관점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드러내게 한다.
문화적 경험은 두 방향에서 공감적 관계를 일으킨다. 하나는 예술 작품과 작품 속에 숨은 예술가의 입장에서, 다른 하나는 예술 작품을 마주한 누군가(나 자신)의 입장에서.
왜냐면 그 경험이 개인의 기억이나 환상 속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함께 어울려 연주회를 열겨나 연극을 상연하거나 무용 행사를 벌이거나, 다른 사람과 같이 영화를 보는 등의 동시적 경험은 인터넷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양식이다. 서로 신체적으로 어울려 함께 경험한 상황은 신경망의 대인간 동기화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교육과 문화는 평화를 위한 동맹국
성공적인, 에우다이모니아적인 '좋은 삶'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이성과 감성이 함께 작용하고, 서로를 강화하며 원만한 사회적 공존을 위해 활발히 이바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계몽'을 궤도 위에 올리려면, 우선 교육과 지식이 문을 여는 역할을 해줘야 한다. 교육과 지식 없이는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미성숙에서 벗어날 출구'는 주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자초한 미성숙에서 우리 인간이 벗어날 출구로는 새로운 계몽 외에도 다른 두 번째 길이 있다. 즉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화적 삶이다.
인간은 공감적 관계를 맺지 못한 대상은 결국 보호하지 않는다.
자연과의 관계는 우리 인간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자연은 인간의 건강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다.
감정에 대한 내용이라 번외로 한 가지 내용을 더 소개한다.
회사에서 교육이나 워크숍 등을 자주 하지만 아이스 브레이킹은 잘 안하는 편이다. 대신 추후에 이야기를 좀 더 편하게 나눌 수 있는 방법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 감정 상태가 어떤지에 대한 이야기로 오프닝을 자주 하는 편인데, 올초부터 운영하는 12주짜리 교육에서는 감정 표현을 담고 있는 무드미터를 사용해 오프닝을 하고 있다.
100가지 감정 표현을 담아낸 무드미터는 각각의 표현들이 자주 쓰지 않거나 '이 표현이 감정이었구나' 싶은 것도 있다. 오프닝을 한답시고 "이 자리에 와서 지금 기분이 어때요?"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좋아요"같은 대답을 하는 것보다, 무언가 볼 수 있는 자료가 있고 그 안에서 나의 감정이 어떤지 잠시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갖는건 그 이후에 말로 꺼낼 내용의 밀도가 달라진다.
지금 운영 중인 교육에서도 지난 워크숍 오프닝에 무드미터를 사용했더니 호응도 좋았고, 참석자 중 조직장들은 이걸 가져가서 조직원들과 같이 해봤다는 피드백을 많이 남겨주었다. 이성적인 이야기만 난무하는 회사에서도 아주 약간의 감정 표현을 섞어내어 일하는 분위기를 좀 더 유하게 만들 수 있다. 처음 해본다면 멋쩍겠지만 처음만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