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생각하지마, 조지 레이코프
이 책은 사실 제목과 표지만 보면 정치색이 뚜렷해 보여서 편견이 생길 수 있을 만한 책이다.
하지만 제목에 있는 저 코끼리가 공화당의 코끼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심리학에서 마음의 작용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구로, "방 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커다란 문제를 의미함)"라는 관용구에서 유래된 것이다. 저자가 인지 언어학자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심리학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를 인용한 것이 이상하지 않지만, 본인의 이론을 정치로 풀어내면서 이런 제목을 붙인 것은 센스 만점이라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언어학자가 쓴 책이라 그런지 책을 읽는 내내 문장이 탁월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번역본이 이 정도인데 원서는 얼마나 더 좋을까 싶어 봤더니 훌륭했다. 최근 주변에 글쓰기나 말하기를 배우러 다니는 지인들이 여럿 생겨서 이 책을 추천했다. 콘텐츠는 배제하더라도 문장이 좋아서 한 번쯤 읽어보면 좋겠다고.
재작년에 서평 써달라고 요청받았던 프레임 대 프레임이라는 책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를 상당 부분 인용하고 있던 터라 오리지날을 읽어야지 하다가 이제야 읽었다. 하지만 그 덕에 개정판을 읽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책에서는 미국에서 공화당이 항상 우세하는 이유를 프레임 이론에 근거해 설명하며 프레임 이론이 무엇인지 풀어내고 있는데, 초판에 추가되어 새로 들어간 내용도 많고 뒷부분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되어 있다.
내가 어쩌다가 이 책을 읽게 됐는가 하면, 개인의 경험과 태도는 언어 구조의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 분이 저분이기 때문이지.
그렇다. 저자 조지 레이코프 선생님은 인지 언어학자이다.
정권이 바뀌었고, 미투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이 타이밍에 딱 읽기 적절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펼친 책 첫 장에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우리는 구체적인 뇌로 생각한다. 여기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몇몇 정치인들은 신체의 다른 부분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도 뇌로 생각한다."
안 그래도 동료와 회사에 웬 이상한 자들이 많다는 얘길 하고 있었는데, 저 문장에서 정치인을 그 어떤 다른 역할자로 바꿔도 말이 되는 것을 보고 '푸핫'하고 웃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주로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개념을 갖추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중 매체에 충분히 노출만 된다면, 자유주의 진영에 '부분 출산 낙태'에 상응할 만한 마법의 슬로건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어만 결여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는 개념이 결여된 것입니다. 개념은 프레임이라는 형태로 떠오릅니다.
보수주의자는 세금을 내는 것이 고통이라는 이미 자리 잡은 프레임에 호소하는 데 '세금 구제'라는 짧은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상대편에게는 확립된 프레임이 없습니다. 물론 그래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기존의 프레임도 이미 자리 잡은 개념도 전혀 없기 때문에 품이 훨씬 많이 듭니다.
인지과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가 있습니다. 바로 '저(低)인지(hypocognition)'입니다. 이 용어는 필요한 생각의 부재, 즉 한두 단어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비교적 단순하고 고정된 프레임이 결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 01. 어떻게 공론을 우리 편으로 만들 것인가
다른 한 가지 오해는, 어떤 현실에 대한 사실을 우리가 모종의 효과적인 방법으로 제시하면 사람들이 그 현실에 '눈떠서' 개인적 견해를 바꾸고 사회변화를 위해 정치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리라고 믿는 것이다. 마치 사람들이 '잠들어 있어서' 각성만 시켜주면 곧 자기 주변 세상을 보고 이해하기라도 할 것처럼, "왜 사람들은 눈뜨지 못할까요?"라며 불평한다. 하지만 사실은 어떤 생각이 우리 뇌 안에 깊이 주입되어야 한다. 즉 우리의 이해에 맞춤한 프레임이 생겨나기까지 시간을 들여 꾸준히, 정확히 계발되어야 한다.
연금을 예로 들어보자. 심지어 연금을 옹호하는 이들조차 이를 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하사하는 '부가적' 혜택으로 흔히 프레임에 넣곤 한다. 하지만 연금이 무엇인가? 연금이란 이미 제공한 노동에 대한 지연된 급여다. 취업 조건의 하나로서 연금은, 내가 벌어들인 급여의 일부를 고용주가 나중에, 나의 퇴직 이후에 지급하기 위해 떼어다 투자해둔 돈이다. 그러니까 고용주가 "우리는 당신 연금을 지급할 돈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내가 번 돈을, 즉 계약서상으로 그가 내게 지불할 책임이 있는 돈을 그가 횡령했거나 훔쳤거나 낭비해버린 것이다. 고로 이 고용주는 도둑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중대한 주제를,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야 할 중요한 진실을 인지하고도 왜 이를 말하지 않고 자신의 일상 담론의 일부로 만들지 않을까? 그 이유는, 대개의 경우 사람들에게 무슨 대단한 말을 한다고 해서 그 말이 그들이 매일 사용하는 신경 회로가 되지 않으며, 기존의 신경 회로망과 수월하게 들어맞는 새로운 신경 회로가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기존의 신경 회로망에는 그들이 이전에 가졌던 이해 및 담론 형태가 정의되어 있다.
대중이 들을 준비가 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는 것, 그 전에 수백 번 반복되지 않았던 것을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 02.프레임 밖에 있는 것을 어떻게 프레임에 넣을 것인가
허리케인 샌디의 정확한 세부적 특징은 사전에 예측할 수 없었다. 이는 흡연자가 언제 폐암에 걸릴지, 피임 없는 섹스로 언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될지, 음주 운전자가 언제 사고를 낼지, 혹은 이러한 일들이 발생할지 안 할지를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유기적 인과관계의 인과적 성격만은 부인할 수 없다.
의미론은 중요하다. 원인이라는 말이 흔히 직접적 원인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많은 경우 기후 학자들은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특정한 허리케인, 가뭄, 산불의 원인을 지구 온난화에 돌리기를 기피한다. 유기적 인과관계에 맞는 개념인 프레임과 언어를 갖추지 못한 탓에, 기후학자들은 모호한 표현 뒤에 숨음으로써 의사 전달의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제임스 핸슨, 마키코 사토, 레토 루디가 집필하여 <미국국립과학원회보>에 게재한 논문 '기후 변화에 대한 인식(Perception of Climate Change)' 중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 우리는 2011년 텍사스와 오클라호마, 2010년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이변과 같은 극단적 이상 현상들이 지구 온난화의 결과라고 높은 수준의 신뢰도로 말할 수 있다. 지구 온난화가 부재할 경우 이런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극도로 적기 때문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단어들은 '이상 현상, 결과, 높은 수준의 신뢰도, 부재, 가능성, 극도로 적다' 다. 이 모호한 학술적 표현들이다! 이들 사이에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즉, 인과관계)이 품은 힘은 사라져버렸다.
이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지구의 운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 과학은 탁월하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의사소통 능력이 부족하다. 언어가 없으면 생각은 표현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유기적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타격을 가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 04 유기적 인과관계
과학자들은 흔히 팩트(fact)에 근거해야 한다는 이유로 모호하고 긴 설명을 덧붙이며 일반인들로 하여금 판단을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앞서 저자가 언급했던 것과 같이 '원인'이라는 말이 흔히 직접적 원인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직접적 인과관계'가 있는 경우에만 '원인'이라는 표현을 써야한다고 믿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진보주의자들은 사회 전체가 물질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을 도울 책임이 있으며 세금으로 지원받는 정부가 그 주된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한편 보수주의자들은 비정부 기관을 통한 자선을 선호하며, 물질적으로 부족한 이들에 대한 원조를 거부하는 것이 그들을 진정으로 돕는 길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보수 세력의 모토는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물고기 낚는 법을 가르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다.
이 이분법은 이상적 인간이 어떠해야 하며, 순수하게 보수적이든 순수하게 진보적이든 둘의 알맞은 조합이든 '올바른' 도덕 체계를 지닌 이상적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 우리 정치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에 대한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생각으로 이어진다.
- 05. 정치와 인성
진보가 추구하는 큰 맥락에는 동의하지만, 세세하게 '복지'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여러 가지가 불편했던 게 이 지점일까 싶다. 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쪽인데, 자꾸 물고기를 잡아서 구워서 입에 넣어까지 주니까.
민주당이 저지른 중요한 실수 중 하나는 선거운동에만 주력하고 공적 담론의 지속적인 프레임 구성에는 신경쓰지 않은 것이다. 모든 정치는 도덕적이다. 유권자들은 자신들이 암묵적. 자동적. 무의식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에 따라 투표한다. 요컨대 선거는 이중개념 소유자들이 어떻게 해서 어느 한쪽의 도덕적 전망을 취하게 되느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선거는 유권자들이 선거운동 기간뿐 아니라 일상에서 매일 접하는 언어와 이미지에 좌우된다.
보수 세력은 자유와 해방이라는 단어를 소유하기에 이르렀다. 이 두 단어는 보수의 단어장에서 묵직한 비중을 차지한다. 자유는 민주주의의 중심 개념이므로, 이 둘은 우리 정치에서 가장 막강한 단어에 속한다. 보수 세력은 이 두 단어를 소유할 권리가 없다.
- 07. 자유의 문제
건강보험
코미디언 지미 킴멜은 자기 쇼의 제작진 중 한 명에게 마이크를 들려 로스앤젤레스 길거리로 내보낸 다음 행인들에게 간단한 질문을 하게 했다. '오바마케어'와 '저렴한 건강보험법' 중에 어느 쪽을 더 선호하십니까? 압도적 다수가 자기는 오바마케어는 싫지만 저렴한 건강보험법은 좋은 아이디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들 대부분은 이 두 개가 같은 법안임을 알지 못했다. 결국 명칭이 달라지면 일반적으로 그 지시물도 달라진다.
어떻게 그들은 오바마케어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받게 되었을까?
2008년 당선되고 아직 취임하기 전에, 오바마는 새로운 건강보험법에 어떤 조항을 넣을 때 가장 인기가 있을지를 알아보기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중 60~80퍼센트의 지지율을 기록한 조항은 가입 조건 철폐, 한도액 철폐, 대학생 나이의 자녀도 부모의 피부양자로 가입 가능 등의 익숙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정책의 주요 항목이 되었다. 모든 주요 항목에 대한 지지율이 높으면 정책 전체에 대한 지지율도 높으리라고 가정했다. 다시 말해 정책의 지지율은 당연히 그 정책 내 세부 항목의 지지율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 어떤 보수주의자도 이렇게 인기 있는 조항을 공격하지 않았다. 보험 가입 조건이나 한도액을 유지하자고 주장하거나, 대학생 자녀의 피부양자 등록에 반대하는 보수주의 운동도 없었다.
그 대신 보수 세력은 정치가 도덕성의 문제임을 이해하고 도덕을 근거로 삼아 이 제도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들은 '자유'와 '생명'이라는 두 도덕적 영역을 택했다. '자유'와 관련하여 그들은 이 제도가 '정부의 [보험산업] 장악(government takeover)'이라 공격했고, '생명'과 관련해서는 이 제도에 '사망선고위원회'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몇 달에 걸쳐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이는 정부가 [보험을] 장악하자는 게 아닙니다.'하고 말할 때마다, 그는 정부의 장악이라는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청중의 뇌 속에서 정부의 장악이라는 생각을 활성화하고 결국 보수 세력의 공격을 더 강화해주었다.
또 보수 세력은 '저렴한 건강보험법'이라는 명칭을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오바마케어'라는 자기들만의 명칭을 고안해냈다. 그래서 건강보험의 '저렴함'에 대한 강조를 증발시키고, 오바마케어를 정부의 장악 및 사망선고위원회와 결부했다. 언론은 보수의 공격을 인용하면서 저렴한 건강보험법이라는 투박한 명칭 대신 오바마케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결국 오바마는, 오바마케어는 "오바마가 케어한다."는 뜻이라고 말하면서 이 명칭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전환하려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보수주의자들이 충분히 잦은 반복을 통해서 이 명칭에 자신들이 원하는 의미를 부여해 놓았기 때문이다.
- 07. 자유의 문제
노조와 연금
노동자는 이윤을 창출하는 사람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부유한 기업주와 투자자들이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말하길 좋아한다. 마치 실업자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일자리를 만들기라도 하는 양, 보수주의자들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준다'고 말하길 좋아한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사실은 노동자들이 이윤을 창출하며, 기업주와 투자자의 이윤에 기여하지 못하면 아무도 고용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연금은 이미 수행한 노동에 대한 지연된 급여다. 이는 연금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진실이며, 거의 전혀 언급되지 않는 진실이기도 하다. 이는 프레임에 넣어지지 않은 진실이다.
안타깝게도, 연금에 쓰일 돈은 기관이 유용하거나 잘못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 돈을 잘못된 곳에 투자하기도 하고, 주주 배당금이나 경영진 봉급 등 모종의 다른 목적에 쓰기도 한다. 그러므로 회사나 시청이나 주 정부가 연금을 지급할 '여력'이 없다고 말할 때 그들은 절도에 가담한 것이며 절도범들은 기소해야 한다.
이 돈은 노동자가 일해서 번 돈이다. 이 돈이 어떤 다른 목적에 쓰였다면 이는 도둑맞은 것이다. 이 돈을 잘못 투자했다면 그 투자 손실은 회사의 몫이며, 연금 수령자들은 회사의 자산에 대해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에는 프레임 구성이 개입한다. 연금과 건강보험은 마치 피고용인들에게 주어지는 너그러운 선물인 양 '혜택(benefits)'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선물이 아니다. 이는 이미 수행한 노동에 대한 지연된 급여로서 노동자들이 일해서 번 것이다. 회사가 이런 '너그러운 혜택'을 더 이상 감당할 여력이 없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뒤 그것을 삭감할 때, 이는 프레임에 넣은 거짓말이다. 원인이 절도이든 투자 실수이든 경영상의 잘못이든 그 '혜택'은 직원들이 일해서 번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 07. 자유의 문제
개념적 은유는 법적 지위를 가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수천 개에 달하는 은유를 써서 사고하지만, 법은 이러한 은유에 법 그 자체 내의 공식적 역할을 드러나게 부여하지 않는다. 은유적 사고는 사방에 편재하지만 법에 관련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는 무의식 차원의 개념적 은유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것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일정한 결과를 야기한다. 법과 인간의 뇌/정신 사이의 이 불일치는 프레임이 구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적 의식이나 담론의 일부가 아니다.
- 09. 기업의 지배
결혼이 이성애적이라는 생각은 널리 퍼져 있는 문화적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이 고정관념을 불러내는 데는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전에 극우들은 게이 결혼(gay marriag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요즘엔 호모섹슈얼 결혼(homosexual marriage)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한 가지 이유는 '결혼'이란 단어가 '섹스'라는 개념을 불러일으키고, 미국인들 대다수는 이성애가 아닌 섹스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결혼은 이성애적 고정관념을 취하고 있다. 우익에게 '게이'란 거칠고 일탈적이며 성적으로 방종한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게이 결혼이라는 말은 양날의 칼과 같다. 부시 대통령은 국정 연설에서 게이 결혼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나는 그가 이 단어를 일부러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시의 입장에서 '결혼'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한다고 정의되며, 따라서 게이 결혼이라는 말은 모순 어법이고 '게이 사과'나 '게이 전화'라는 말만큼이나 무의미하다. 게이 결혼이란 말이 많이 사용될수록 동성 결혼이라는 개념은 더욱 더 정상적인 쪽으로 변화할 것이며, 결혼의 정의가 동성 결혼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문법은 중요하다. 문법적으로 게이는 결혼의 종류를 한정하는 수식어다. 여러분이 이 표현을 이해한다면 이는 용어상 모순이 아니며, 결혼의 정의는 게이를 배제하지 않는다.
- 10. '결혼'은 수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
나는 진보주의의 가치야말로 바로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라고 믿는다. 또 진보주의의 가치야말로 미국의 근본적인 원칙이며, 진보주의의 정책 방향은 미국인 대부분이 우리나라가 가길 바라는 바로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믿는다. 단결한 진보주의자들이 할 일은 진실로 미국을 그 가장 훌륭한 전통적 가치 위에 바로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가치를 공유한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러한 가치는 대부분 무의식적이고 입 밖으로 나오는 일도 드물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는 입 밖으로 내어 말하고 이름을 붙이고 퍼뜨리고 논의하고 공표하고 일상의 공적 담론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보수적 가치들이 공적 담론을 지배하는 동안, 진보적 가치는 회자되지 않으면, 사라져버리고 만다. 즉 보수적인 거대 미디어 기업에 의해 우리 뇌에서 휩쓸려 나가버린다.
- 14. 진보를 하나로 묶는 것
정치판을 보면 처음엔 같은 편을 먹고 친한 척 굴지만,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그 안에서 또 양극단으로 나뉘어 싸우길 반복한다. 애초에 같은 편이라는 게 생길 수 없는 구조다.
몇 년 전 육룡이 나르샤라는 조선 건국에 대한 사극을 했었는데,(물론 유아인 때문에 봤지만) 고려의 적폐청산을 위해 조선 건국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방원과 정도전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조선 건국 이후에는 서로가 추구하는 구체적인 항목의 방향성이 맞지 않으니 둘이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가 결국엔 누구 한 명을 죽이고서야 끝이 나는 스토리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더랬다.
'도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까지 싸워야하는거지. 어차피 다 사람 사는덴데.'
난 정치 얘기가 나오면 항상 육룡이 나르샤부터 생각난다.
업무가 바뀌고 환경이 달라지면 MBTI 검사를 받곤 하는데, 처음으로 MBTI 검사를 받았던 건 입사 2년 차 때였다.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는지 궁금해서 상담을 받으면서였다. 몇 가지 심리검사를 받았는데, 그중 MBTI 결과지를 보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개 항목의 수치가 가운데에 모여있었다. 선생님은 각 수치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주시며 수치가 양극단으로 크게 나타날수록 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고 가운데에 모여 몇 이하면 분명하지 않다는 표현을 했던 것 같다.
"그럼 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의미인가요? 박쥐?"
"그것보단 양쪽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좋겠네요."
생각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양쪽 성향을 다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큰 맥락에서는 일관된 행동처럼 보이겠지만, 시간 단위로 뭘 하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부 행위의 일관성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진보와 보수라는 단어는 정치에서 주로 쓰이는 단어라 이것도 프레임일 테지만, 하여간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상황에서는 보수적인 성향이 드러나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진보에 더 가까운 성향이 드러날 수 있다.
그건 박쥐 같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나 다 내면에 두 가지 성향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활성화되는 영역과 정도와 상황이 다른 것일 뿐.
내가 가진 내 두 가지 성향이 각각 어떤 상황에서 더 짙게 표출되는지, 기저에 어떤 생각을 근거로 그 성향이 나오는지를 알면 좀 더 밸런스 있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18년 4월 첫 번째 책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