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수업, 한동일
이 책은 마치 언어에 대한 내용인 것 같은 제목을 장착하고 있지만 '어떻게 잘 살아갈지'에 관한, 삶의 태도에 관한 내용이다.
역시 교수님이셔서 그런지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듯한 말투를 간간이 느꼈는데, 재밌는 건 그게 잔소리같이 느껴지지 않더라. 군데군데 자기반성이 적힌 것을 보며 일기를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로마인의 욕설이라는 챕터를 읽다가 웃음이 터져서 '아.. 굉장히 인간미도 넘치시네.'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회사에서 사람들과 팀을 코칭하여 조직이 성장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어떻게 하면 나와 내 동료들이 좀 더 행복하게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지,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일 방법을 고민하는 일이다.
사람들을 코칭한다는 건 일종의 가르침을 주는 일이지만 '이렇게 해야 합니다' 같은 투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조직 안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 대부분은 새로운 방식으로의 전환을 겪어내야 하는,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무언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이미 익숙한 내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많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스스로 삶에 있어서 처음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에겐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서로가 발전하는 관계로서 지속할 수 있을 테니.
그리고 난 처음을 겪어내는 그들이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만 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고, 개인이 개인으로서 그리고 함께 있을 때조차 본인의 역할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게 내 역할이라고 스스로 포지셔닝했다.
우리 모두 회사에서 월급받는 월급쟁이지만, 회사 안에서 잘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삶을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지식, 즉 '어떤 것에 대해 아는 것' 그 자체가 학문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앎의 창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학교와 집에서 "공부해서 남주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할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사회를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 일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착취당하며 사회구조적으로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는 무신경해요.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모른 척하기 일쑤입니다.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들여 공부를 한 머리만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기 때문에 그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꿈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공부한 사람의 포부는 좀 더 크고 넓은 차원의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기보다 더 많은 사람, 더 넓은 세계의 행복을 위해 자기 능력이 쓰일 수 있도록 하겠다는, 한 차원 높은 가치를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과 달라야 하는 지점은 배움을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쓰느냐 나눔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워서 남 주는' 그 고귀한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성인이 아닐까요?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인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을 나누고 실천할 줄 모르면 지성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공부를 해나가는 본질적인 목적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왜 공부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공부하는가?' 스스로 되묻습니다.
- p.48-57,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운다 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
사회는 어느 세대에든 답을 요구합니다. 20대는 어때야 하고 30대는, 40대는 어때야 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공자도 이야기했죠. 30세는 이립, 책임지는 나이이고 40세는 불혹,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요? 어느 세대든 다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책임지는 것은 어느 나이든 다 어렵습니다. 지천명,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할 50세에도 여전히 세상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60세는 이순이라 하여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공감한다는데 어디 그렇습니까? 나이를 먹고도 이해도 공감도 못하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봅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답이 맞다고 하기에는 세상은 급변하고 갈수록 그 속도를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어제의 답이 오늘은 답이 아니게 되고, 오늘은 답이 아닌 것도 내일은 답이 될 수 있는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어제의 메리툼(장점)이 오늘의 데펙투스(단점)가 되고, 오늘의 데펙투스가 내일의 메리툼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 없죠. 우리는 무엇 하나 명확히 답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스스로를 살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메리툼이고 데펙투스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성찰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곁가지를 뻗어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내 안의 땅을 단단히 다지고 뿌리를 잘 내리고 나면 가지가 있는 것은 언제든 자라기 마련입니다.
- p.58-66 장점과 단점 Defectus et Meritum
좋은 수업도 한 편의 좋은 영화, 심금을 울리는 한 곡의 노래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수업에서 다루는 지식이 학생들의 삶의 어느 부분에 밀접하게 맞닿아 있어야 하고, 어떤 지식에 대해 학생 스스로 관심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확장시킬 여지를 던져줘야 합니다. 단순히 지식 그 자체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활용할 방법에 대해 성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라틴어의 성적평가에 쓰이는 표현을 단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Summa cum laude 숨마 쿰 라우데 최우등
Magna cum laude 마냐/마그나 쿰 라우데 우수
Cum laude 쿰 라우데 우등
Bene 베네 좋음/잘했음
평가 언어가 모두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잘한다/보통이다/못한다' 식의 단정적이고 닫힌 구분이 아니라 '잘한다'라는 연속적인 스펙트럼 속에 학생을 놓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겁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스펙트럼 위에서라면 학생들은 남과 비교해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발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남보다' 잘하는 것이 아닌 '전보다' 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타인의 객관적인 평가가 나를 '숨마 쿰 라우데'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숨마 쿰 라우데'라는 존재감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낮추지 않아도 세상은 여러 모로 우리를 위축되게 하고 보잘것없게 만드니까요. 그런 가운데 우리 자신마저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대한다면 어느 누가 나를 존중해주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스스로에, 또 무언가에 '숨마 쿰 라우데'입니다.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으며 세상의 기준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다보면 초라해지기 쉬워요. 하지만 어떤 상황에 처하든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일으켜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에는 그런 사람이 한 번도 초라해져본 적 없는 사람보다 타인에게 더 공감하고 진심으로 그를 위로할 수 있는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 p.67-79 각자 자기를 위한 '숨마 쿰 라우데' Summa cum laude pro se quisque
그런데 겸손한 사람이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겸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실패의 경험에 대해 지나치게 좌절하고 비관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실패한 나'가 '나'의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건 자기 자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자만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한 번의 실패는 나의 수많은 부분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쉽게 좌절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못 이해한 겁니다. 우리는 실패했을 때 또 다른 '나'의 여집합들의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 여집합들이 잘해낼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하죠. 이렇게 자신이 가진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하고 나아가는 것이 겸손한 자세가 아닐까요?
사실 인생은 자신의 뜻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중 많은 문제가 우리를 괴롭히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아마도 계속 그럴 겁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그것은 그것이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한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건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냥 해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과 내가 할 일을 구분해야 해요. 그 둘 사이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또한 벗어났다고 해서 다시 빠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늘 들여다보고 구분 짓고 빠져나오는 연습을 해야 해요. 사실 학생들이나 어른들이나 잘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삶이 그런 것인데도 사람들은 종종 착각해요. 안정적인 삶, 평온한 삶이 되어야 그때 비로소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요. 이것은 착각입니다. "지금 사정이 여러모로 안 좋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이 일을 혹은 공부를 할 수 없어. 나중에 좀 편안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 본격적으로 할 거야"라고 하지만 그런 시간은 잘 오지 않아요. 아니,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왔다고 하더라도 이미 필요가 없거나 늦을지도 모르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갈등과 긴장과 불안의 연속 가운데서 일상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평안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삶이기도 하고요. 결국 고통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의 표시입니다. 산 사람, 살아 있는 사람만이 고통을 느끼는데 이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모순이 있는 소망이겠지요. 존재하기에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 p.80-91 나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Ego sum operarius studens
오늘날 이 명문을 우리 일상과 접목하면 "인간이 원하고 목표하던 사회적 지위나 명망을 취한 뒤 느끼는 감정은 만족이 아니라 우울함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허무함을 느낍니다. 대중의 갈채와 환호를 받는 연주자나 가수가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이 문장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법의학 교수님은 이 문장을 말하면서 연예인들이 쉽게 향정신성 의약품에 노출되는 환경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우울을 느끼게 되는 위치까지 올라가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공부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공부, 그거 별거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공과 실패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그것에 대해 논한다면 그 말에 무게가 실릴까요?
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지 않은 사람이 "그것쯤이야"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말에서 어떤 진정성도 느낄 수 없을겁니다.
또한 그 달리기 끝에서 느끼는 우울함이나 허망함과 같은 감정들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거다'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달려갔다가, 막상 이루고 나서야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기도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달려본 사람만이 압니다. 또 그게 내가 꿈꾸거나 상상했던 것처럼 대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만큼 불필요한 집착이나 아집을 버릴 수도 있어요. 그만큼 내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겁니다.
p. 130-137 모든 동물은 성교 후에 우울하다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Si veles bene est, ego valeo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되었네요. 나는 잘 지냅니다.
Si veles bene, valeo
당신이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
"그대가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라는 로마인의 편지 인사말을 통해 생각해봅니다. 타인의 안부가 먼저 중요한, 그래서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는 그들의 인사가 문득 마음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내가 잘 살 수 있다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요즘 우리의 삶이 위태롭고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사실 우리의 사고가 어느새 그렇게 변해버린 건 사람들의 마음이 나빠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낼 여유가 점점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숨 쉴 틈이 없고 각박해지니 '함께'하기보다는 '혼자' 편하기를 선호합니다. .. 이런 경향이 사회적으로 점차 증가하는 것은 그것이 마냥 좋기만 해서는 아닐 겁니다.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하다보면 '함께', '더불어'를 피곤하고 부담스럽게 느낄 정도로 지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거에 비해 '더치페이' 문화가 자연스러워졌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내 돈 내고 밥 먹으면서 편치 않은 게 싫고, 홀로 할 때보다 함께할 때 비용이 더 드는 것도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내 주머니 사정에 맞게 꼭 필요한 것에만 쓰고, 내가 먹고 싶을 때 내가 술 마시고 싶을 때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즐긴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죠.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긍정적 의미에서든 부정적 의미에서든 공동체 의식이 강한 한국인의 의식이 큰 전환기를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이 불의한 시대를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처럼 회자되는 것은, '혼족'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현실을 드러내줍니다.
- p.138-147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되었네요. 나는 잘 지냅니다. Si veles bene est, ego valeo
어머님은 유품을 통해 죽은 육신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향시로운 기억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때 문득 인간은 죽어서 그 육신으로 향기를 내지 못하는 대신 타인에 간직된 기억으로 향기를 내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 기억이 좋으면 좋은 향기로, 그 기억이 나쁘면 나쁜 향기로 말입니다.
- p.148-158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Hodie mihi, cras tibi
'카르페 디엠'은 원래 농사와 관련된 은유로서 로마의 시인인 호라티우스가 쓴 송가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시구입니다.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오늘을 붙잡게, 내일이라는 말은 최소한만 믿고.
시의 문맥상 '내일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고 오늘에 의미를 두고 살라'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숱한 의역을 거쳐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으로 정착되었는데, 주목할 건 이 말이 쾌락주의 사조의 주요 표제어가 되었다는 겁니다.
호라디우스가 속했던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주의를 지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들이 추구한 쾌락은 세속적이고 육체적이며 일시적인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인 쾌락, 다시 말해서 충만한 삶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영혼의 평화로운 상태, 동양식으로 표현하자면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호라티우스의 '오늘을 즐겨라'라는 의미도 당장 눈앞의 것만 챙기고 감각적인 즐거움에 의존하여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매 순간 충만한 생의 의미를 느끼면서 살아가라는 경구입니다.
인간은 오늘을 산다고 하지만 어쩌면 단 한순간도 현재를 살고 있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한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때와 오늘을 비교합니다. 과거의 한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때와 오늘을 비교합니다. 미래를 꿈꾸고 오늘을 소모하죠. 기준을 저쪽에 두고 오늘을 이야기합니다. 그때보다, 그때 그 사람보다, 지난번 그 식당보다, 지난 여행보다 어떤지를 이야기해요. 나중에, 대학 가면, 취직하면, 돈을 벌면, 집을 사면 어떻게 할 거라고 말하죠.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불행하게 사는 것도, 과거에 매여 오늘을 보지 못하는 것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요? 10대 청소년에게도, 20대 청년에게도, 40대 중년에게도, 70대 노인에게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때이고 가장 행복해야 할 시간이에요. 시인 호라티우스와 키팅 선생의 말은 내게 주어진 오늘을 감사하고 그 시간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보내라는 속삭임입니다.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을 보장할지 장담할 순 없지만 오늘을 행복하게 산 사람의 내일이 불행하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카르페 디엠, 오늘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 p.159-164 오늘 하루를 즐겨라 Carpe Diem
이곳이 캐사르가 암살당한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법의학 수업 때였습니다. 캐사르가 브루투스 외의 여러 사람의 칼에 찔려서 자상으로 사망하려면 몇 사람이 동시에 어떤 자세로 찔러야 가능한가에 대한 수업이었습니다. .. 하지만 제 귀에는 더 이상 어떤 자세로, 몇 번의 가격으로 사람이 죽는가 하는 수업 내용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캐사르가 암살당한 역사적인 장소가 제가 늘 무심히 지나다니던 곳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석사와 박사과정 기간과 사업 연수원 1, 2년차에는 마로니타 기숙사에서 생활했습니다. 이 기숙사는 로마의 주요 관광지의 중심에 있었는데 스페인 광장과 트레비 분수, 로마의 영화 거리인 비아 베네토,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까지, 세계적인 명소들이 제가 일상적으로 오가는 길목에 있었어요. 하지만 정작 저는 큰 관심이 없었어요.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정말 관심이 없었다기보다 마음의 여유가 너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해야 할 공부, 해야 할 일만 생각하기에도 벅찰 때였고, 그런 명소에서조차 감흥을 느낄 새가 없었던 겁니다.
Tantum videmus quantum scimus.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사람은 자기 삻을 흔드는 모멘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힘은 다양한 데서 오는데 그게 한 권의 책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한 장의 그림일 수도 있고, 한 곡의 음악일 수도 있습니다. 또 이렇게 잊지 못할 장소일 수도 있고요. 그 책을 보았기 때문에, 그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그 장소를 만났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눈뜨게 되고 한 시기를 지나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모멘텀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을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깨어 있고 바깥을 향해서도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죠. .. 한 순간 스치는 바람이나 어제와 오늘의 다른 꽃망울에서도 우리는 인생을 뒤흔드는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 p.206-216 아는만큼 본다 Tantum videmus quantum scimus.
종교란 무엇일까요? 저는 종교란 마치 한 무리의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정원과 같다고 생각해요. 여기에는 모든 종교를 통틀어 '종교'라는 아주 큰 정원과 각각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작은 정원이 있어요. 그리고 그 안에는 종과 수가 다른 식물들이 어떤 제한된 범위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죠. 취향과 생각이 제각각인 식물은 동일한 정원에 뿌리를 내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각각의 작은 정원에는 같은 생각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식물들만이 공존할 수 있는게 아닐까요? 각자 자기가 뿌리 내리고 있는 그 정원만 옳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는 더 큰 정원, 나아가 자연이라는 더 큰 세상 속에 살고 있기도 합니다. 정원 안에서 정원 밖을 꿈꾸며 살기도 하고요.
정원과 달리 자연에는 잡풀과 잡목이 따로 없습니다. 정원 안에서는 각각의 생각과 가치관에 어울리지 않는 식물들은 뽑아내야 할 잡초에 불과하지만 더 넓은 자연에서는 그 어느 것도 잡풀, 잡목인 것이 없습니다. 제각각의 정원들이 자기들의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더 넓은 자연에서는 '틀렸다'가 아니라 '다르다'라는 것, '틀린 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습니다. 그런 자연 같은 분위기가 조성될 때에야 비로소 진리는 진리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요?
- p.244-252 진리에 복종하라! Oboedire Veritati!
"모든 사람은 상처만 주다가 종국에는 죽는다." 인간은 정말 타인에게 상처만 주다가 가는 걸까요? 제가 누군가로부터 상처받고 온 어느 날 밤에 제가 상처받은 내용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처음엔 제게 상처 준 사람에게 마음속 깊이 화를 내고 분노했어요. 그의 무례함에 섭섭한 감정을 넘어 치욕을 느끼기도 했고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가 과연 나에게 상처를 주었나?'하고요.
제 마음을 한 겹 한 겹 벗겨보니 그가 제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행동과 말을 통해서 제 안의 약함과 부족함을 확인했기 때문에 제가 아팠던 거예요. 다시 말해 저는 상처받은 게 아니라 제 안에 감추고 싶은 어떤 것이 타인에 의해 확인될 때마다 상처받았다고 여겼던 것이죠. 그때부터 저는 상처를 달리 생각하게 됐습니다. 대부분 스스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주다가 자기 자신이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마음에는 철도의 선로와 같은 길이 놓여 있어요. 우리가 타인을 통해 자기 안의 약함을 확인할 때마다 마음속의 선로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모든 잘못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어떤 사람은 모두 자기 탓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때로는 마음에도 선로 전환기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로 인해 상처받았을 때, 그래서 내 안의 약함을 볼 때 기차가 '내 마음의 역'으로 향할 수 있도록 선로 전환기를 작동하는 것이죠. 이게 올바로 작동해서 상처를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 p.253-259 모든 사람은 상처만 주다가 종국에는 죽는다 Vulnerant omnes, ultima necat
Nolite ergo esse solliciti in crastinum crastinus enim dies sollitus erit sibi ipse sufficit diei malitia sua.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의 고통과 절망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디엔가 끝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마침표가 찍히기를 원하지만 야속하게도 그게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끝이 날 거라는 겁니다.
1241년 이규보가 <동국이상국집>에서 "부처님 말씀에 본래 얻고 잃는 것은 없고 잠시 머물 뿐"이라 했습니다. 불가에서 완전이란 없어요. 진정한 완전이란 완전의 상태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웃고 울 일들이 일어나고 또 지나가고 그렇게 반복해가는 것일 겁니다. "완전이란 이미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라 시시각각 새로운 창조다"라는 말은 그래서 생각해볼 만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기쁘고 행복한 그 순간에는 최대한 기뻐하고 행복을 누리되, 그것이 지나갈 때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 웃을 수 있는 순간을 위해 지금을 살면 됩니다. 힘든 순간에는 절망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분노를 잠시 내일로 미뤄두는 겁니다. 그 순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보는 것이죠.
- p.270-275 이 또한 지나가리라! Hoc quoque transibit!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잔잔한 울림이 일었다. 모든 내용이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이 부분이다. 아마 내가 배움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지점과 맞닿아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꿈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공부한 사람의 포부는 좀 더 크고 넓은 차원의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기보다 더 많은 사람, 더 넓은 세계의 행복을 위해 자기 능력이 쓰일 수 있도록 하겠다는, 한 차원 높은 가치를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과 달라야 하는 지점은 배움을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쓰느냐 나눔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워서 남 주는' 그 고귀한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성인이 아닐까요?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인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을 나누고 실천할 줄 모르면 지성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역량이란 건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있을 때 서로가 잘하는 부분과 부족한 부분을 인지하고 그중 내게 필요한 것을 취해 내 것으로 발전시키려 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사회적인 개념이다. 즉, 내가 지금 잘나게 된 건 애초에 내가 잘나게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고, 사람은 누구나 주변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의 내 선택이 어떤 형태로든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대해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2018년 3월의 첫 번째 책,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