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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 컷 일지

Last but not least 국립대전숲체원

차선이었지만 최고로 좋았던

by 반고

우리 동네 숨은 보석

추석 연휴동안 월간 토마토 프리랜서 기자 모집에 낼 에세이를 쓰느라 줄곧 책상에 붙어 있었다. 당락이 그 글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고치고 고쳐도 부족한 것이 보였다. 며칠을 붙잡고 있다가 10월 8일 마감일에 떠나보내고 한글날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남편과 나는 계룡산국립공원에 위치한 수통골에 갔다. 남편은 검색해보더니 빈계산에서 등산을 시작해 고개를 넘어 국립대전숲체원으로 내려오는 경로를 제안했다. 수통골은 자주 가는 곳이라서 심리적으로 가깝게 느끼고 있었는데, 막상 등산해보니 돌이 많고 가팔라서 힘에 부쳤다. 우리는 계획을 수정하여 입산한 길로 다시 하산한 후, 다음 목적지까지 차로 이동했다.


등산한 후라 다리는 아팠지만 새로운 곳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방동저수지를 지나 성북동의 시골 마을을 거쳐 천천히 지나가니 길 양옆으로 펼쳐진 논밭의 풍경이 따스했다. 추수하지 않은 곳도 제법 많았다. 내가 사는 유성구에 이런 곳이 다 있다니! 코로나 시대에 여행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집에서 30분 거리에 멋진 곳이 숨어있었다. 남편의 검색능력 덕분에 다녀왔던 이곳이 훗날 취재 업무에 유용하게 쓰일지 그때는 몰랐다. 마침 2월에 섭외하려고 했던 대전화분병원이 여의치 않게 되어 짧은 시간에 대안을 모색해야 했는데, 나는 주저없이 대전국립숲체원을 취재대상지로 떠올렸다.


국립대전숲체원은 전국에 있는 7개의 숲체원 중 하나로 2019년에 생긴 곳이다. 휴양림이나 수목원은 가보았지만, 숲체원은 이름부터 낯설었다. 숲체원의 영어 이름이 National Center for Forest Education이라고 쓰인 것을 보고 어렴풋이 숲에 대해 교육을 하는 곳이구나 짐작해보았다. 차량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아서 누가 이곳을 알까 싶은데도 주차장에는 차가 제법 많았다. 가을 하늘이 한없이 맑고, 날씨도 선선해서인지 가족 단위로 산책하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전염병 때문에 실내공간인 숲속 도서관처럼 문을 닫은 곳도 있었지만, 야외 산책로를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기분전환이 되었다. 숲체원은 딱히 무엇을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걷다가 쉬다가 멈추었다 가는 곳 같았다. 숲속에 앉을 곳이 많았는데, 사람들이 저마다 거리두기를 하고 드문드문 앉아서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머문 휴일의 오후는 몇 주 동안 내 기억에 머물렀다.

금수봉과 빈계산 골짜기에 위치한 국립대전숲체원

취재 목적으로 재방문하다

계절이 바뀐 겨울에 다시 국립대전숲체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시설 안내를 해줄 수 있는 담당자와 약속을 잡았다. 인터뷰하기로 한 날, 밤새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울 것 같았다. 눈길 운전에 자신이 없는 나는 아마추어처럼 보일까 봐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 전화했다. 담당자는 제설작업으로 정신이 없다며 오히려 일정 연기를 반가워했다.


며칠 후 도로 사정이 괜찮아진 후에 길을 나섰다. 나는 지난번에 왔을 때는 야외 공간만 둘러보았기에 이번에는 내부 시설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긴 나무를 세로로 붙여 마감한 삼층 높이의 새솔관은 총 12개의 객실이 있는데, 방마다 대전의 산과 봉우리 이름을 붙여놓았다. 장태산, 보문산, 계족산, 우산봉처럼 가본 적이 있는 산은 이름만 보아도 반가웠고, 안평산, 금병산처럼 처음 듣는 곳은 대전의 어디쯤 있는지 궁금해졌다. 새솔관의 1층은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공간이었다. 현관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곳은 단차 없이 얕은 경사가 있고, 이불과 요 대신 침대를 준비해 놓았다. 화장실 문은 슬라이딩으로 여닫을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 머문 사람들의 평이 어떤지 물었다. 담당자는 국립대전숲체원이 가장 최근에 생긴 시설이기 때문에 장애가 있는 사용자들에게 편리했다는 피드백이 주를 이루지만, 아무래도 관리자 입장에서는 조금씩 개선할 점이 보인다고 하였다. 더불어 그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여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오랫만에 익숙한 공간을 떠나서 낯선 곳에 머물다 가는 시간을 누구보다도 만끽하고 가는 것 같다고 하였다. 나 역시 장애인용 숙박공간을 접한 적이 드물어 어떤 점을 반영해야 하는지 몰랐다. 처음 보았을 때는 병원의 1인실과 비슷하다 싶었다. 여행지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을 위한 시설을 마주치지 못한 데서 기인한 생각이리라.


담당자는 열의를 가지고 설명해 주었는데, 객실의 분류에 따라 소개를 하다 보니 여러 개의 객실에 들어가 보게 되었다. 투어가 끝난 후에 청소 요청을 할 것이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나는 현관마다 진흙 발자국을 내는 것이 미안했다. 불필요한 일거리를 만든 것 같은 무거운 마음을 누르고, 멋진 글을 써서 국립대전숲체원을 잘 알리는 데 힘을 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도토리 원두막의 가을과 겨울

TV는 없지만, 정수기는 있어요

방마다 TV가 보이지 않아서 왜 그런지 물었더니 오로지 숲을 즐기도록 설계된 교육 시설이기 때문에 TV는 물론 와이파이도 없다고 했다. 납득할 만한 설명이었다. 이야기 중에 이곳에 특별한 설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인용 에스프레소 커피기계처럼 생긴 예쁜 정수기였다. 국립대전숲체원의 객실 내부는 취사나 음주가 불가능해서 조리도구가 아예 없는데, 누구나 물은 마시게 된다. 이용자들이 외부에서 생수를 반입해오면 플라스틱 쓰레기가 늘어날 것이므로 환경에 바람직하지 않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객실마다 정수기를 비치한 것이다. 집을 떠나면 호텔이든 펜션이든 늘 플라스틱병에 있는 생수를 마시게 되는데, 초기투자를 하여 방마다 정수기를 비치해 둔 것이 돋보였다.


내가 방문한 날이 평일이어서 국립대전숲체원 내부에는 인적이 드물었지만, 주말에는 하루 수백 명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담당자는 이곳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대중교통이 닿는 도심형 숲체원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가능케 하려고 담당자들이 대전시와 협의하여 시내버스 41번의 노선이 국립대전숲체원을 지날 수 있도록 애를 썼다고 한다. 또한 지난 가을 내가 포기했던 경로인, 빈계산을 넘어서 숲체원으로 들어오는 방문객도 제법 있다고 한다.


산림복지. 복지라는 단어를 여기서?

집에 와서 기사 작성을 하면서 국립대전숲체원에서 받은 자료를 살펴보았다.


“국립대전숲체원은 시민들이 숲의 가치를 느끼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증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숲체험 프로그램 및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 국립대전숲체원은 숲과 함께 국민행복을 키우는 산림복지 전문기관입니다. ” (출처: 국립대전숲체원 브로슈어)


사회복지를 전공한 나로서는 숲체원에서 복지라는 단어를 접하는 것이 뜻밖이었다. 산림이 인간에게 제공할 수 있는 복지는 광의의 복지겠지만, 실제로 이곳은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장애인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 저소득 가정을 위한 서비스, 노인들 및 유아를 위한 교육 일정이 연중 기획되고 있다. 오늘 안내를 해준 담당자도 산림복지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숲체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앞으로도 복지와 타 영역의 접목이 점점 확대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방문기념 선물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방문기념 선물을 받았다. 모던하고 경쾌한 그림이 있는 찻잔이었다. 나는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받은 선물을 내가 가져도 되는지, 월간 토마토 사무실에 가져다주어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결론은 출판사 사무실에는 찻잔이 아주 많다는 점, 기사를 쓰면서 이 찻잔에 따뜻한 차를 마시면 글이 더 잘 써질 거라는 점을 들어 내가 가지기로 했다. 저녁때 식구들에게 취재 갔다가 받은 선물이라고 자랑을 하면서 “이 모양이 뭐 같아? 도토리 같지?” 하고 물었다. 가족들은 하나같이 “파인애플 같은데?”라고 답하였다. 국립대전숲체원에서 준 기념품이니 열대 과일인 파인애플 보다는 도토리가 어울릴 것 같았지만, 누가 봐도 파인애플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이 제품은 한국도자기와 부팡 앤 브로큰 하트가 협업으로 만든 스페셜 에디션 찻잔이었다. 부팡앤브로큰하트라는 브랜드와 해당 예술가를 처음 알게 된 나는 작가의 명성과 인기에 현혹되어 ‘파인애플이 대체 무슨 연관이람?’ 했던 투덜거림을 거두고 ‘공공기관에서 어쩜 이런 센스있는 선물을 골랐지?’ 하며 찻잔을 잘 쓰고 있다.  



한국도자기 x 부팡 앤 브로큰 하트 파인애플 찻잔


언젠가 편집장이 글쓰기는 현장에서 하는 것이라고, 현장에서 제목과 소제목을 뽑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오늘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살짝 알 듯 싶었다. 담당자의 설명 중에 취사, 음주, 흡연, 애완동물 입장이 금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숲체원에서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메모했는데, 잠시 후에 숲체원 TV와 와이파이가 없다는 설명을 들으니 ‘숲체원에 없는 것과 안되는 것’이라는 소제목이 떠올랐다. 월간 토마토 1월호 기사에는 이 소제목을 사용했다. 이제 세 번째 기사를 집필하는데, 조금씩 감을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월간 토마토 vol. 163 국립대전숲체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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