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타고 자주 출장을 다니던 시절, 나의 즐거움 중 하나는 기차에서 잡지를 보는 것이었다. 뭐든지 책으로 먼저 배우길 좋아하기에 KTX매거진을 읽으며 가보지 않은 여행지를 섭렵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에는 맨 뒤에 있는 편집후기를 살펴보았는데, 이 또한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여행 잡지인 만큼 취재 현장에서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띄우는 감사의 말이 등장했고, 마감에 쫓겨 밤을 새웠다는 내용도 자주 눈에 띄었다. 읽을거리가 다 끝났다는 아쉬움을 달래주는 짤막한 편집후기는 기사에서 보여주지 못한 1인칭 시점의 담백함과 솔직함이 있었다. 나는 하이쿠 같이 제한된 지면에 알쏭달쏭하면서도 재미있는 글을 쓰는 기자들의 필력에 감탄했다. 한편으로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실린 토막 문장들을 누가 본다고 이런 지면에 공을 들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월간 토마토 프리랜서 기자가 된 후, 주기적으로 편집후기를 쓰게 되었다. 처음 작성할 때, 출판사의 디자이너는 간략한 가이드를 주었다.
-가볍게 작성할 것
-A4 서너 줄 분량일 것
-하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분량을 줄이지 않아도 됨.
미용실이 좋다. 머리 깎으면서 자는 게 좋다. 머리 감는 것도 좋다. 나중 성공하면 머리 감는 의자 하나 사야지. 의자에 누워있으면 잠이 솔솔 온다. 머리는 매달 말에 자른다. 미용실에 오면 이번 한 달도 열심히 살았구나 생각하며 잠이 든다.
(월간 토마토 vol. 160, p.80)
위의 글은 디자이너가 편집 후기 예시를 보내준 것이다. 재미있는 글이었지만, 잡지를 만드는 경험과는 무관한 내용이라 당황스러웠다. 편집 후기에 생활의 단상이나 개인적인 소회를 싣는 것일까? 어쩌면 전혀 관련이 없는 글을 썼다는 나의 생각은 틀린 것일 수도 있다. 이 예시에서 매달 말 발송 작업을 마치는 월간 토마토의 주기와 미용실에 가는 주기가 딱 맞아서 한 달이 무사히 지나갔다는 표현을 하게 된 것일 수도… 핵심은 편집 후기는 가볍게, 짧게, 멋지게 쓰는 것이다.
요청을 받았기에 쓰긴 쓰면서도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싶었다. 다른 잡지에서도 볼 수 있는 편집 후기 지면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편집 후기는 편집인이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 편집장의 후기는 잘 보지 못한 것 같은데? 기자들의 글을 수정하고, 기사 순서를 정하고, 지면 레이아웃을 짜고, 표지 사진을 고르는 이 모든 과정을 마무리한 사람이 흡연실에서 담배 연기를 배출하듯 편집하면서 생긴 응어리를 토해내는 곳이 아닐까? 글을 퇴고하는 것까지만 관여하고 전체 잡지를 만드는 데는 기여하지 않은 내가 편집후기를 함께 쓴다는 것이 멋쩍기도 했다. 그러나 한두 사람이 편집 후기라는 제목 아래 잡지의 한쪽을 할당받으면, 그것은 또다시 마감해야 할 하나의 글 꼭지가 되는지도 모른다.
편집후기가 왜 있는 것인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찾아보다가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다.
책에서 편집후기는 사람 향기가 가장 진하게 묻어나는 페이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 책의 구성과 편집 의도에 대한 설명을 앞부분에 적고 제일 끝 서너 줄은 개인적인 감정을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세련되게 함축적으로 풀어낸다. 그러면서도 ‘나’스러움을 잃지 않고 ‘나’다운 화룡점정의 문장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남지민, [매일춘추] 편집후기를 쓰며, 매일신문, 게재일 2016.3.10. 출력일 2021. 3.6.
대구예술 편집장인 남지민의 <편집후기를 쓰며>라는 글을 읽고, 이 공간에서는 글쓴이의 내면이 살짝 드러나도 좋고 나만의 색채를 보여주어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긴 글은 오래 걸려서, 짧은 글은 진액만 담기가 어려워서, 이런저런 이유로 쓰기가 힘들지만 편집후기를 작성하면서 월말 집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과제를 준비하는 마음의 재정비를 하게 된다.
이 글을 쓰면서 그동안 쓴 편집후기를 들추어보았다. 세련되고 함축적으로 쓰지는 못했지만, 디자이너가 요청한 분량에 딱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후기에는 절제해서 썼지만 실제로 내 머릿속에 흐르던 생각은 대충 이랬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나 자신을 소개한 것은 처음이었다. 취재 대상을 발굴하고 인터뷰를 진행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상대의 마음을 열고 분위기를 읽는 것은 내공이 필요함을 느꼈다. 이에 비해 글쓰기는 나만 닦달하면 되는 일이니 할 만한 일이로구나 싶었다. 오래된 상점을 취재하는 첫 번째 미션에서 흔쾌히 나의 인터뷰이가 되어주신 이 대표님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월간 토마토 vol. 161)
=>첫 취재라 무척 떨었는데, 이런 상태를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조바심 속에 진행했던 기억이 난다. 편집 후기에 그렇게 쓰기엔 부끄러워서 초보 기자의 인터뷰에 응해주신 인터뷰이에게 감사를 표현하는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하천의 징검다리를 살펴보며 대전을 엿본다는 기획은 애초에 느슨하게 세운 것이었다. 몇 개나 가봐야 할지 정하지 않고 나섰는데, 예닐곱 군데를 돌고나니 이야기가 한 곳으로 모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돌멩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싶지만 징검다리를 이용하는 시민들의 뒷모습에서 이 도시를 더 가까이 볼 수 있었다.”
(월간 토마토 vol. 162)
=>첫 잡지가 나온 후 인터뷰이에게 드리러 갔었는데 글을 마음에 들어 하실지 어떨지 취재할 때보다 더 긴장되었다. 이번에는 나의 취재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서 완성된 잡지를 전해드릴 사람이 없는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종합월간지 형식의 월간 토마토 작업에 참여했다. 다양한 안건이 올라온 기획 회의부터 지면 레이아웃까지 진행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이번 호는 미술가를 섭외하고, 눈길을 뚫고 취재지에 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월에 3월 기사를 준비하며, 매체를 만드는 사람들은 한 계절 앞서 내다보아야 한다는 말이 조금씩 와 닿는다.” (월간 토마토 vol. 163)
=>이제 글 밖에서 일어나는 다이내믹에도 조금씩 관심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기획, 섭외, 현장 방문, 계획변경 등 일을 하다 보면 생기는 예측불허의 상황에 대해서 유연하게 대처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봄이 와서 그런가 이번 달에는 여행 관련 취재를 했다. 생긴 지 이제 반년이 돼가는 트래블 라운지과 반백 년 넘는 역사를 가진 유구 섬유마을. 두 곳 다 방문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특별한 장소였다. 대전 여행의 출발지로 발돋움하는 트래블라운지와 살아있는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주시 유구읍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월간 토마토 vol. 164)
=> 가족들에게 취재차 공주에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다들 대전 잡지라며? 하고 물었다. 대전•충청이 다 관심사라고 대답은 했지만 좀 설득력이 떨어졌던가보다. 조만간 가족들과 마곡사에 방문한 후 우연히 지나친 것처럼 유구에 들려 내가 잡지사 기자로서 얼마나 흥미로운 일을 하고 다니는지 보여주는 상상을 해 보았다.
편집 후기를 누가 읽느냐고? 이제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가 읽고, 남지민 편집장은 책을 읽기도 전에 후기를 먼저 읽기도 한다고 밝힌 바 있고, 월간 토마토 인턴으로 활동한 박기자도 읽는다는 것을 토마토 다이어리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