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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 컷 일지

유구에 가면

by 반고

옷 만드는 재봉틀과 책 만드는 재봉틀

나의 아버지는 옷 만드는 공장을 하셨다. 인건비가 올라 섬유제조업이 줄줄이 동남아로 이전하기 전까지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는 구로공단에서 남성복 공장을 운영하셨다. 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곳을 공단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만, 어릴 적엔 명절에도 기숙사에 남아있는 몇몇 여공 언니들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공장에 들러 떡과 명절 음식을 전달했던 기억이 있다.


출판사 사무실 한편에 있는 재봉틀을 볼 때면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공장의 전경이 생각난다. 공업용 미싱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옷을 만드는 미싱과 책을 꿰매는 미싱이 어떻게 다른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월말에 잡지를 만드느라 재봉질하는 소리가 들리면, 저걸 돌려서 수출했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황해도가 고향인 아버지는 공장 문을 닫은 후에도 미싱 수백 대를 가지고 계셨다. 통일되면 북한 사람들에게는 신식 미싱보다 옛 미싱이 더 소용이 있을 거라며, 전성기에 쓰던 기계를 그대로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어느 해인가는 공장에 수해가 나서 옷감이 물에 잠겼다. 남성용 코트 같은 고가의 옷을 만들었던 공장이라 피해가 컸다. 옷감 둘 공간이 필요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생일 때 할머니 댁 이층 끝방에는 옷감이 많았다. 방문을 열면 바닥에서 천장까지 돌돌 말려 비닐에 쌓인 옷감이 뉘어 놓은 전봇대처럼 쌓여있었다. 언니와 나는 그 위에서 미끄럼을 타며 놀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가 얼마짜리 돈더미 위에서 철없이 놀았는지 모르겠다.


<웹툰 보며 떠나는 대전 공주 부여 여행>이란 책에서 유구 편을 읽었을 때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유구라는 지명은 무슨 뜻이지? 하는 정도의 느낌이었고, 공주에 속한 읍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런데 벽화를 한 컷 만화로 그린 유구 벽화마을 소개 지면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화려한 벽화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실을 만지고 있는 흰머리 할머니의 모습이 뇌리에 박혔다. 조사해보니 유구는 오래전부터 직물 제조로 유명한 고장이고, 몇 년 전 섬유역사전시관이라는 공간을 조성해 섬유 1번지로의 부활을 시도하고 있었다. 박물관이 아닌 전시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궁금하고 내가 어릴 적 미끄럼 타고 놀던 섬유가 만들어지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호기심이 일었다. 편집장에게 이야기하니 몇 번 취재하려다 불발된 곳이라며 진행해보라고 했다.


여행 만화책에서 발견한 유구벽화마을 그림


유구섬유역사전시관은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나를 안내해 준 유구전통시장 상인회장님은 전시관을 볼 수 있도록 문을 따주고 난방을 켠 다음 볼일을 보러 갔다가 다시 오셨다. 전시관 안에 있는 것들은 움직이지 않는 모형이니 와 닿지 않을 수 있는데, 움직이는 현장을 보면 금방 이해가 갈 거라고 하시며 잠시 후 섬유 만드는 공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셨다.


피난민이 시작한 직물제조업

섬유역사전시관을 둘러보며 아버지 생각이 더 많이 났다. 삼 교대로 수직기를 썼다는 설명에서는 공장에서 야근하던 언니들이 생각났고, 전국에서 일감을 찾아 여성들이 유구로 몰려왔다는 이야기에서는 명절에 고향에도 못 가고 기숙사에 남아있던 언니들이 생각났다. 섬유가 사양 산업이 되고 노동력의 이전 현상이 일어나 공장 운영을 중단하기까지 아버지가 고뇌하셨을 그 과정이 상상되었다. 우리 사회가 최근 몇십 년 동안 거쳐 왔던 사회적 현상이 이곳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 시기는 우리 가족이 영향받았던 시간이기도 했다. 유구에서 직물이 활성화되었던 이유가 육이오 전쟁 때 직물기술을 가지고 정착한 북쪽 피난민 때문이었다는 설명을 읽었을 때는 나의 할머니가 남대문시장에서 타월 장사를 하고, 나의 아버지가 구로공단에서 옷을 만들었던 것이 실향민의 기질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구섬유역사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상인 회장님과 함께 걸어서 인근 공장으로 이동했다. 취재 대상지 밖으로 나와 나란히 움직이니 실내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오갔다. 왜 전시관이 현재 위치에 생겼는지, 왜 1층으로 지었는지, 누가 지었는지, 운영비는 어떻게 충당하는지와 같은 간단한 질문이었는데, 대답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 섬유공장으로 쓰던 곳을 보전하여 전시관으로 운영했으면 생동감 있고 좋았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하였다. 이 공간이 생기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 상충하여 어려움을 겪었던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오갔고, 현재의 상태가 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이라고 하였다. 건설 공사와 같이 큰 규모의 프로젝트는 누구든지 공정하게 참여하라고 공개 입찰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내부 사정과 문화를 잘 알지 못하는 가성비만 좋은 외지인이 들어오면 원래 취지를 다 살리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경우는 유구뿐만이 아니라 어디든 생기게 마련인데, 제일 싸게 짓는 게 다가 아니라 잘 짓는 게 관건인 문화사업에서 고려할 점이 정말 많다는 시사점을 주었다.


유구에 가면~

전시관에서 몇 분 거리에 있는 공장에 도착했다. 이 자리에 있은 지 60년이 넘었다는 한복 천을 만드는 공장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아차 싶었다. 내 직감은 이곳은 짧게 지나가듯 들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 가치를 담은 이 업체를 아카이빙하고 운영자의 철학을 듣는 과정은 동네 온 김에 잠깐 들릴 수 있는 가벼운 업무가 아니었다. 공간의 분위기, 기계 소리, 천장에 달린 각종 공구, 작업공정, 벽에 붙은 글씨, 전등의 조도, 천을 만지는 근무자의 손길까지, 근래 들어 한 공간에서 이렇게까지 강한 인상을 받은 경험은 정말 드물었다. 회장님이 왜 공장에 오자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민속촌에 가면 사람들이 옛집에 앉아 일도 하고 간단한 시연도 하는데, 이들은 옛날에는 이랬노라고 보여주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이다. 유구의 섬유공장은 그 안의 모든 것이 연출되지 않은 살아있는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 생의 터전이 주는 치열함과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나에게 이런 현장을 글로 표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들면서 다큐멘터리 3일에 나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기업 간 거래가 대부분인 섬유 기업 입장에서는 미디어 노출이 직접적인 홍보나 매출 증대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부담이 나의 마음을 눌렀다. 기업의 이윤을 추구하는 동시에 방문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투어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시장에 가면~’이란 놀이를 자주 했다. 앞 사람의 뒤를 이어 지금까지 나열된 물건들을 누적하여 말하는 게임이다. 유구에 다녀오면서 이 놀이가 생각났다.


유구에 가면,

유구에 가면 벽화가 있고~

유구에 가면 벽화가 있고, 비둘기가 있고~

유구에 가면 벽화가 있고, 비둘기가 있고, 공장이 있고~

유구에 가면 벽화가 있고, 비둘기가 있고, 공장이 있고, 온기가 있고~

유구에 가면 벽화가 있고, 비둘기가 있고, 공장이 있고, 온기가 있고, 역사가 있고~


이 게임이 점점 길어지도록 유구라는 고장이 가진 진솔한 매력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

유구의 상징인 비둘기가 옷감을 만들고 있는 입체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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