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여름, 나는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올해 결혼 22주년인데, 이 중 절반은 미국에서, 절반은 서울과 대전에 살았다. 공부하고, 출산하고, 직장 다니고, 육아하던 20~30대 미국 생활을 떠올리면, 흑백영화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몸은 고단하고, 마음은 여유가 없었지만, 나에겐 옆집, 앞집, 이웃 할머니들이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을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다보르카Davorka는 내가 미국 메릴랜드주에 살던 시절, 이웃집에 사는 할머니였다. 우리 동네는 두 집이 처마 하나를 공유한 타운하우스 단지였다. 옆집에는 마르코라는 남자가 살았다. 내가 이사 오고 몇 달 후, 마르코의 어머니 다보르카와 아버지 슬라보다네가 크로아티아에서 이민을 왔다. 슬라보다네는 전투기 조종사 교관으로 근무하다 은퇴하였고, 다보르카는 아들 삼 형제를 키운 주부였다. 이들은 1990년대에 일어난 내전 이후 고국 상황이 불안해지자 이주를 결심했다. 아들은 10대 때 미국에 건너와 정착하고 부모는 몇 년 후 이민을 온 것이다. 다보르카의 첫째 아들은 결혼하여 미시간에 살았고, 미혼인 둘째 아들 마르코는 메릴랜드에, 대학생인 셋째 아들은 기숙사에 살았다. 고향에서는 능력 있고 독립적인 부부였지만, 타국에서는 도움이 필요했다. 가족이 있는 첫째와 기숙사에 사는 막내보다 혼자 사는 둘째의 형편이 제일 나았다. 그래서 마르코가 부모님을 모시기로 했다.
우리 단지에는 이 층에 방이 두 개, 지하에 방이 하나 있었다. 어느 주말, 옆집에서 가구 나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르코가 집안 배치를 바꾸는 중이었다. 자신이 쓰던 이 층을 비우고 지하로 짐을 옮긴 것이다. 부모님께 넓은 방을 양보하고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할 방법을 찾은 듯했다. 며칠 후, 마르코는 킹사이즈 중고 침대를 구해왔다.
다보르카가 온 후로 옆집과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그녀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심심하다며, 내가 집에 있으면 초인종을 눌러 자신의 집에 놀러 오라고 하였다. 다보르카는 살림에 일가견이 있었다. 거의 매일 빵이나 과자를 구웠고, 유리잔은 물방울 흔적 하나 없이 매끈했다. 옆집에 가면 그녀가 만든 요리를 맛보거나, 수예품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 번은 다보르카 집에서 파우더룸을 사용했다. 파우더룸은 욕조나 샤워부스가 없는 작은 화장실로, 손님은 주로 이곳을 사용한다. 어느 집이나 파우더룸은 깨끗하기 마련이지만, 이 집은 뭔가 유난했다. 지은 지 이십 년도 넘은 집인데, 물을 사용하지 않는 견본주택처럼 세면대와 양변기가 깨끗했다. 다보르카한테 물었다. “어떻게 하면 파우더룸이 이렇게 새것 같아요?” 그녀는 자신을 따라오라며 지하로 데리고 갔다. 계단 뒤 창고에서 플라스틱 청소 도구함을 꺼내 손거울을 찾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손거울을 변기 테두리 아래에 넣고 비춰봐. 그러면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보이지 않는 물때가 보여. 여기를 잘 청소해야 도기가 하얗게 되지.” 화장실 청소에 이 정도의 수고를 들인다는 사실에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다보르카는 직접 허리를 숙여 변기에 거울을 비추고 이 부분을 빼놓지 말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양변기 청소 팁을 배운 뒤, 나도 따라 해 보았다. 한두 번 해보니 몸을 낮추고 변기를 끌어안듯 청소하는 자세가 힘들어 그만두었다. 반짝이는 변기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청소 이외에 기억에 남는 다보르카의 살림 능력은 코바늘뜨기이다. 그녀의 집 테이블에는 늘 빳빳하게 풀 먹인, 코바늘로 뜬 식탁보가 깔려있었다. 비슷해 보여도 자세히 보면 다 다르게 생긴 여러 개의 작품이었다. 내가 이렇게 큰 걸 어떻게 완성했느냐고 감탄하자 다보르카는 어렵지 않다며 한번 해보라고 했다. 언젠가 그녀가 크로아티아에서 가져온 실을 다 썼다며 면사 판매처를 찾고 있길래, 취미 용품 재료상에 데리고 가주었다. 그녀는 이 기회에 바늘과 실을 장만해 시작해보라고 권유했는데,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때는 코바늘 뜨기 소품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다. 내가 어릴 때는 TV, 전축, 좁은 탁자 위에 레이스 테이블보를 덮는 집이 많았다. 테이블 보의 문양은 정교하지만 그걸 덮어 놓으면 실내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다른 가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느꼈다.
코바늘 뜨기는 내 취향이 아니었음에도 뜨개질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즐거웠다. 다보르카는 도면을 보느라 돋보기를 썼다 벗었다 하며 몇 코 남았는지 크로아티아어로 숫자를 말했다. 그런데 뜨개질에 들이는 시간에 비해, 그 집 실내에는 코바늘 소품이 많지 않았다. 궁금해진 나는 완성한 코바늘 작품은 다 어디에 쓰는 거냐고 물었다. 다보르카는 이 집은 아들 집이기 때문에 자신의 스타일대로 꾸미는 것은 곤란하다며, 나중에 집을 따로 구하면 그때 꺼내 쓸 예정이라고 했다.
다음번에 옆집에 갔을 때, 다보르카는 작정한 듯 보여줄 게 있다고 했다. 그녀는 나를 방으로 데려가더니 서랍장 한 칸에서 가지런히 정리한 코바늘 작품을 꺼냈다. 차례차례 꺼내서 침대 위에 펼쳐서 더 늘어놓을 데가 없이 꽉 찼다. 네모난 테이블보, 동그란 테이블보, 술이 달린 기다란 테이블보, 벽에 거는 장식, 주방에서 쓰는 작은 소품 등등, 코바늘뜨기 완전체 세트였다. 이만큼 꺼내고도 서랍에는 코바늘 작품이 남아있었는데, 그녀는 보고 있는 거랑 똑같으니 꺼낼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다보르카는 세 아들이 결혼할 때 며느리에게 주려고 준비했다며, 지금은 막내 것을 만드는 중이라고 했다. 첫째 며느리한테는 이미 선물했고, 내가 그날 구경한 완성품은 둘째에게 갈 모양이었다. 그녀의 코바늘 작품을 보며 옛날 한국 어머니들이 손바느질로 자녀의 혼수 이불을 준비하던 모습이 생각나서 코끝이 찡했다.
우리가 이웃이 된 다음 해, 나는 출산을 하게 되었다. 입덧이 심해서 한동안 외출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종일 혼자 침대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들은 다보르카는 낮시간 동안 자기 집에 와서 있으라고 했다. 옆집 소파에서 낮잠 자고, 점심에는 수프 국물이라도 조금 떠먹으라고 하였다. 진짜 옆집에 가서 누워있던 날은 몇 번 안되지만, 힘들 때 나를 들여다봐줄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것은 큰 힘이 되었다. 아플 때는 시간이 더디게 가더니, 입덧이 끝나니 시간이 휙휙 지나갔다. 이번에는 내 임부복이 다보르카의 레이다에 걸렸다. 나는 임부복 대신 헐렁한 멜빵바지를 사서 배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어깨 줄을 늘여 입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바지보다는 치마가 더 편할 것이라며 임부복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하였다. 다보르카는 줄자를 가지고 우리 집에 왔다. 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조리하다가 치수를 재게 되었다. 우리는 치마 길이를 두고 실랑이질을 했다. 나는 무릎길이 치마가 좋겠다, 다보르카는 발목보다 조금 올라간 치마가 좋겠다고 한 것이다. 조금만 더 짧게 해달라고 하자, 다보르카는 무릎과 발목 사이 길이의 치마가 될 것이라며,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했다. 내가 옷 고르는데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왕이면 자주 입을 수 있는 의상이었으면 했다. “이 앞치마처럼 편한 옷으로 만들어주세요”라고 부탁하자 그녀는 호탕하게 웃으며 아주 적당한 옷을 만들어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며칠 후 선물 받은 옷은 앞쪽에 긴 지퍼가 달린 회색 점퍼스커트였다. 안에 긴 팔 블라우스나 반 팔 티셔츠를 받쳐 입을 수 있는 시원한 재질로 만든 치마였다. 착용하기 편리하고, 점잖고, 실용적인 옷이었다. 나는 이 옷을 유니폼처럼 입다가 출산하러 가는 날에도 병원에 입고 갔다. 일찍이 전화로 맞춤형 임부복을 선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나의 어머니는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왔다가 처음 다보르카를 만났다. 어머니는 그녀의 두 손을 꼭 잡고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다보르카는 아기를 무척 예뻐했다. 내가 유모차에 아기를 태워 나가면 그녀도 밖으로 나와 반갑게 놀아주었다. 우리 집에 아기가 온 것과 비슷한 시기에 다보르카도 할머니가 되었다. 첫째 아들이 딸을 낳아 손녀가 생긴 것이다. 마르코가 대학원을 졸업하던 날 옆집에서 파티가 열렸다. 다보르카 부부와 아들 삼 형제 가족이 모두 모였다. 이날 처음으로 다보르카가 손주와 노는 모습을 보았는데, 어찌나 볼에 뽀뽀를 하는지 아기의 뺨이 마를 새가 없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의 살림왕이었던 그녀가 몇 달 후 직장을 구했다. 다보르카는 취업할 수 있는 여건이 되자, 인근 항구 도시의 유람선 조리실에서 일했다. 60대에 처음으로 가정 밖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음식을 먹어보면 이 요리사가 누구냐고 묻는다며 은근히 실력 자랑하던 그녀였기에 상업 주방에서 일하는 것은 좋은 방법 같았다. 다보르카는 배에서 디저트 만드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주방에서 너무 값싼 재료를 쓴다고 걱정하더니, 나중에는 팔 곳곳에 오븐 판에 덴 상처가 늘어난다고 속상해했다.
다보르카의 출근과 함께 견본주택 같은 깔끔한 옆집은 사라졌다. 집 가꾸기에 쓸 시간이 줄었지만, 바라던 바대로 아들에게 전적으로 생활비를 의지하지 않도록 얼마간의 수입이 생겨 다행이었다. 어쩌면 다보르카는 살림을 좋아했다기보다 이민 정착 시기에 고국에 두고 온 걱정거리를 잊고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다보르카가 서서히 유람선 일에 지쳐갈 때, 첫째 아들 부부가 부모님이 미시간주로 와서 아기를 돌보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아들 부부는 출산휴가를 마치고 직장에 복귀하기위해 부모님이 육아를 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다. 그녀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그 어떤 직장보다 손녀 돌보기가 의미 있다며 이사를 결정했다. 다보르카는 첫째 아들네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살며 손녀를 돌보았고, 슬라보다네는 그곳에서 학교 버스 운전사로 취업에 도전할 계획을 세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보르카와 슬라보다네 가족은 참 반듯한 사람들이었다. 부모님이 도착하기 전에 제일 좋은 방을 내어주느라 마르코가 집안 구조를 바꾸었던 일이나, 다보르카가 아들 집 실내 장식을 건드리지 않고 존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보르카와 슬라보다네가 미시간으로 떠난 후, 마르코의 약혼자가 옆집으로 이사 왔다. 나는 그제야 다보르카가 미시간주로 간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둘째가 정착을 도왔고, 둘째가 결혼을 앞두게 되자, 이번엔 첫째가 부모님을 미시간으로 초대해서 가까이 지내자고 했구나.’ 나에게는 이 가족의 형제간 우애, 부모 자녀 간 존중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오랜만에 앨범을 꺼내서 다보르카와 찍은 사진을 찾아보았다. 나는 아들을 안고, 그녀는 손녀를 안고 있었다. 턱받이를 한 볼이 통통한 두 아기와 젊은 엄마, 젊은 할머니가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다보르카가 미시간주로 이사 가기 전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은 일 년이 조금 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가 이웃이어서 행복했다. 우리는 미국에 연고지가 없다는 동병상련을 느끼기도 했고, 둘 다 서로의 조국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은근히 정서가 비슷해서 친해졌던 것 같기도 하다. 가끔 화장실 청소를 할 때, 카페에서 레이스 달린 장식을 만날 때, 이웃이자, 친구이자, 좋은 어른이었던 다보르카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