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아홉 명의 손주를 두었다. 40대 후반에 조모가 되어 어느덧 20+년 차 할머니이다. 첫 손주가 태어났을 때 나는 해외에 있어서 어머니의 손주 사랑을 가까이에서 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돌아왔다. 몇 달간 서울 생활에 적응하고, 직장을 구하자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집집이 손주가 있는데, 어느 한 집 애들만 봐주는 것은 공평하지 않아. 그러니까 나는 아무도 봐줄 수가 없다.” 우리 집과 친정 부모님 집은 서울 안에서도 끝과 끝이었고, 나는 어머니에게 육아를 부탁할 생각이 없었기에, 갑작스러운 선언에 당황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는 나의 형제자매에게도 이 말을 자주 하였는데, 급식이 없던 시절 도시락 다섯 개를 싸며 자녀를 키운 그녀가 육아에서 은퇴했음을 강조하는 캠페인 같은 거였다. 부모가 젊을 때는 고된 줄 모르고 키우지만, 나이가 들면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체력이 부족하기에, 조부모의 양육 참여는 무리라는 것이 어머니 입장이었다. 어머니에게 손주와 관련된 행사에 초대하거나 돌봄을 부탁하면, 어떨 때는 흔쾌히 수락하고 어떨 때는 솔직하게 거절했다. 나는 그 반응을 보고 어머니가 적정선이라고 여기는 할머니 영역을 조금씩 파악했다. 이를테면 그녀가 즐겨하는 활동은 손주 발표회에 참석하기, 손주 동반 가족 여행 가기 등이다.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남편과 놀러 가기? 음,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아무튼, 조부모의 개입은 최소한일수록 좋다는 어머니의 방침은 자녀 양육의 막중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일찍 깨우쳐주었기에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여기까지 읽으면 그녀의 할머니 인심이 야박하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어머니가 아홉 손주의 할머니로 쌓은 덕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녀는 외국에서 태어나는 손주들 곁에 달려와 돌봐주었고, 남편과 내가 동시 출장으로 동동거리던 날, 우리 집에 와서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몇 해 전 둘째가 학교 대표로 드럼을 연주했을 때는 10분이 채 되지 않는 음악을 들으러 서울에서 대전까지 왔다. 무대에 올라간 손주 No. 4 사진을 열심히 찍던 어머니는 멋진 드럼 스틱을 사주고 돌아갔다. 여건상 드럼이라는 악기를 갖긴 어렵겠지만, 소모품인 스틱은 개인용을 쓰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엄마인 나도 공동주택과 타악기는 상극이라며 아이의 욕구를 깊게 살피지 못했는데, 어머니는 손주의 눈높이에 맞는 세심한 선물을 해 주었다. 둘째는 지금도 외할머니가 사준 검정 드럼 스틱을 애용하며 자신의 팬이 선물 주었다고 자랑한다.
결혼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어머니와 물리적으로 멀리 살았기에, 육아의 일상을 세세하게 공유할 기회가 없었다. 주로 전화로 가족 소식을 전했는데, 이에 대해 어머니는 육아를 어떻게 하라는 말보다 육아 조력자와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애써야 한다는 조언을 주었다.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 가정 보육, 어린이집, 시간제 베이비시터, 입주 보모, 유치원, 이모님 등 다양한 형태의 공식, 비공식 돌봄과 인연을 맺었다. 제일 처음 도움을 받은 이는 친분이 있던 언니였다. 그녀는 가정주부로 딸 한 명을 키우고 있었는데, 세 살 터울로 여아, 남아를 키우면 재미있겠다면서 아침·저녁으로 자신의 집으로 아이를 데리고 올 수 있으면 해 보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첫째가 24개월이 되어 어린이집에 가기 전까지 이어졌다. 내가 이 소식을 전하자 어머니는 이국땅에서 한국 이웃의 도움으로 아기를 키울 수 있다며 반색하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견해 차이가 있어도 그 언니에게 진심으로 깍듯하게 대하라고, 아기를 돌봐준다는 마음은 쉽게 가질 수 없는 거라고 말하였다.
“주희야, 거꾸로 생각해보면 쉬워. 누가 너한테 ‘페이 이만큼 드릴 터이니 아기 두 명 봐주세요’ 하면 하겠어? 못하겠지? 돈 생각해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직업이야. 아기를 좋아하고 적성에 맞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야. 아침에 아기 내려주고 저녁에 데리러 갈 때 이분이 옆에 계셔서 정말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매일 얼굴 보는 거야.”
어머니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이웃 언니와 손발을 맞춘 덕분인지, 나의 첫 육아 조력자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아기를 봐준다는 마음을 높이 사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을 체감한 일이 있었다. 첫째가 미국에서 태어난 후 어머니는 삼 주 동안 산후조리를 도와주었다. 어머니가 떠난 후 곧 시어머니가 방문하였다. 시어머니는 한 달 정도 머물면서 손주랑 시간을 보내고 돌아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내가 외출 중이던 어느 날, 시어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했다. 아기가 쿠션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앞으로 넘어졌는데, 팔이 이상하다는 거였다. 소아과에서는 어깨가 빠졌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의사는 큰일 아니라고 우리를 안심시키며 팔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한숨 돌리고 집으로 오는데, 시어머니의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그녀는 아기 돌보기가 힘들어서 안 되겠다며 한국행 비행기표 날짜를 당길 수 있나 알아봐 달라고 하였다. 당신이 아기를 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난 것에 대해 큰 부담을 느낀 것이다. 시어머니가 떠난 후 어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하였다. 어머니는 조용히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옛날부터 이런 말이 있어. 집에서 아기 볼래? 나가서 밭맬래? 그럼 다 밭맨다고 그런 대. 나는 안사돈 마음 충분히 이해해. 친할머니가 친손주 봐주는 것도 이렇게 부담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아기 돌봐주시는 분께 잘해. 늘 고마움을 표현해야 해.” 어머니의 강력한 교육 덕분에 육아는 누가 해도 어렵다는 것과 보육종사자에 대한 감사를 마음에 새겼다.
어머니의 아홉 손주는 미취학 어린이부터 대학생까지 폭넓게 퍼져있는데, 그녀는 손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체험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몇 해 전 추석 연휴에는 어머니, 나, 아이 둘, 이렇게 넷이 실내 스포츠 테마파크에 갔다. 개업 초기 문전성시는 지나갔지만, 여전히 줄을 섰다 들어가는 때여서 일찍 집을 나섰다. 정보통인 어머니는 쇼핑몰 개장 전에도 풋살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일찍부터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우리를 그쪽으로 안내했다. 빠릿빠릿함의 일인자인 그녀를 따라 실내 스포츠 테마파크의 첫 번째 입장 고객이 되는 기분은 묘했다. 어머니는 손자 No. 3. 와 No. 4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장하기 전에 줄 서 있는 건 문 열 때까지만 하면 되니까 얼마나 기다릴지 예측할 수가 있어. 그런데 개장한 후에 인파에 껴서 기다리면 언제 입장하는지 기약이 없잖아? 혹여나 정원이 정해져 있어서 나간 사람만큼 들어갈 수 있다고 하면, 노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거든.” 아이들은 일등으로 줄을 선 이유를 깨우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 애들은 병원에 갈 일이 있으면 문 여는 시간보다 일찍 가서 의사가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진료를 받는다.
실내 스포츠 놀이터는 모든 면에서 훌륭했다. 어머니는 손주들의 소지품을 지키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아이들과 같이 사격, 양궁, 트램펄린 점프를 했다. 그중 잊을 수 없는 활동은 샤우팅 네스트 Shouting nest이다. 샤우팅 네스트는 큰 소리를 낼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 게임으로, 방음 부스 안으로 들어가 나팔 모양의 금속관에 대고 힘껏 소리치면 된다. 우리 중 처음으로 도전한 어머니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화면 속 집을 와장창 무너트렸다. 높은 점수를 획득한 후 그녀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뻗어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어머머! 너희 이거 한 번씩 꼭 해봐! 스트레스 완전 싹 없어져! 다 같이 소리 질러!!” 어머니의 흥 돋우기에 힘입어 차례대로 나팔 앞에 섰는데, 누구도 그녀만큼 고득점을 얻지 못했다.
몇 해 전, 어머니의 첫 번째 손주가 육군에 입대했다. 가족들은 훈련병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앱을 설치하고 응원의 편지를 쓰기로 했다. 나는 무슨 내용을 쓸지 고민하다가 명언이나 시를 적어 보냈다. 어느 날 어머니와 통화하다가 편지에 쓸 말이 궁하다고 고백했는데, 그녀는 쓸 내용이 왜 없겠냐며, 자신은 일주일에 몇 통씩 쓴다고 하였다. 잠시 후 어머니는 그간 손주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주었다.
사랑하는 00아, 네가 태어나던 날 외할머니는 뛸 뜻이 기뻤단다. 이렇게 잘 자라서 국방의 의무를 하느라고 군대에 가니 정말 훌륭하다. 앞으로 00 이에게 힘든 시기가 와도 잘 이겨내리라 믿는다. 언제나 즐거움을 주는 00아. 할머니는 네가 자랑스럽다. 씩씩하게 힘든 일을 잘 이겨내는 00 이를 많이 사랑한다.
보고 싶은 00아, 지금 수고하는 너의 군대 시절은 성장기라고 생각해라. 이다음에는 고생도 값진 추억으로 기억될 거야. 요즈음 너에게 보내는 글을 쓰면서 할머니도 편지 쓰는 실력이 는 것 같아. 네 덕분에 편지를 쓰니 00 이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어머니의 샘플 편지를 다 읽기 전에 또 다른 문자가 도착했다. “다시 읽어봐도 이걸 정말 내가 썼나 싶게 잘 썼더라고.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다른 손자들한테도 써먹어야겠다. 막내 손자까지 총 8번이 남았으니…”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아홉 손주는 모두 손자이다. 앞으로 국방의 의무를 할 자손이 많이 남았으니 이 콘텐츠를 잘 저장했다가 재활용하겠다는 전략을 세워둔 것이다. 사용할 일이 많기에 공들일 값어치가 있다던 어머니의 편지 쓰기는 둘째 손자가 학사장교로 복무하여 훈련소에 편지 보낼 일이 없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중단했다.
글을 쓰면서 그녀의 할머니 노릇을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어머니는 나와 아이들에게 눈치껏 하는 게 중요하다, 너무 힘들이지 말고 꾀를 잘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때 ‘꾀’는 자기 편의대로 하는 계책이 아니라, 현명함이 더해진 즉흥성, 솔직하면서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균형감 같은 것이다. 꾀부림이 부족한 나는 그녀의 기질을 닮고 싶기도 하고, 명확한 관계 설정을 추구하는 신세대 할머니의 색깔을 부러워하기도 하며, 어머니가 나를 키운 것처럼 내가 아이들을 건강하게 잘 키우고 있는지 반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