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코, 내가 이겼네!

by 반고


시아버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향년 99세. 시할머니에게는 손녀, 손자가 한 명씩 있는데, 이들이 나의 형님과 남편이다. 어릴 때는 할머니를 차지하려고 남매 사이에 살벌한 쟁탈전이 있었다고 한다. 시할머니와 손주의 추억 쌓기는 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증손주를 얼마나 예뻐했는지는 잘 안다.


포도 한 알


형님이 둘째 출산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형님은 첫째를 친정에 맡기고 병원으로 향했다. 유학 중이던 나와 남편은 겨울방학을 맞이해 잠시 서울에 머물렀다. 집에는 시할머니, 우리 부부, 그리고 두 돌 된 조카가 있었다. 할머니는 아기를 보고, 나는 식사 준비를 했다. 시댁에는 아기용 식탁 의자가 없어서 접이식 상에 차렸다. 식사를 마치고 포도를 내왔는데, 다리가 저렸던 남편이 식탁으로 이동하자고 했다. 조카를 무릎에 두고 디저트를 먹던 남편은 갑자기 아기를 식탁 위에 앉혔다. 아기는 망설임 없이 과일 그릇으로 손을 뻗어 포도 한 알을 집었다. 열심히 주물럭거려 포도 한 알을 얻은 아기는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증조할머니 입에 포도를 넣었다. 증조할머니가 자신에게 포도를 먹여준 대로 따라 했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 감동했다가, 이내 나라면 먹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증손자가 꼼지락거린 포도 한 알을 기쁘게 받아먹은 시할머니가 대단하게 보였다.


보드게임과 가위바위보


장례식장에서 시할머니의 증손주에게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는지 물었다. 이십 대인 조카는 어릴 때 증조할머니와 다이아몬드 게임하던 게 가장 즐거웠다고 했다. 다이아몬드 게임은 동그란 플라스틱 말판에 알록달록한 별을 따라 말 열 개를 반대편으로 옮기는 게임이다. 그때 시할머니는 팔십 대였는데, 간발의 차이로 이긴 후 더 하자고 조르는 아이들이 지칠 때까지 게임을 해주었다.


조카들보다 몇 년씩 어린 우리 집 아이들은 증조할머니와 했던 가위바위보를 떠올렸다. 둘째가 유치원생일 때, 시할머니는 늘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했다. 할머니가 이기면 “아이코, 약 오르지? 내가 이기니까 약 오르지?” 하며 아이들과 놀아주는 거다. 아이들은 증조할머니가 약을 올리며 억울하면 한판 더하자고 하는 게 재미있었다고 했다. 첫째 증손주를 만났을 때만 해도 할머니는 건강이 괜찮았지만, 세월이 흐르며 거동이 불편해졌다. 우리 아이들이 조금 컸을 즈음에 할머니는 보드게임에서 은퇴하고 움직임 없이도 할 수 있는 가위바위보로 갈아탔다. ‘약 오르지~’는 증조할머니의 전용 멘트가 되어, 증손주들과 전화를 끊을 때도 약 오르지~하고 말하곤 했다.


시할머니가 증손주들과 잘 놀아주었다는 건 알았지만, 아이들이 이 정도로 증조할머니와의 시간을 소중히 여겼는지 몰랐다. 청년이 된 증손주들이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일화를 나누는 걸 보며, 언제나 아이들 눈높이에서 함께 해준 그녀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쑥개떡과 초코칩쿠키


시할머니를 처음 만나게 된 2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만남은 주로 명절에 이루어졌다. 시할머니는 왕성하게 요리하던 시절을 뒤로한 후라, 조리에는 관여하지 않고 맛 평가단이 되었다. 장보기나 메뉴 선정에 관여하지 않던 시할머니가 어느 해에는 직접 만든 칼국수 면을 가져왔다.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밀어 납작하게 썬, 두께가 일정하지 않은 면이었다. 온 가족이 먹기에는 양이 적어보였지만, 짐 속에서 국수 봉지를 꺼내는 할머니의 손은 더 없이 순수했다. 손자가 좋아한다며 쑥개떡을 만들어온 적도 있다. 내 입맛엔 달콤한 소가 들어있지 않아 밋밋했는데, 손가락 자국이 찍힌 커다란 떡은 가족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한번은 내가 설날 디저트로 초코칩 쿠키를 만들어갔다. 시할머니는 쿠키를 맛보고 이렇게 말했다. "손부 덕분에 이런 걸 다 먹는구나. 개떡 같이 넙적한게 달고 맛있네~" 그러고보니 우리 둘은 절기에 맞지 않지만, 각자 잘하는 음식을 나누었던 공통점이 있다.


할머니의 별명


사흘 동안 장례식장에 머물며 할머니의 호칭을 새로 알게 되었다. 첫째 손주인 진아가 어릴 때는 다들 그녀를 진아 할머니라고 불렀다. 손녀가 클 때까지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내가 결혼할 무렵 시할머니는 안양에 거주했는데, 그래서인지 모두 안양 할머니라고 했다.


시할머니가 99세에 돌아가셨으니 친구나 형제는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자연스럽게 고인을 알던 사람인 문상객보다 상주인 시아버지를 위로하러 온 조문객이 많았다. 몇 안 되는 문상객 중 특히 눈물을 많이 흘리던 이는 할머니의 조카였다. 두 사람은 어릴 때 같이 자랐다고 했다. 그녀는 이야기 중에 할머니의 옛 호칭을 알려주었다. 시할머니의 존함 마지막 글자는 ‘열’인데, 형제 중 막내라고 이름에 ‘끝’을 붙여 “끝열아!” 하고 불렀다고 한다. 할머니도 오빠가 있고, 별명이 있는 사람이었구나! 100세를 앞두고 눈을 감으신 노 할머니가 더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끝열이, 진아 할머니, 안양 할머니로 통하던 그녀는 할머니를 잊지 말아 달라는 듯, 제일 아꼈던 손주 진아의 생일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