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여유로움

by 반고

밤 산책


평일 저녁 9시, 나는 한 고등학교 운동장을 걷는다. 삼십 분 뒤 자율학습을 마치는 첫째를 데려가는 게 나의 임무다. 지난 2년간 코로나 여파로 자율학습이 사라졌다가 올해 다시 생겼는데, 처음 좌석을 배정받은 아들은 이 기회를 소중히 여겼다. 학교와 집은 지하철로 두 정거장 떨어져 있다. 걸어가지 못할 거리는 아니지만, 무거운 가방을 메고 밤길을 걸으면 지치니까 차로 태우러 가기로 했다. 라이드를 시작하고 며칠은 5분 일찍 도착해서 핸드폰을 봤다. 깜깜한 데서 스마트폰을 보니 피로가 몰려와 그만두었다. 다음 시도는 맨손 체조였다. 차에서 내려 몸을 움직일 때는 좋았는데, 곧 하교 시간에 맞춰 줄줄이 도착하는 차량 불빛에 눈이 부셨다. 마지막으로 짜투리 시간에 뭘하지 고민하다 생각을 바꿔보았다. 5분 일찍이 아니라 30분 일찍 주차장에 가서 학교 종이 울릴 때까지 운동장을 돌았다. 끝날 시간에 딱 맞춰서 나오지 않고 미리 출발했더니, 무료하게 기다리던 시간이 몸과 마음을 위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딱딱한 내 머리에서 이런 유연한 해결책이 나오다니! 나에게 이런 팁을 가르쳐준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다.


일찍 가는 게 남는 거다


어머니는 늘 여유롭다. 약속을 잡으면 먼저 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목적지 동네에는 한 시간 미리 도착하고, 모임 장소에는 삼십 분 일찍 입장한다. 그녀는 말한다. “시간, 차비, 체력을 써서 멀리까지 갔는데, 볼일 하나만 보기엔 아깝잖니~” ‘그럼 피곤하더라도 하루에 두 탕 뛰라는 말인가? 70대 어머니 체력이 나보다 낫네’ 생각했더랬다. 그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어딜 들어가고 누굴 만나야 재미있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했다. 그녀는 일정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고도 주변 환경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외출을 즐긴다.


어머니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자극이 감상 대상이다. 날씨가 좋은 날 서울 강남에서 약속이 있으면, 건축물을 구경한다. 종합예술작품인 건축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사진으로 남긴다. 큰 건물 앞에 설치한 조각을 살피며, 도시 전체를 미술관으로 생각한다. 유동 인구가 많은 동네에서는 현수막을 유심히 읽는다. 교보생명 벽에 붙은 시 한 구절에서 감성을 충전하고, 관공서 앞 강의 안내 플래카드에서 세상의 키워드를 접한다. 차가 다니지 않는 주택가 골목길에서는 정답게 꾸민 가정집 외관과 개성 넘치는 상점 간판을 구경한다. 정처 없이 방황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문화를 탐구하는 70대 할머니의 열정이라니, 내 어머니지만 정말 멋지다.


시간 부자

어머니도 젊을 때는 육아와 살림에 치여 동동거리며 살았다. 우리 집은 식구가 많아서 장 본 것을 집까지 나르는 것이 큰일이었다. 어머니의 하루 중 물건을 구매, 운송, 정리하느라 보낸 시간을 따져보면 상당했을 것이다. 자녀들이 출가하고, 아버지와 둘이 지내면서 살림 규모를 줄이고,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외출할 일이 있으면 미리 채비하고 <동네 한 바퀴>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동네 투어는 여러 장점이 있다 해도, 식당이나 카페 같은 실내 약속 장소에 반 시간 일찍 도착하는 것은 무슨 유익이 있을까? “엄마,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하면, 뭐 하면서 시간 보내세요?” 어머니는 할 일이 많다고 하였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올 사람들을 환영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참석자들은 약속 시간 직전까지 소통의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식당 앞 주차장 상황은 어떤지 묻고, 모임 장소로 퀵 서비스를 시켰는데 받아달라고 부탁하고, 조금 늦으니까 먼저 음식을 시켜달라든지 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일찍 오는 사람으로 알려졌기에, 사람들은 갖가지 일을 그녀와 상의한다. 주로 SNS 단체 대화방에서 일어나는 이런 활동을 통해 어머니는 온라인 컨시어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게 다가 아니다. 어머니가 말하길, 일찍 가서 제일 좋은 점은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라고 했다. 목적지에 먼저 가서 사람들이 오기 전에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면, 심리적 안정감이 생겨 말실수를 덜 하고, 기운을 비축한 만큼 남의 말을 경청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깊은 뜻이 있었다니… 세월이 갈수록 멋있어지는 어머니의 모습은 이런 면이다. 정서적 풍요로움을 느끼며 시간 부자로 사는 그녀의 비법은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기다림과 효율성


수년 전, 어머니가 어떤 일이든지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계획에 옮긴다는 걸 알았을 때, ‘음, 신기하군’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내 친구 소라님과 어머니한테서 시간 사용에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몇 주 전 소라님과 나는 이웃 도시 도서관을 방문했다. 독서모임 종강식을 위해 동아리 활동실을 예약하려 한 것이다. 대전 시민인 우리는 공간 예약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세종시에 사는 한 회원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도서관 주차장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았다. 장소 섭외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가나 보다 했는데, 소라님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근처 카페 가서 차 한잔 마시면서 다른 안건 마무리 짓고 있으면 어때요? 최대 30분 예정으로요. 그 사이에 우리 회원한테 전화가 올 수도 있고요.” 그날 우리는 인근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가, 독서모임 회원의 전화를 받았다. 그 회원이 IT 사용에 어려움이 있을지 몰라서 온라인 예약을 도와주려고 기다렸던 것인데, 문제없이 잘 해결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물었다. “소라님은 그분한테 금방 전화가 올 줄 아셨어요? 어디 공중목욕탕 같은 데 있어서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잖아요. 혹시 예지력 있으세요? 암튼 대단해요.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는 게 진짜 대단해요.” 그녀는 그게 뭐 놀랄 일이냐며 웃었다. “자꾸 하다 보면 알게 되어요. 옆 도시까지 왔는데, 시간이 더 걸려도 매듭짓고 가면 마음이 훨씬 편하잖아요.” 친구의 지혜가 부러웠다. 소라님과 나의 어머니는 시간 배분을 세세하게 하지 않고 굵직하게 나눈다. 큰 틀을 먼저 잡아 놓고, 대세에 지장이 없으면 중간에 일어나는 소소한 변화는 받아들인다.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여유와 균형을 찾은 인생 선배의 노하우가 내게도 스며들면 좋겠다.


달밤에 중고거래

다시 학교 주차장으로 돌아가자. 며칠 전, 첫째가 차에 타자마자 잠깐 핸드폰을 확인하겠다고 했다. 그날 밤에 당근 거래가 있다며, 판매자가 학교 근처에 사니 연락이 닿으면 들러서 물품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요즘은 졸업사진 찍을 때 교복 대신 특별 의상을 많이 입는데, 첫째는 이를 위해 중고 해리포터 의상을 구했다.

“그래? 언제 가지러 가면 돼?”

“그게 확실치가 않아. 내가 산다고는 했는데, 시간은 아직 안 정했어.”

“지금 전화해보고 가지러 간다고 하면 어때?”

“당근은 전화번호 없어.”

“그렇구나. 그럼 어떡하지?”

“여기 판매자 정보에 이 사람이 평균 30분 이내로 답한다고 뜨거든. 당근 앱에 자주 들어오는 사람인가 봐. 답장이 오는지 조금만 기다려볼까?”

“좋은 생각이네. 차에서 좀 쉬고 있자. 집에 갔다가 연락받고 다시 나오나, 여기서 좀 기다리다 물품 찾아서 집에 가나, 시간은 비슷할 것 같아. 그리고 한번 집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싫거든.”

“나 30초만 생각해볼게… 그냥 가자, 엄마. 언제 연락 올지 모르는데, 계속 기다리면 좀 그래. 가서 씻고 할 일 좀 하다가 연락 오면 그때 생각해볼게.”

“오케. 그럼 출발한다.”


집에 와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TV를 켰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는 데 아들이 다가왔다.


“엄마, 바쁘세요?”

“왜, 연락 왔어?”

“어, 지금 와도 된대요. 문 앞에 둘 테니 송금하고 가져가래.”

“허, 딱 30분 만에 답이 왔네.”

“그러게…”


나는 열쇠를 들고 운전석에 앉았다. ‘내가 기다리자고 했잖아!’ 말하고 싶었지만, 미안함이 가득한 아들 표정을 보고 조용히 운전만 했다. 첫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쫌만 더 기다릴걸. 괜히 기름 낭비, 시간 낭비. 근데 엄마는 금방 답이 올 줄 어떻게 알았어?”

“몰랐지. 하지만 당근이 30분 만에 답하는 사람이라고 했다며. 평균적으로 그렇다는데 한번 믿어볼 만하지. 어차피 집에 왔다가 다시 가면 그보단 시간을 더 쓰니까.”


평일 밤 11시, 판매자의 아파트 단지는 주차장이 부족했다. 나는 시동을 켠 채로 차에서 기다리고, 첫째는 물건을 가지러 갔다. 집에 오는 길에 내가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아까처럼 기다릴까 말까 결정해야 할 때, 한번 기다려본다는 마음은 소라 님한테 배운 것 같아. 외할머니 영향도 있는 것 같고.”

“역시 내공이 센 사람들은 다르구나. 아까는 답이 올지 안 올지도 모르고 기다린다는 게 내키지 않았는데, 해보니까 기다리는게 더 빠른 길이었어.”


시간을 여유 있게 쓰면, 생각도 여유가 생긴다. 나는 어머니와 친구 덕분에 안 그래도 바쁜 삶에서 헉헉대지 않고 한 템포 늦추는 법을 배웠다. 내가 사십 대에 깨우친 노하우를 첫째는 십 대에 배웠으니, 달밤에 엄마를 귀찮게 한 결과로는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