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사람 냉장고에 익숙하게 맥주를 채워 넣는 일상.
오늘도 타인의 집에서 익숙하게 냉장고를 열어 좋아하는 맥주를 가득 채우며 문득 '지금까지 몇 개의 냉장고를 열어봤지?' 생각했다. 기억을 더듬어 그간 열어본 냉장고 모양을 떠올리니 벌써 19개나 됐다. 세계여행을 시작한 지 200일이 훌쩍 넘은 지금, 아직까진 19개의 냉장고와 집의 모습이 선명하지만 여행이 무르익으면 일부 냉장고는 아득한 기억의 골짜기로 빠지리라. 기억의 저편으로 향할 냉장고들이 아쉬워할까 봐 잊기 전에 남편과 치킨 앞에 앉아 그간 머물었던 집의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제일 맛있는 닭다리를 집어 들고 한 입 베어 물어야 할 타이밍에 이런 어려운 질문이라니... 물론 닭다리에 집중해서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니라... 그간 경험한 19개의 대문 뒤의 공간은 저마다의 매력을 가득 안고 있었다. 차라리 '어떤 냉장고가 인상적이야?'라는 질문이 답변하기 편할 텐데!
냉장고는 집주인을 닮아있는데, 19개의 냉장고 중 가장 기억의 남는 냉장고는 발리 짐바란에 있다. 냉장고의 주인은 환한 미소와 털털한 매력으로 게스트를 무장해제하게 하는 매력을 가진 호스트 릴로. 언제는 그녀의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데, 불쑥 나타난 릴로가 '필요한 게 있다면 꺼내 써.'라는 게 아닌가? 마침 고추가 필요했는데, 주인 있는 냉장고가 부담스러워 머뭇거리던 찰나에 아주 고마운 말이었다. 그렇게 열어본 냉장고의 모습은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릴로의 모습이었다.
덴마크인 남편을 위한 치즈와 햄, 빵이 종류별로 있고, 인도네시아인인 그녀와 그녀의 친정가족을 위한 재료들도 갖춰져 있는 냉장고는 없는 게 없었다.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있어야 할 것들은 제자리에 있는, 갖가지 신선하고 다양한 재료들이 가득 찬 냉장고가 식사 후 우리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던 릴로와 남편을 꼭 닮아있었다.
언제는 낯선 이에게 지나치게 정을 주면 힘들지 않을까 싶은 불필요한 오지랖스러운 걱정이 머릿속 물음표로 달렸지만, 릴로의 말에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난 에어비앤비 운영하는 게 정말 재밌어.'라고 털털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릴로를 보니 '아, 정말 쓸모없는 생각이었구나.'싶더라. 덕분에 훗날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되어있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상상은 꽤 흥미롭고 재밌었다. 아마 향후 몇 년 후에 나도 호스트가 되어있지 않을까?
역시, 나에게 여행은 새로운 꿈을 갖게 해 준다.
최악의 집..? 퍽퍽한 닭가슴 살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먹기 위해 포크로 두드리며 집중하는데 입맛이 뚝 하고 떨어졌다.
저마다 여행 중에 기대되는 순간이 있을 텐데, 난 옛날부터 지금까지 '지낼 공간'이 가장 궁금하고 기대된다. 낯선 대문 앞에 서서 그 문이 열리기 전까지 그 대문 뒤에 어떤 공간이 펼쳐질지 상상해본다. 기다림 끝에 열린 대문 틈으로 보이는 타인의 취향이 가득 담긴 공간에 이끌리듯 들어가 익숙하게 그 공간을 한 바퀴 돌아보며 이것저것 만져본다. 아마 일종의 영역표시랄까...?
그렇게 잔뜩 기대를 품고 들어가 기대가 만족으로 변하는 순간 집에 대한 매력이 높아진다. 이를테면 너무나도 내 것 같은 침구, 모든 걸 갖추어 요리하기 좋도록 정리 정돈된 주방이 내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분이다. 그런데, 낯선 공간에 들어서는 설렘과 기대는 가끔 실망과 불쾌감으로 바뀔 때도 있다.
애리조나의 낯선 대문을 열고 들어간 공간은 빈티지스러운 매력이 가득한 집이었다. 네 명이 머물기에 좀 좁아도 빈티지 탁상과 포스터 그리고 소품들이 주는 첫인상은 꽤 매력적이었다. 영역표시를 하기 전까지는...
늘 가지고 다니는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넣기 위해 냉장고를 연 순간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와 먹다 남은 커피음료 그리고 부스러기가 눈에 띄었다. '이상하다? 우리만 지내는 공간인데..?' 미처 정리하지 못했겠지 싶었지만 싱크대 서랍을 열어보곤 정리를 안 하는 집인걸 확신했다. 스푼과 포크가 놓인 통에 알 수 없는 부스러기들, 컵이 놓인 서랍에도 똑같은 부스러기들이 가득한 게 아닌가? 조리할 수 있는 도구는 있는가 열어보니 과장 보태 100년은 더 돼 보이는 녹슨 프라이팬과 냄비가 '나 쓰게?? 쓸 수 있겠어??'라며 쳐다보는 거 같았다. 화룡정점은 전자레인지. 이럴수가, 물을 데우기 위해 연 전자레인지엔 음식물이 잔뜩 들러붙어있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래, 그래도 지낼 만은 했다. 큰 히터 소리에 새벽에 자다가도 깜짝 놀라 깨고, 이불엔 알 수 없는 검정들이 묻어 있었지만 그래, 그래도 참고 지낼만했다. 분명 수많은 리뷰에 'Very Clean'이란 단어를 많이 봤는데... 도무지 어디가 클린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잘 지냈다.
그렇게 저녁이면 들어가기 싫은 집에서 10일을 지내고 퇴실 한 날, 호스트에게서 청소비를 더 달라는 메시지가 왔다. 이유는 작은 테이블을 제자리에 두지 않았고, 쓰레기를 바깥에 버리지 않았으며(별다른 지침이 없어 버릴 건 버리고 퇴실하는 날 남은 쓰레기는 분리하여 잘 모아두었다.), 옷걸이 몇 개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는 게 그녀를 화나게 했나 보다. 남편은 좋게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감수했던 모든 사항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우리에게 무례하다며 오히려 화를 내는 게 아닌가? 그렇게 몇 번을 더 이야기했지만 답변이 없던 그녀는 우리에게 쓰레기 같은 리뷰를 남겨두고 $30의 청소비를 청구하였다. 예약할 때 청소비 $60을 냈는데.. 그건 어디에 쓰이는 걸까..?
닭가슴 살을 살사 소스에 찍으며 생각해보니...
여기 냉장고도 주인 닮아 있었구나..
가끔 주변에서 묻는 질문에, '나는 전혀... 네버 충분하지 않아.'로 답변한다.
긴 여행은 익숙함으로 변하지 않는다. 낯선 순간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 내공을 쌓아가는 과정 들일뿐. 여행의 순간들은 온통 낯선 것 투성이다. 그렇게 타국에서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하루 종일 보고 듣고 느끼며 알게 모르게 쌓이는 피로를 풀어줄 공간은 중요하기 때문에 아마 앞으로도 공간에 대한 집착은 끊임없을 거 같다.
이 낯선 순간들을 경험한 후
정착한 나의 집 냉장고는 어떤 모습일까?
@bangrangbubu_
@yell.k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