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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부부 Mar 02. 2020

기회의 땅은 이제 절망의 땅인가

누군가에겐 미국은 절망의 땅이 되었고, 그 바닥에서 살아가고 있다.

"2년 전만 해도 이 정도로 많진 않았어."


포틀랜드의 올드타운 한가운데, 코 끝으로 쿰쿰한 냄새가 거리 곳곳에서 풍겨온다. 밝은 대낮, 차가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는 차가운 도보 한가운데에 그 시끄러운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누워있는 사람이 있다. 아니, 사람'들'이 있다. 딱 보기에도 오래된 듯 보이는 이불을 온몸에 둘둘 말고,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 바닥 위에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사람들. 그들은 집을 잃은 사람들이다.


해 질 무렵의 샌디에이고의 다운타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간단하거나 근사한 저녁식사를 할 시간이다. 그 기분 좋은 얼굴로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 또는 친구나 직장동료와 함께 레스토랑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어떤 누구는 끼니를 때우기 위해 식당 근처의 쓰레기통들을 뒤지고 있다. 누구가 아닌 누구'들'이다.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으로 가는 길. 해가 쨍한 한낮에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공원과 집들 사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는 차들 중 조수석 유리가 깨져있는 차가 눈에 띈다. 간 밤에 일어난 일인 듯 유리 파편이 이곳저곳 바닥에 흩어져 있는 모습에 놀란 우리는 혹시라도 범인이 근처에 있을까 봐 재빨리 발을 움직여 이동하면서도 블록마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을 마주쳤다. 이상하다. 미국은 원래 이런 곳인가?


남편의 말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많은 홈리스들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 있는 3개월 동안 수도 없이 그들과 마주쳤다.




"누가 미국 가면 다운타운은 위험하다고 했는데..."


포틀랜드 다운타운의 외곽에 위치한 정말 조용한 주택가 그리고 남편과 걸어서 10분 거리의 카페를 가는 길. 폐쇄가 된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오래된 건물을 지나는데 흠칫 놀라고 만다. 눈이 토끼같이 시뻘게진 사내 둘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니 무서운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투산 애리조나 대학 근처 조용한 동네. 친구가 "여기 며칠 전에 총기 사고가 있었어요. 조심해요."라고 우리에게 경고했다. 학교는 안은 안전 하다고 하더만 소화 불량으로 잠시 학교 안을 산책하고 있을 때 경찰차 두 대가 학교 안으로 급히 들어왔다. 소란스러운 주변에 우리는 행여 사건에 연루될까 쫄보가 된 마음으로 더부룩한 배를 꺼뜨리지 못한 채 황급히 돌아가야 했다.


시애틀 중심가와 떨어진 조용한 마을. 마트를 가기 위해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지하차도 위의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데, 한 남자가 박스에 'PLEASE GIVE ME A RIDE.'를 적어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여행자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다음 날, 그 자리에는 또 다른 히치하이커가 있었고 또 다른 날에는 다른 이가 금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장을 보고 그 옆을 지나야 하던 우리는 행여 해코지라도 할까 그 가파른 언덕을 숨이 차게 오르기도 했다.


과연, 다운타운 이외의 곳들은 그나마 안전한 게 맞는 걸까?

밝은 낮에도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까?




"엄마 나 출세했지 뭐야~?!"


세계여행 중, 미국 여행이 정해졌을 때 어찌나 신이 나던지. 전화가 오면 전화 한 사람들에게 신이 나서 사방팔방 다 자랑하고 다녔다. 미국 간다고. 한국에 잠시 들렀을 때 엄마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엄마 나 출세했잖아~ 미국도 가보고 말이야~"라며 장난도 치고,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 앞에서도 "아빠 나 출세했지 뭐야~ 미국 땅도 밟아보고~" 라며 아빠와 함께 엉덩이 춤을 추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에서 멀리 벗어나 본 적 없는 내가 '미국'을 간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으며 뉴스에서 매번 나오는 '세계 최강국'을 방문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미국 땅이 뭐가 그렇게 좋아 보였을까?


미국 땅을 밟은 지 3개월을 다 채워가는 지금, 미국에 대한 로망은 꺼져갔다. 기회 천지일 것 같던 그 기대감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미국은 이제 커다랗고 아름다운 절망에 가까운 나라로 보였다.




"나, 이제 미국에서 살고 싶진 않아."


언제나 그렇듯 손을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남편과 길을 걷는 중, 남편이 나를 지그시 보며 말을 건네 왔다. 세계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남편은 늘 미국에서 살아가는 것도 좋겠다고 이야기했었다. 나에게도 미국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이제 그도 미국에서 별로 살고 싶지가 않단다.


사실 미국의 대자연은 너무나도 멋있고, 도시의 상점들도 정말 매력적인 곳임은 분명하다. 샌디에이고의 평화로움도 정말 좋고, 샌프란시스코의 자유로움도, 시애틀의 차분함과 포틀랜드의 올드함 모두 다 매력적이고 좋다. 하지만, 위태롭다.


종종 일반인들 허리춤에 보이는 권총에 겁이 나고, 길에 주차되어 있는 차 유리가 깨진 모습도 두렵다. 카페 밖에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노숙자의 표정도, 버스 정류장에 가만히 서서 버스를 타는 사람들을 노려보는 이상한 사람도, 눈이 시뻘건 사내 둘이 지나가는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도, 도시 아무데서나 변을 보는 이상한 사람들도, 길가에 떨어진 주삿바늘도, 그 한적하고 아름다운 공원이 밤만 되면 위험한 곳으로 바뀌는... 그 모든 것이 답답해졌다.


과연 이 땅은 기회의 땅이 맞는 걸까?

차디 찬 바닥에 박스 몇 장으로 간신히 버텨가는 공허한 눈을 가진 그들과 마주치는 순간, 기회는 절망이란 다른 뜻도 있지 않을까 싶어 진다.




우리가 겁쟁이라 그런가?

아니면 너무 호들갑스럽게 받아들여서 그런가?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린, 여기선 살아가기가 힘들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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