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공간이 있기 전과 후.
2020년 3월, 많은 게 흔들렸다. 세계 어딘가에 우리가 살 곳을 찾기 위한 여행은 멈춰버렸고 한국에 도착한 시점부터 마치 오랜 꿈을 꾼 듯 과거가 되어 아득히 멀어져 갔다.
한국 땅을 밟았을 때, 직감적으로 우리나라에 오래 있을 거 같은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세계여행을 할 수 있겠지 싶은 마음보다 약 8개월 간 타국을 돌아다니며 지친 몸과 마음을 씻어 말려둘 곳이 간절해졌다. 디지털 홈리스의 삶에 쉼표가 필요한 지금 우리가 가진 거라곤 통장에 든 적은 돈과 밥벌이를 담당하는 노트북 두 대. 그리고 우리 둘 뿐.
'어디에서도 정착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진 우리 부부는 멈춰진 여행이 아쉬워 여전히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에 뿌리를 내려보기로 했다. 대한민국이지만 대한민국 같지 않은 대한민국. 대한민국이 아니라 탐라국이라며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는 그곳. 우리는 제주에 정착했다.
세계 여행자들이 제주 곳곳에 정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처럼 여행을 멈추는 게 아쉬웠겠지. 살 집을 어렵사리 구해 작은 뿌리를 내린 곳은 역시 환상적이었다.
이국적인 식생과 에메랄드빛 바다, 섬의 중심부에 솟아오른 한라산. 어디로 발길을 돌려도 산 아니면 바다. 분명 여행을 마치고 우리나라에 돌아왔는데 여전히 세계 어딘가의 아름다운 섬에 있는 기분이다. 다른 게 있다면 사람들과 말이 아주 잘 통한다는 거?
혼인신고서 인주가 마르기도 전에 세계여행을 떠났던 우리에게 '고정적인 공간'이 주는 매력이 대단했다. 침구에 곰팡이가 슬어 호스트에게 연락할 일도, 카페라던 위층이 저녁만 되면 클럽으로 변해 시끄러울 일도, 냉장고에 넣어둔 우리 음식을 타인이 가져갈까 걱정하는 일도, 방 밖에 있는 화장실을 눈치 보며 쓰는 일도, 내일이면 타 지역으로 이동해 짐을 바리바리 싸야 하는 일도 없는 그런 공간.
물론 그 모든 시간들이 값지고 재밌는 경험이었지만, 공간에 발을 딛고 보니 어릴 적 꿈꿔왔던 결혼 로망들이 발 끝에서부터 새록새록 피어나 정수리에서 넘쳐흘러 났다. 저녁이 되면 내가 차린 음식들로 가득한 식탁 위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술 한 잔 기울이는 그런 거? 남편과 둘이 집에서 좋아하는 영화 보는 그런 거? 내 공간 내가 좋아하는 물건과 남편이 좋아하는 물건으로 가득 채워가는 그런 거? 소소한 취미들이 생겨 집에서 사부작 거리는 그런 거? 볕 좋은 날 청소 싹 마치고 이불 널어둔 후 차 한잔 마시는 그런 거?
밖에서 덕지덕지 몸에 붙이고 온 부정적인 것들을 씻어 말려낼 수 있는 곳. 공간이 주는 위로와 안정은 대단했고 그렇게 벌써 2년 동안 제주에 몸을 널어놓고 살아가고 있다.
근데, 시간이 지나니 과거의 그 불안정한 여행이 그리워진다. 문득 마음속에서 여행욕구가 울컥 솟는다.
많은 것이 변해버린 지금…
우리, 다시 여행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