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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부부 Feb 08. 2020

아이에게 '묻는 행위'를 하는 부모들

세계여행이 마치 육아 교육의 현장처럼 보인다.

"너 수프 먹을 거야?"


패스트푸드 점에서 주문 차례가 다가왔을 때, 세네 살쯤 된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아이는 어떤 대답을 할까? 특히 아빠 다리 사이에서 깔깔대며 술래잡기를 하는 자녀들에게 질문을 한다면? 이 아이들은 부모가 한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할까? 노는 상황에 더 집중한 아이들에게 부모의 질문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미국 COSTA VIDA 멕시칸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걸 먹은 날.


대답이 없는 아이들에게 부모는 어떻게 다시 의사를 물어볼 수 있을까? 과연 의사를 다시 물어야 할까? 놀고 있는 아이가 엄마 다리에 찰싹 붙었을 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이의 엄마는 다시 한번 아이에게 '수프 먹을래?'라고 질문을 했다. 엄마의 품에 안겨서도 여전히 술래잡기에 심취했는지 사자 흉내 내는 오빠만 바라볼 뿐 역시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럼 그 부모는 수프를 주문했을까?




"다시 물을게, 너 수프 먹을 거야?"


세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에게 끊임없이 의사를 물어보다니... 그저 내 기준에서 신기할 뿐이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엔 물음표 세 개가 연속으로 달렸다.


Q1. 내가 부모였다면 세 살 된 아이에게 의사를 물어보고 음식을 주문했을까?
Q2. 대답이 없는 아이에게 다시 한번 의사를 물어보았을까?
Q3. 그래도 대답이 없다면 나는 수프를 주문했을까?


이 상황의 나라면 아마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아이가 좋아하거나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유추해 음식을 대신 주문해 주었을 것이다. 설령 아이에게 의사를 물어봤어도 대답이 없다면 다시 질문하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아이가 수프를 '좋아하거나', '할 수도 있다던가', '먹을 수 있겠다'는 내 판단으로 수프를 주문했지 싶다.


하지만 실제 이 상황에서 아이의 부모는 수프를 주문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대답이 없는 아이들에게 전혀 짜증이나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아이의 몫이 없는 식사 주문 때문에 아이가 밥을 못 먹었을까? 아이의 아빠가 본인의 몫을 아이들에게 '먹어 볼래?'라고 물어본 걸 보면 아마 그건 아니었지 싶다.


그들의 묻는 행위를 지켜보며 '왜 저렇게 아이에게 쉴 새 없이 질문을 할까?'라는 또 다른 물음표가 달렸다. 그리고 물음표 끝에 어렴풋이 기억 속에 묻혀 있던 편린 하나가 수면 위로 올랐다.




"아빠, 냉장고에 뭐가 있어요?"


직장 다닐 때, 직원 한 분이 사무실에 아들을 데려온 적이 있다. 그때 당시 네다섯 살쯤 된 아이였는데 사무실 냉장고 앞에서 기웃대는 모습이 아마 뭔가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너는 이 냉장고에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이의 물음에 다시 물음표로 돌려주는 그를 보면서 내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아이는 턱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연신 고민하더니 '코끼리?'와 같은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게 아닌가? 그는 아이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어떠한 부정과 긍정의 신호 그리고 동요도 없이 아이에게 다시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그럼 우리 같이 이 냉장고에 뭐가 들어 있을지 열어볼까?'




"왜 아이에게 그런 질문을 한 거예요? 그냥 열어서 보여주면 빠르지 않아요?"


당시 20대 초반,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던 나에게는 5분 씩이나 냉장고 앞에 서서 고민하는 두 부자의 대화가 신선하고 의아할 뿐이었다. 아이에게 그냥 열어서 보여주면 1분 안에 끝나는 문제를 왜 그렇게까지 길게 두고 있어야 했을까?


아이가 자리를 비우고 슬며시 한 질문에 그는 '아이가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열어본 냉장고 속엔 아이의 상상과 다르게 음료와 주전부리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이는 실망한 기색 없이 오히려 신나는 표정으로 '이 초콜릿 먹어도 돼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리고 역시 아이의 아빠는 '몇 개가 먹고 싶은데?'라고 질문하는 게 아닌가.


그 외에도 아이와 아빠의 대화 속엔 늘 '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여행이 온통 아동교육의 현장처럼 보여."


결혼 한 아줌마가 되니 '나도 멀지 않은 미래에 엄마가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는 요즘, 세계여행을 하며 보이는 모든 것들을 육아 교육과 연결시키곤 한다. 이를테면 공연을 보기 위해 광장 바닥에 앉은 아이들이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던지다 못해 본인 머리 위에 뿌렸을 때 부모의 행동은 어떠한지 관찰하게 되는 것처럼...


Old Tucson에서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수 십명의 아이들이 모래 바닥 위에 앉아있었다.



아이의 부모가 'No'나 'Don't do that'과 같은 하지 말라는 뜻의 언어를 사용하는걸 아직까진 본 적이 없다. 대신 '왜'그런 행동을 하는지 묻는다. 반복되는 행동에도 부모는 강압적인 태도로 아이의 행동을 억제하지 않는다. 발리에서 만난 프랑스 부모는 두 살 된 딸의 칭얼거림과 고집에 화는커녕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손 짓이나 행동을 통해 말을 할 수 있도록 물어보고 기다려주었다.


그들의 육아에는 아이를 존중해주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의 '묻는 행위'는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느낌이다. 아이들이 원하지 않으면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꼭 해야 할 게 있다면 '왜' 해야 하는지 설명을 한다. 강압적인 요구가 아닌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여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말하기를 구사한다.


부모의 '묻는 행위'는 아이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와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 아닐까?




"좋은 엄마 되긴 글렀네..."


평소 짐작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지금까지 타인에게 물음표를 가장한 느낌표로 질문을 하지 않았나. 나의 질문들은 속으로 '판단'을 한 상태에서 타인의 '동의를 구하는 행위'이지 않았을까. 타인과 스스로에게 제대로 된 '왜?'를 질문해 본 적은 있을까.


내가 한 일에 대해 '왜'그런 행동을 했는지, '왜'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물음에 물음을 더하다 보니 혼란해지는 경험을 하며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문제점을 파악하고 고치려고 해도 뿌리 깊이 내린 '버릇'이 되어버린 행동은 쉬이 나아지질 않는다.


그들의 '묻는 행위'로 내 언행들을 돌아보면서 동시에 내 미래의 아이가 '왜?'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도록 부모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우선, 내 가치관이나 판단을 배제하고 묻는 연습을 해야겠지..




좋은 엄마가 되긴 어려워도 이렇게 계속 고민하다 보면

괜찮은 엄마 정도는 할 수 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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