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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호 Oct 24. 2021

51프로의 믿음

 “당신은 나를 얼마나 믿어?”

 “51프로!”

 “에게~ 고작?”

 “내가 50프로 믿는다고 하면 믿지 않는 거고, 51프로 믿는다면 백 프로 믿는다는 거야.”


 영화 <넘버 3> 속 대사다. 1프로의 믿음이라. 과연 그 깊이는 영화 속 대사만큼 온전한 믿음일까? 그러고 보면 단 1프로의 믿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안 되고를 결정기도 하니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는 않다.


 의심의 여지없이 항상 옳은 것이 있다. 바로 라면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라면 사랑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과거 아시안게임 육상 금메달리스트인 임춘애가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인터뷰 뒤로, 알고 보니 ‘개소주(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먹던 민간요법 중 보약의 일종)’도 먹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따라붙을 정도로 라면은 부실한 음식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라면은 훌륭한 한 끼 대체식품으로 성장했고, 이제는 전 세계 인스턴트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다. 국내 시장은 삼양라면의 공업용 소기름 사용 파동 이후 선두자리를 꿰찬 신(辛)라면이 무려 30여 년 동안 정상에 있었다. 그러던 중 선두 경쟁에 도전장을 던진 제품이 있었으니, 바로 레트로 식품의 강자인 오뚜기의 ‘진라면’이었다.

 진라면은 숫자 2에 주목했다. 배우 차승원을 내세운 광고의 내용은 이랬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게 진라면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니 아니면 어떻습니까?”

 “아우, 이렇게 맛있는데! 언젠가는 1등 하지 않겠습니까?”


 라면시장 내 2위라는 사실을 먼저 알리고, 노력해서 신라면을 밀어내고 1위에 오르겠다는 선전포고인 셈이다. 이후 전사적 차원의 지원과 투자를 통해 오뚜기 진라면은 2019년 여론조사 기관 닐슨코리아의 국내 라면시장 점유율 조사에서 처음으로 농심 신라면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2위 전략은 과거 미국의 렌터카 업체 에이비스Avis가 톡톡히 재미를 본 봐 있다. “우리는 2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심히 노력합니다.”라는 카피copy로 시장 내 게임 체인저가 되었다. 스스로의 단점을 언급하고 비전을 제시해 신뢰성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꾀한 것이다.


 스스로 부정적 정보를 공개해 반전을 이룬 사례는 광고 마케팅 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점이 있다. 부정적 정보나 약점이라 함은 스스로의 현재 위치를 명확히 인지하고 인정한다는 의미이지, 이해를 구하고 봐 달라 함이 아니다.


 “제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력해 보겠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너무 떨려서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자신은 없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처럼 전문성을 의심하게 하는 언어들은 전략이 아니다. 그냥 스스로 무능함을 드러내고, 실패에 대한 면피용이거나 실패에 대한 상처를 두려워한 예방접종에 불과하다.


 모 철강 회사 영업사원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진행하며 자기소개 스피치를 강조했었다. 긴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황에 영업사원을 대하는 고객들의 보수적인 태도를 들어, 명함을 건네는 순간 짧게 할 수 있는 자기소개를 준비하게 했다. 한 신입사원의 자기소개가 내 귀를 쫑긋 세웠다.


 “저희 회사의 철근이 저렴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회사보다 더 빠르게 원하는 만큼의 철근을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공사기일을 맞추지 못하면 건설비가 증가하는 현장의 애로사항을 반영한 내용도 한몫했지만, 이 짧은 말에는 두 가지 설득 기술이 구사됐다.


 첫째, 흡사 2위 전략과 같은 강점에 앞서 약점을 제시하는 전략이 맞아떨어졌다.

 둘째, ‘그러나’라는 대립 접속부사를 두 문장 사이에 구사해 강점을 명확히 부각시켰다.


 자신의 현 위치를 명확히 인정하고 더 나은 상황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좋을 결과가 따른 다는 긍정성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믿게 된다. 호감의 핵심이 진정성에 있다면 인정과 긍정은 신뢰의 시작이다. 앞선 자신 없음을 전제에 깔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에 비해 딱 한 걸음 더 나아갔을 뿐이다. 1프로의 믿음은 이 짧은 문장으로 충분하다. ‘신뢰(信賴)'는 이미지의 인지적 측면이기 때문이다.

 영단어 ‘trust'의 어원은 독일어 ‘trost'로 ‘편안함’을 의미한다. 누군가를 믿게 되면 정신과 마음이 편안해 지기 때문이다. 이는 상대에게 느끼는 전문성 및 신뢰감이다. 다양한 전문서나 논문에서 ’공신력‘이나 ’신뢰성‘으로 혼용 표기하기도 하는데, 공신력이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설득의 세 가지 요소 중 ‘에토스ethos'에서 시작되었다. 에토스는 청자가 화자의 자질을 표현하는 언어다.


 현실에선 사실 ‘무엇’을 이야기하는가에 앞서는 것이 ‘누가’ 이야기하는가이다. 아무리 객관적 자료와 논리로 무장했더라도 요즘 말로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라는 한 마디로 모든 게 의미 없어지는 순간이 있다. 국회의원이나 대학교수와 같은 ‘권위(權威)’를 가지고 있거나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처럼 ‘인기(人氣)’를 누리는 사람의 말은 더 잘 통한다. 누구나 살면서 느꼈을 흔한 감정과 교훈이라도, 이들이 대중 앞에 툭 던져놓는 순간 명언이 되는 마술 같은 일을 우린 자주 본다. 그래서 방송국 패널이나 전문가 집단은 항상 전직 의원이거나 교수 혹은 변호사들이다. 아니면 뭘 하는 회사든 상관없이 ‘CEO(대표)’라는 타이틀을 달기 위해 애쓰거나, 심지어 방송국에서 가져다 붙여 주는 경우도 많다. 이유는 ‘권위’와 ‘인기’는 사람들에게 ‘권력(權力)’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믿고 싶어 한다. 믿을 수 있어야 스스로가 편하기 때문이다. 권위에는 ‘동경(憧憬)’이 인기에는 ‘애정(愛情)’이 내포되어 있다. 동경과 애정의 한자를 다시 보라. 모든 글자에 공통적으로 ‘마음 심(心)’자가 들어있다. 그래서 신뢰는 이미지의 인지적 측면이면서 동시에 마음에서 비롯한 감정의 문제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앞서 신뢰의 어원이 편안함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렇듯 믿고 싶은 ‘마음’이 내재된 구도에서 권위를 가진 사람이나 인기인의 말은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권위와 인기 역시 신뢰와 동일어가 될 수는 없다.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실망을 안긴 권력자와 인기인은 차고 넘친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마음이다. 진심은 항상 옳다. 라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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