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 : 영화를 촬영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여배우 : 딱히 없어요.
사회자 : 아, 달리 말하면 모든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는 뜻이네요!
여배우 : …
사회자 : 촬영 당시 과자를 직접 구워 출연진들에게 나눠 주셨다는데, 어떤 마음이었나요?
여배우 : 음…
사회자 :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여배우 : 베쯔니!
한 영화 시사회에서 진행자와 여자 주인공이 잠시 나눈 이 대화는 일본 전역에 보도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 일화를 일명 베쯔니 사건이라 부른다. 베쯔니(別に)란 일본어로 ‘별로’라는 뜻이다. 여자 주인공은 당시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던 사와지리 에리카로 뛰어난 외모에 실력까지 겸비하며 아시아 전역에서 사랑받았다. 그러나 시사회 순간의 몇 마디 대화로 그간 쌓아왔던 모든 긍정적 이미지는 바닥으로 추락한다. 사람이 다치거나 죽지도 않았고, 법적으로 문제가 될 잘못을 한 것이 아님에도 ‘사건(事件)’이란 단어가 붙을 만큼 인터뷰의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한국 팬들 사이에서도 이 일화를 비꼬며 그녀를 ‘배춘희 여사’, ‘싸가지리’라고 불렀다. 국민 여동생에서 국민 비호감으로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베쯔니 사건은 이미지의 가변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미지의 정서적 요소인 '호감(liking)'은 진정성을 빼곤 설명할 수 없다. 사람들은 당신이 그들에 대해 얼마나 마음 쓰는지 알기 전까지는 당신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든 실력이 뛰어나든 관심이 없다. 팬들에 전혀 마음 쓰지 않은 사와지리의 일화는 진정성이 결여된 개인에게 뛰어난 외모와 능력이 무용지물임을 보여준다. 스티븐 유(유승준)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 정서를 통해 우리는 이미 충분히 확인했다.
“그 친구는 참 이미지가 좋아.”
“너 그러면 이미지 안 좋아져.”
우리가 흔히 쓰는 말들이다. 개인의 인상관리는 곧 이미지 관리와 같은 의미다. 공통점은 ‘상(象)’ 즉, 형상에 있다. 이미지는 ‘죽은 이의 얼굴에 대고 뜬 밀랍 틀’을 의미했던 라틴어 이마고imago에서 파생된 단어다. 이미지 형성의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는 사람의 마음이고, 하나는 그 마음에 자국 혹은 인상을 새기거나 남기는 대상이다. 그리고 이 마음의 자국과 대상 사이에는 유사성이 존재한다. 이미지란 한 감각 대상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감지된 모든 정보가 인간의 마음속에서 정보처리 과정을 거쳐 재구성된 하나의 상(象)이다. 그리고 일단 구성된 후에는 감각 대상이 사라져도 마음속에 존재한다. 반면 지각된 대상이 지속적으로 노출될수록 이미지는 변해간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지적인 능력이나 활동보다 첫인상의 이미지, 즉 성격이나 성질 등의 심리적인 기준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기존에 형성된 화자의 이미지는 상대에게 노출하는 언어에 따라 충분히 새로운 이미지로 바꾸어 갈 수 있다.
인상관리의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삶은 한 편의 의도된 연극이며, 모든 행동은 일종의 공연이다. 개인은 마치 연극의 배우처럼 무대 위에서 자신의 의도를 적절히 표현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들이 공연 중에 노출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스스로 드러내는 정보에 따라 인상과 이미지가 형성되고 이는 곧 개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사람들은 감각을 통해서 얻은 정보의 종합적인 평가를 통해 대상을 지각하고 하나의 이미지로 체계화한다.
이미지의 정서적 요소인 ‘호감(好感)'은 대상에 대해 좋고 싫음의 감정적 부분으로 이를 통해 상대의 가치를 평가하기도 한다.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의 행동은 가능한 긍정적인 특성을 들어 설명하고, 싫어하는 사람의 행동은 부정적인 특성으로 설명한다. 또 같은 행동을 평가할 때도 좋아하는 사람의 행동을 싫어하는 사람의 행동보다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가. 호감은 상대의 말과 행동의 원인을 평가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호감이란 당신이 가진 총체적 언어의 이미지로 결정된다.
45회 한국방송대상에서 앵커상이라는 분에 넘치는 상을 받던 날이었다. 당시 SBS를 통해 생중계되는 시상식에 가족을 초대했다. 소감은 짧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지만, 막상 수상자석 주변에 원로 배우인 최불암 선생님과 남자 연기상의 감우성, 예능 수상자 박나래 등 쟁쟁한 방송인들과 수상 차례를 기다리며 무척이나 긴장했다. 첫 수상자로 호기롭게 성큼성큼 무대에 올라 준비한 소감을 말하기 시작할 순간, 부모님이 눈에 들어오자 무심했던 마음이 뭉클해졌다. 감정이 실리며 준비한 소감보다 길어지자, 여지없이 빨리 수상소감을 마무리하라는 격렬한 수신호가 날 재촉했다. 덕분에 잔뜩 힘을 주어 준비했던 수상소감 말미를 제대로 망치고 말았다. 그렇게 수상자석에 정신없이 다시 돌아왔을 때 다음 수상을 기다리던 모 방송인이 내게 말했다.
“멋져요! 더듬은 부분이 제일 좋았어요.”
완벽한 사람보다 약간 빈틈이 보이는 사람이 인간적이다. 인간적이라 함은 호감의 한 측면일 수 있으며 실수나 허점이 오히려 매력을 더 증진시키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실수 효과(Pratfall Effect)라 부른다. 허점을 보이고 실수를 한 사람에게 오히려 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이 완벽해 보였는데, 그 역시 사람이구나.”
실수는 상대로 하여금 우월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결점을 드러낸 사람은 진솔하고 인간미 있게 느껴진다. 일종의 편안함이라 할 수도 있다. 편안함은 신뢰의 바탕이다. 결국 허점을 드러낸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풀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실수효과를 극명하게 보여준 익숙한 인물이 있다. 바로 손석희 앵커다. ‘물가불안 서민경제 위협한다’라는 주제로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하던 중 애그플레이션의 의미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계란의 ‘에그(egg)’를 이야기하는 것이겠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겠는가? 애그플레이션은 농산물 가격 급등으로 일반 물가가 상승하는 현상을 뜻한다. 농업의 애그리컬처agriculture와 물가 상승을 의미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인 셈이다. 그러니 ‘애그’는 계란의 ‘애그(egg)’가 아닌 농업의 ‘애그(ag)'가 맞다. 아무리 만들어진지 2년 남짓 된 신조어라 하더라도 이런 실수를 한 사람이 시사 앵커의 대명사인 손석희 교수라는 것은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청취자들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악성 댓글이나 비판보다는 ‘인간적이다’ ‘신선하다’ 등의 긍정적인 반응이 주를 이뤘다. 실수는 누구나 하며 심지어 사람만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로봇과 더 잘 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로봇을 완벽하지 않게 만들어라> 월스트리트 저널에 올라온 한 기사의 제목이다. 오스트리아 연구자들은 물건을 잘 떨어뜨리거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일명 ‘실수 로봇’과 완벽하게 작동하는 로봇 중 사람들과 잘 지낼 로봇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했다. 사람들의 선택은 ‘실수 로봇’이었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로봇이 실수를 했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심지어 믿음까지 느꼈다고 답했다. 실험을 진행한 연구진은 ‘사람들은 완벽한 로봇이 오히려 스스로의 단점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실수 로봇의 부족한 면에서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에펠탑의 극적인 반전을 통해 확인된 이미지의 가변성이 사물과 사람을 가리지 않았듯, 실수 효과 역시 대상이 사람인지 로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4)
실수는 예상치 못한 순간 찾아온다. 의도된 실수란 있을 수 없다. 아나운서 후배인 C양과 함께 시사종합뉴스를 진행하던 때였다. 그날은 초대 손님으로 배우 오정혜 씨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코너의 타이틀이 돌기 시작했을 때였다. 돌연 C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뭐라 수습할 시간도 없이 오정혜 씨가 출연자 자리에 앉아 마이크를 착용하며 당황해 물었다.
“아…무슨 일 있으세요?”
주객이 전도된 상황, 다급하게 내가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후배가 어제 경미한 교통사고가 있었는데요. 오늘 몸 상태가 온전치 않은 모양이에요. 죄송합니다.”
내 기분 때문일지 모르지만 그날 오정혜 씨는 평소보다 더 진솔하고 감정을 담아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후배가 눈물을 흘린 사연은 사실 따로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딱딱한 뉴스 시간이 진정성 있는 대화로 이어지는 반전을 만들어 냈다.
작은 실수가 가져오는 이미지의 상승효과는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성과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같은 것이다. 방송사마다 넘쳐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전 경연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였던 지원자가 박자를 놓치거나 가사를 까먹었을 때 평가자는 이를 호감을 가지고 옹호해 준다. 그러나 중위권의 참가자가 이런 실수를 하면 매정할 정도의 평가가 날아든다. 스스로 약점을 드러내는 자기노출의 전략은 상대방이 화자의 능력치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을 때 효과적이다. 상대에게 주는 호감은 전문성과 진정성에서 비롯한다.
‘dislike'와 'hate' 라는 단어는 단지 정도의 차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비판과 비난의 차이와도 같다. 상대를 싫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상대를 미워하면 스스로에게도 해가 돌아온다. 대상을 대하는 본인의 태도가 또 다른 소통의 벽이 된다. 이미지가 가변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부정적으로 크게 기울어진 당신의 이미지는 거대한 돌덩이가 한쪽에 자리한 시소처럼 다시 되돌려 균형을 맞추기 쉽지 않다. 그러나 상대를 향한 당신의 마음과 태도는 이와는 정반대여야 한다. 무조건적인 호감으로 상대를 바라보라. 당신의 태도는 곧 상대가 당신을 대하는 태도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순간 정보 추구자의 태도는 진실하면서도 무조건적이다. 설령 사랑하는 이의 잘못과 단점을 목격하더라도 X세대의 표현처럼 ‘레드 썬(순간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눈감고 안 본 척 넘긴다는 의미)’할 수 있으며, 무관심과 변덕 그리고 심지어 당신을 배신하더라도 당신의 사랑은 흔들림이 없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하라. 그것이 당신을 호감 가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