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한때 배우 조승우가 연기하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예매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만큼 어려웠다. 주제곡 ‘지금 이 순간’은 소위 노래 좀 한다는 남성들의 애창곡 중 가수 임창정의 <소주 한잔> 만큼이나 사랑받던 곡으로 결혼식 축가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두 곡은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도전하지 말아야 할 노래들이다. 언어적 관점에서 보자면 일단 식상한 데다 CB(Comparison Level) 즉, 비교 대상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등한 실력을 보이거나 독창적 곡 해석이 가미된다면 말은 달라진다. 또 하나, 우연이든 의도했든 때와 장소에 적합하다면 식상함도 부족한 가창력에도 상대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 있다.
아나운서 공채 면접장에서 만난 지원자 중 단연 기억에 남는 사람은 한준호 전 아나운서다. 그가 나에게 풍긴 찰나(刹那)의 인상 때문이다. 서로를 의식하던 차에 화장실에서 말을 건네 왔다.
“우리 같은 준호네요. 표정이 밝으세요. 올해 좋은 결과 있을 거 같아요.”
면접을 코앞에 두고도 여유로웠다. 그런 자신감으로 그해 단 한 명의 자리를 차지했으리라. 시간이 지나 마지막 도전에선 카메라 테스트의 면접관과 지원자로 다시 마주했다. 통상적으로 개별 질문 없이 주어진 원고를 소화한다. 그러나 그 해에는 돌연 내게 질문을 던지는 면접관이 있었다.
“적지 않은 나이인데, 그간 어떤 일을 했나요?”
바로 그였다.
“네, 대학시절 각종 공연으로 졸업이 좀 늦었습니다.”
“그럼 노래 한번 해 보실래요?”
나는 이 노래를 불렀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결국 그 해에도 면접까지 진출했지만 ‘ONLY ONE'이 되지는 못했고, 한준호 아나운서를 다시 만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앵커로서 그의 이름을 외치게 되는 순간이 올지 어찌 알았을까? 그는 MBC에서 아나운서로 16년 활동 후 퇴사했고, 21대 총선에서 고양을 지역에 당선돼 국회에 입성했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시간은 두 개의 개념이었다. 흐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다. 김승중 교수는 흐로노스는 삶의 지식이 축적된 할아버지에, 반면 카이로스는 경험이 미천하지만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비유했다. 흐로노스란 일정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두 바퀴를 돌아 하루를 소비하는 시계처럼, 영원히 고정된 시간이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의미로 가득한 시간, 아주 적절한 순간과 때를 의미한다. 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가 정의하는 시간은 카이로스에 가깝다. 그는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다’라 말한다. 시간은 사건과 관계의 문제다. 세상의 모든 사건들은 시간과 상호 작용하고, 천재지변을 뺀 모든 사건은 인간이 만들어낸다.
<지킬 앤 하이드>의 히트 넘버 <This is Moment> 같이 짤막한 현재의 시간은 우주의 시간 개념으로 보면 찰나라 할 수 있다. 같은 도전자에서 평가자와 여전한 도전자로 마주한 한준호 의원과 내가 함께한 그 공간에서의 5분여 시간이 바로 카이로스다. 총선에서 승리 후 그에게 과거 시험장에서의 일화를 기억하는지 물었지만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이름과 나의 인상 정도였다. 1)
현재의 나를 만든 카이로스는 한국경제TV 최종 면접이었다. 남자 3명 여자 6명이 올랐다. 통상 3배 수임을 감안하면 남자 1명, 여자 2명이 최종 합격할 것이었다. 마지막 결정권자는 한겨레신문 편집장 출신의 류화선 사장이었다. 뼛속까지 기자였던 그는 내 옆 남자 지원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기자를 하지 아나운서를 하려고 해, 남자가?”
그의 대답은 무난했다.
“손석희 아나운서의 100분 토론을 보고 앵커가 되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이렇다 할 질문을 받지 못했던 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코에 반쯤 걸친 안경 너머로 한심하다는 듯 질문을 던지던 사장도, 아나운서 최종면접자에게 기자를 하지 그러냐고 묻는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서울대 출신으로 당시 벤처기업 이사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왜 아나운서를 지원했는지 열등감도 느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면접관들의 질문 대부분은 그 친구 독차지였다. 이런 감정과 생각으로 면접에 집중하지 못하던 순간, 같은 질문이 내게도 왔다.
“자네는 왜 아나운서를 하려고 해?”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이유 정도야 당연히 미리 준비해 갔지만, 그 순간 내 입은 전혀 다른 말은 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중국 음식점 가시면 짜장면을 드십니까? 짬뽕을 드십니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면접관들의 표정에는 당신이 지금 느끼는 바로 그런 황당함이 역력했다. 정작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 순간만큼은 소위 ‘똘끼(또라이의 끼)’ 충만한 반항아로 비쳤으리라.
“뭘 먹어야 하는데?”
예상치 못한 반문에 류 사장도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면접의 불문 율중 하나는 ‘면접관에게 그것이 무엇이든 묻지 말 것’이다.
“연세가 좀 있으시니, 면보다는 그래도 소화가 조금이라도 잘 될 볶음밥이 어떨까요?”
최종 면접은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그날 밤 인사과로부터 출근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당시 내 나이는 지금 MZ세대들의 나이쯤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내 눈엔 당시 사장과 면접관들이 다 꼰대로 보였으리라. 류화선 사장과의 인연은 길게 이어졌다. 파주 시장에 출마하면서 내게 홍보 영상의 내레이션을 부탁하셨고, 시장에 당선된 후에는 큰 아들의 결혼식에 사회를 청하셨다. 아들의 결혼식 날, 그와 나의 두 번째 카이로스가 찾아왔다. 축가로 초대된 여가수가 교통체증으로 30분이나 늦으며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든 책임져야만 했고, 급기야 그날의 혼주였던 류화선 파주시장과의 앞선 면접장 일화를 하객들에게 들려주었다. 덕분에 축가가 진행될 시간적 여유를 화기애애하게 벌 수 있었다. 식이 끝난 후 마주한 류 시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면접장에서 그런 말을 했나?”
그리스 신화에서는 BC 5세기경부터 카이로스가 제우스의 막내아들 즉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인간의 형상을 갖춘 신들이 미술 전반에 등장하며 유일하게 시간과 관련한 신이 흐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짐작케 한다. 카이로스는 ‘기회(opportunity)'라고 번역되기 한다. ‘적절한 때(right timing)'와 연관 지어 해석해 보면, 카이로스는 개인에게 주어진 적절한 순간을 어떻게 의미 있는 기회로 만들 것인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고대 그리스의 레토릭Rhetoric에도 카이로스가 등장한다. 어느 시점에 어떤 말을 해야 설득의 시간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한 공식은 없다. 소피스트Sophist들은 각각의 경우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규칙을 배워 적용하는 방법으로는 이 카이로스를 터득할 수 없으며, 오직 오랜 경험과 연습을 통해 체득할 수 있다고 봤다.
아테네에 철학 학원인 아카데메이아Academy를 설립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은 인간세상을 카이로스kairos와 튀케tyche라는 두 신이 다스린다고까지 말했다. 카이로스는 ‘기회'로 튀케는 ‘운명’ 또는 ‘행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일은 운명이든 우연이든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게 되며 이를 기회로 삼아 자신만의 시간, 즉 카이로스로 만드는 것이 결국 삶을 결정짓는다는 의미가 된다.
MZ세대의 힘든 현실 속 유행어가 된 카르페 디엠Carpe dime의 의미는 ‘Seize the day'다. 이는 단순히 현재를 즐기라는 말이 아니다. 현재의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는 개인 삶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이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굴레를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힘은 카이로스에 있다. 카이로스를 통해 인간은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Seize the moment, kair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