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를 하셨던 어머니의 역할을 나누다 보니 어릴 때부터 집안일에 익숙했다. 그중 요리는 기술에 앞서는 것이 재료임을 매번 느끼게 한다. 3층 주택의 옥상 텃밭에는 고추, 가지, 호박, 오이 등 갖은 채소들이 여름과 가을이면 풍성하게 달린다. 어느 해인가 심지도 않은 감자가 줄줄이 나왔다. 얼씨구나 좋다며 감자수제비를 만들었는데, 웬걸 고약한 냄새에 먹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같은 화분에 자란 방울토마토를 따서 먹어보았다. 역시나 쓴 맛이 올라왔다. 원인은 양념이 된 음식물 쓰레기를 거름으로 준 탓이었다. 보통은 양념을 씻어내고 거름통에 흙과 같이 묻었다가 겨울이 지나 비료로 쓰곤 했는데, 아버지가 실수하신 모양이었다. 흔히 ‘신토불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고 자란 곳의 영향을 받는 것은 살아있는 모든 것에 적용되는 과학이자 교훈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받아들이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다. 인간의 시야를 보완하기 위해 운전 중에는 사이드 미러나 룸 미러 등을 사용하고, 멀리 보기 위해 망원경이 발명됐다. 무한정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인간의 뇌는 이를 수용하고 처리하기 어렵다. 멀티 태스킹은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앞서 배웠고, 바로 외울 수 있는 단어나 숫자도 일곱 개에서 두 개를 넘거나 심지어 두 개 못 미친다. 이렇듯 제한적인 주의집중과 기억 용량을 효율적으로 제어하는 두뇌의 능력을 요하게 되는데, 최근엔 교육계를 비롯해 ‘메타인지(Meta-Cognition)'라는 개념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언급된다.
메타 인지는 마치 타인이 바라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을 의미한다. 사전적 정의로는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자각하고 문제점을 찾아내 해결하며 스스로 학습과정을 조절할 줄 아는 지능’을 뜻한다. 정의에서 보듯 이 능력은 ‘학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학습의 측면에서 메타인지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도 하지만, 훈련을 통해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언어의 영역으로 이 개념을 가져온 김은성 아나운서는 메타인지를 ‘상위인지 능력’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스피치를 할 때 스피치의 여러 요인을 통제하는 기제’라고 해석했다. 대다수의 학부모들은 메타인지가 단기간에 잘 외워서 시험에 바로 적용하는 족집게 과외와 같다는 오해를 한다. 일종의 벼락치기라 치부하는 것이다. 스피치 차원의 메타인지는 이를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메타인지 스피치(meta-cognition speech)는 체계적인 이해와 준비 그리고 꾸준한 훈련을 요한다. 그리고 일정 괘도에 오른 능력은 이후 말하기 이외 다양한 분야로의 확장성을 가진다.
메타인지 스피치는 ITO 세 단계를 거치며 이는 열매를 맺는 모든 식물에 비유할 수 있다. 옥상 방울토가 아닌 부산 대저동에서 나고 자라 전국으로 배송되는 대저 토마토를 키워보자.
Input(지식) : 영양분과 수분을 빨아들이는 뿌리
전 세계를 통틀어 늦은 겨울부터 이른 초봄까지 단 한 곳에서만 재배되는 채소가 있다. 바로 부산시 강서구 대저동에서 생산되는 대저 토마토다. 대저 토마토의 특징은 여느 토마토가 빨갛게 익어 단맛이 돌 때 먹는 것과 달리 파릇하게 녹색 빛이 있을 때 섭취해야 가장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다. 바로 적당한 짠맛이 섞인 단맛이다. 토마토에서 짠맛을 느끼다니, 이는 지역의 특색에 이유가 있다. 대저동은 낙동강 지류에 위치해 있어 토양에 염분과 미네랄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토양의 성분이 토마토의 맛을 좌우했고, 이는 여타 지역에서 재배되는 토마토와는 다른 차별화된 맛으로 사랑받게 만들었다.
스피치의 시작인 지식의 축적도 마찬가지다. 어떤 지식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어떤 이야기를 자양분 삼느냐가 결국 당신의 말을 결정한다. 학습은 결국 사고의 재료가 된다. 재료란 단순히 영어의 ‘to 부정사 용법’이나 수학의 ‘근의 공식’ 등과 같이 체계화된 학문만을 뜻하지 않는다. 직접 경험과 간접경험을 통한 지식은 시험을 위해 공부를 하듯 스스로가 일상에서 항상 인지(cognition)할 때 활용 가능한 스피치의 재료가 된다. 모든 이야기의 원동력은 지식에서 출발한다. 앞서 경험에서 오는 끊임없는 지식의 축적과 메모, 스크랩을 통한 지식의 확장을 이야기한 바 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쌓은 직접적 지식으로는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지식에서 아이디어를 구하는 행동은 또 다른 독창성의 시작이다.
나 역시 책을 쓰기 위해 그간 해온 강의 내용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함을 느끼고 조금 더 적극적 메모를 시작했다. 굳이 과거처럼 수첩과 펜이 필요치 않다. IT 천국에서 우리는 조금만 의지를 가지면 쉽게 메모하고 이를 저장할 수 있다. 그중 가장 유용하게 활용하는 방법은 카카오톡의 ‘나에게 메시지 보내기’ 기능이다. 책이나 TV 혹은 라디오 등에서 바로 유용한 내용을 보고 들었을 때나 아니면 주변인들과 대화에서도 상관없다. 어떤 주제에 대해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두면 신기하게도 그와 연결고리가 될 이야기가 어디 선가 나타난다. 이때가 메모의 순간이다. 논어의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즉, ‘세 사람이 길을 걸으면 그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꼭 사람이 아니라도 귀를 열어 편견과 편협을 버리면 창작에 한발 더 다가가게 된다.
Training(훈련) : 물관과 체관이 지나는 몸통
대저 토마토의 독창적 맛의 비결은 단지 지역과 토양의 특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저동은 낙동강 지류에 있어 항상 강이 범람해 수해를 입었다. 매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농부들의 피나는 노력이 없었다면 지역의 이름을 내건 농작물은 탄생할 수 없었다. 이는 아무리 좋은 재료의 경험과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도 부단한 스피치 훈련이 없이는 원하는 성과를 이루지 못함과 같은 이치다. 심지어 아나운서라는 직업의 사람들조차 원고가 없이는 자신의 언어로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이들도 제법 많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심리학자들은 성공적 메타인지 학습의 전략으로 ‘모니터링’과 ‘컨트롤’을 꼽는다. 스피치의 측면에선 축적한 지식을 발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단계다.
Output(발화) : 풍성하게 달린 열매
대저동에서 재배되는 모든 토마토가 ‘대저 짭짤이 토마토’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인간의 미각은 적당히 짠맛이 가미될 때 단맛을 더 잘 느낀다. 소위 단짠단짠이 대세인 이유기도 하다. 때문에 대저 토마토 역시 당도가 8브릭스brix를 넘어야 진정한 대저 토마토라는 명칭으로 출시할 수 있다. 풍성하게 달린 열매가 고루 당도와 짠맛을 갖추기 위해서는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다.
지식을 기반으로 한 스피치 훈련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일정 단계에 이르면 이는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한다. 대학 입학을 위한 면접이나 취직을 위한 잡 인터뷰는 물론이고 일상의 대화와 대인관계에 까지 영향을 미치며 결국에는 다시 향상된 학습능력으로 돌아오는 선순환의 구조를 갖추게 된다.
10년 전 나는 남양주시 오남리라는 작은 동네에 초청받아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스피치 수업을 진행했다. 처음 아이들에게 낯선 수업을 받게 하는 부모들의 시선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기 훈련을 따로 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기도 했지만, 돈을 내고 다른 수업을 줄이면서 하는 스피치 훈련이 아이들의 성적과 진학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는 합리적 궁금증이었다.
인간의 기억이란 일종의 ‘이야기 덩어리’다. 문서 파일처럼 차곡차곡 쌓여있는 기억 중에서 필요한 기억을 찾아 쓰기 위해서는 자동차 엔진이 움직이게 불꽃을 내는 점화코일과 같은 역할이 필요하다. 그를 위해 인간은 ‘단서’를 사용한다. 교육 심리학에서는 이를 같은 의미의 영단어 ‘cue'로 표현한다. 그러나 특정 단서 하나에만 집중해서는 원하는 결과를 내기 어렵다. 일종의 종합 예술인 영화나 뮤지컬과 같다. 그 단서를 중심으로 한 종합적 기억의 연결이 필요하다.
어린아이들의 기억이나 지식이란 사실 미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쌓아온 짧은 삶의 기억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양이다. 특히 요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수많은 미디어와 휴대폰을 통해 다양한 간접 경험과 지식들을 이미 접했다. 경험을 통한 체득과 지식의 획득은 어린 시절에는 좋고 싫음이나 유용성 여부를 판단하지 못한다. 레프 비고츠키는 이를 ‘지식의 무의식적인 획득’이라 했다. 단지 그 기억들을 유기적으로 이어 줄 점화장치나 단서가 부족할 뿐이다.
나는 여기에 착안해서 다양한 분야의 과제를 내주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가수 고(故) 신해철의 노래 <날아라 병아리>를 듣고 감상을 적어오게 한 후, 수업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로 즉흥 스피치를 해보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보고 느꼈던 죽음에 대한 이미지와 노래 가사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해 표현하는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들의 학습능력 향상으로 이어졌다.
지식의 상대적 양은 나이가 들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지식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는 결코 성인이라는 이유로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우린 주변에서 흔히 확인한다. 대학 발표수업에선 항상 조를 짜더라도 실제 발표는 한 친구가 전담한다. 아나운서를 하겠다는 친구들을 모아 두고 즉흥 스피치를 제안하면 난색을 하고 서로 순서를 미루기 일쑤다. 심지어 대학교수들조차 그들의 학문을 제대로 된 언어로 풀어내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일상생활에서 조차 원활한 대화가 어려운 어른들도 부지기수다.
이 중 하나에 해당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토양에 뿌리를 내릴 것인지를 선택하고, 이를 자양분 삼아 열매를 맺어야 한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을 안길 열매의 당도는 말하기 훈련이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