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청산’을 넘어서는
식민지 유산의 극복

역사이야기 – 한국근현대사 다시 보기③

>>이용기(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1. ‘친일 청산’이라는 문제 설정의 한계


필자는 학부나 대학원 한국근대사 과목의 마지막 강의에서는 일제말기 전시총동원체제를 다루고나서 ‘친일 청산’의 문제로 매듭짓곤 한다.1) 굳이 마지막 시간에 이 문제를 다루는 이유는 물론 식민지 시기에 관한 공부를 총괄하는 차원에서 함께 고민해볼 만한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일제의 억압과 착취가 가장 극심했던 이 시기에 ‘친일파’가 대거 양산되었기 때문에 친일 문제의 시대적 맥락이나 역사적 의미를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구나 일제말기의 친일화 경향은 단지 양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자타가 공인하던 수많은 민족지도자들이 일제에 백기투항하는 ‘전향’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사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정의나 연대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런 류의 친일파들은 망국을 전후한 시점부터 식민지 전시기에 걸쳐 존재했다. 또 식민지라는 불의한 체제를 극복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식민지배체제 속에서 자기실현 내지 계층상승을 도모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식민지 민중들로부터 좋은 일 하는 훌륭한 분이라고 평가받던 소위 민족지도자들 중 상당 정도가 특정한 국면에서 전향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친일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단순한 게 아님을 시사한다.


우리는 흔히 해방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현대사가 굴절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이를 제대로 해야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고 중요한 진단이다. 그렇지만 해방 이후 75년이 지나 친일파들이 대부분 사망한 지금, 그리고 정부 차원의 친일진상규명 활동과 민간 차원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이 일정하게 이루어진 지금, 과연 친일파 청산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친일파를 찾아내는 것, 이미 알려진 자들의 친일 행적을 더 전면적으로 밝혀내는 것, 해방후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한 맥락을 더듬어보는 것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친일파 청산에 시야를 가두는 것은 오히려 식민지 유산의 극복에 한계를 지우는 게 아닐까? 다시 말하면 식민지 유산의 극복을 위해서는 친일파 청산 문제를 달리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우선 ‘친일’이라는 것 자체가 개인의 이기심이나 유약함에서 오는 배신행위라는 수준에서 볼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흔히 친일 문제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바라보거나, 친일파를 자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의 생존과 독립을 저버린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하고, 역사를 탈맥락화하여 도덕의 문제로 치환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친일 청산을 위해서는 개인의 ‘책임’ 문제를 엄중하게 다루어야 하겠지만2), 친일로의 전향이 이루어진 구조적 배경과 나름의 논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데까지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또한 일제에 대한 백기투항을 강요하거나 유혹했던 전시총동원체제와 황국신민화 이데올로기는 ‘민족’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코드를 내장하고 있었다. 나아가 이는 단지 과거의 사태가 아니라 해방 이후 상당기간, 또 어느 정도는 지금까지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따라서 식민지 유산을 극복하는 것은 ‘친일’ 청산이라는 인적 차원이나 민족적 차원에 한정될 수 없고, 또 과거의 그들을 규탄하는 것을 넘어서 오늘의 우리를 성찰하는 것으로 나가야 한다.


2. 전시총동원체제와 황국신민화


일제 식민지기는 대체로 1919년 3·1운동,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의 세 사건을 기준으로 해서 ① 무단통치, ② ‘문화정치’(또는 민족분열정책), ③ 준전시체제, ④ 전시(총동원)체제로 구분한다3). 식민지 전반에 걸쳐 당연히 동질성이 나타나겠지만, 시기별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의 전시총동원체제는 억압적인 면에서는 무단통치에 결코 뒤지지 않을텐데, 그에 비해 훨씬 더 정교하고 체계화된 구조적 폭력이 두드러진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개시하여 ‘제국’의 일대 확장을 꾀하였지만, 전쟁이 점차 확대·장기화되고 종국엔 제2차 세계대전의 일익으로 확전되자 국가의 존망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빠져들었다. 일제는 전쟁 승리를 위한 ‘총력전(total war)’에 돌입하였으며, 식민지 조선도 예외일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1938년 전시총동원법의 적용을 계기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개시하였고, 1940년대의 국민총력운동을 경과하면서 전국적인 범위에서 개별 가호까지 일원적으로 장악하는 촘촘한 통제·동원체제를 구축하였다. 나아가 국가가 생산·유통·분배의 모든 과정을 통제하는 전시통제경제를 실시하고, 식민지 민중을 대상으로 물자와 노동력은 물론이고 목숨과 성(性)까지도 징발하는 전방위적인 전시동원을 강행하였다. 일제 식민통치 하면 떠오르는 공출, 징용, 징병, 군 ‘위안부’ 등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그야말로 전시총동원체제라는 이름에 걸맞은 폭력과 착취의 정교한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총력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을 억지로 전쟁에 끌고가는 게 아니라 이들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전쟁에 뛰어들도록 만들어야 했다. 강제와 자발의 효율성은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인들이 이 전쟁을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로 여기게 만들고자 하였으며, 바로 이 때문에 전시체제기에는 ‘내선일체’ 또는 ‘황국신민화’라고 불린 강력한 동화 이데올로기를 주입한 것이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장악할 때부터 ‘영구병합’을 위해 동화주의를 지향하였지만, 식민통치의 양날인 동화(포섭)와 차별(배제)의 이중주 속에서 급격한 동화를 추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이전과는 달리 동화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전시체제기에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자신이 주장하는 ‘내선일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밝혔다.



내가 항상 역설하는 ‘내선일체’는 서로 손을 잡는다든가, 형태가 융합한다든가 하는 미지근한 것이 아니다. 손을 잡은 자는 손을 놓으면 다시 별개가 된다. 물과 기름도 무리하게 흔들어 섞으면 융합하는 모양이 되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된다. 형태도, 마음도, 피도, 살도 모두 일체가 되어야 한다. (중략) 내선일체의 강화․구현이야말로 동아 신건설의 핵심이다. (중략) 내선일체의 마지막 단계는 내선 무차별 평등에 도달하는 것이다. 4)

미나미는 전임 총독이었던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가 내세웠던 ‘내선융화(內鮮融和)’ 또는 ‘내선융합’은 내지인(內地人=일본인)과 조선인이 ‘손을 잡는’ 방식의 “미지근한” 물리적 결합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자신의 슬로건인 ‘내선일체(內鮮一體)’는 양자의 몸과 마음이 모두 하나가 되는 일종의 화학적 내지 유기체적 결합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등한 입장에서 결합하는 것이 아닐테니, ‘내선일체’는 조선민족을 완전히 해체시켜 일본민족 안으로 흡수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내선일체는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의미하는 ‘민족말살’ 정책이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창씨개명과 국어(일어)상용운동 등이 그 구체적 표현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선일체에서 말하는 ‘일본인’이란 과연 어떤 인간인가? 조선인을 민주적인 일본 시민으로 만들자는 것일까? 당연히 그것은 아닐테며, 조선민족을 해체시켜 일본화할 때 지향하는 인간상이 바로 ‘황국신민’이었다. 그렇다면 ‘황국신민’은 또 무엇인가? 당시 일제는 황국신민이란 한마디로 “천황폐하를 위하여 웃으면서 순국하는 인간”이며, 황국신민이 된다는 것은 “천황폐하께 절대 순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 천황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것은 자기희생이 아니라 “소아(小我)를 버리고 위대한 천황폐하의 위광(威光)에 살며 국민으로서 진정한 생명을 발양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5)


이처럼 황국신민화는 조선인을 일본 천황제 가족국가의 일원으로 만드는 ‘국민화’ 또는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6). 그런데 거기에서 말하는 국민은 국가의 정점에 있는 천황에게 절대 복종하며, 그를 위해서라면 ‘웃으면서’ 목숨을 바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황국신민화의 국민화 기획에는 ‘파시즘’의 코드가 담겨 있었다.7) 결국 황국신민화=내선일체는 민족말살과 파시즘이라는 두 가지 축이 교차된 국민화 프로젝트였다.


3. 친일로의 전향(굴절)과 파시즘 코드의 수용


조선인들에게 일본인이 될 것을 요구하는 황국신민화 이데올로기는 민족적 자의식을 갖고 있는 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사상 통제와 황국신민화 강요는 격심해졌고, 식민지 조선인들은 숨막힐 듯이 죄어오는 전시총동원체제와 황국신민화 이데올로기 공세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때는 민족의 지도자로 인정받던 인사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민족적 신념을 꺾고 내선일체를 수용하면서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일제말기에 대거 전향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날로 강해지는 일본의 국력에 압도되어 독립의 전망을 상실한 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대륙침략에 본격적으로 나선 일본은 한동안 승승장구하였고, 중국 대륙을 넘어 동남아시아까지 장악해갔다. 이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아시아 침략전쟁을 백인 제국주의(서구)의 압제에서 황인종(아시아)을 해방시키는 ‘성전(聖戰)’이라고 강변하며, 이를 ‘대동아전쟁’이라고 칭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힘에 굴복한 일부 인사들은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판단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길을 모색하였다. 그것은 ‘차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논리를 가지고 내선일체를 수용하는 것이었다.8) 말하자면 독립을 하지 못할 바에야 일제에 맞서지 말고 그들의 논리를 수용하여 민족적 차별의 구조에서라도 벗어나자는 것이다.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인이 되자는 주장은 일견 비루한 전향자들의 황당한 자기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일상적 삶 속에서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가장 빈번하고 절실하게 경험하는 지점이 바로 민족적 차별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논리는 파탄난 지식인의 자기분열적 민족의식이라도 볼 수 있다.


‘차별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내선일체’를 수용하자는 전향의 논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보았던 미나미 총독의 연설 말미에 있는 한 마디, 즉 “내선일체의 마지막 단계는 내선 무차별 평등”이라는 달콤한 유혹 때문이었다. 사실 미나미의 언급처럼 만약 내선일체가 완성된다면, 다시 말해 조선(인)이라는 자의식, 표식, 개체성이 일체 소멸되고 조선인이 모두 일본인이 된다면, 차별의 대상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민족적 차별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인을 평등하게 대우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항상 ‘민도의 차이’를 내세워서 동화의 강요와 함께 차별의 합리화를 해나갔다.


그러면 친일로 전향한 자들은 이를 모르고 ‘내선 무차별 평등’의 유혹에 넘어간 것일까? 나름 상당 수준의 지식인들이 민족적 차별이라는 식민지배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한 바보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들은 일본 식민지배로부터의 탈출(=독립)을 포기하는 대신에 일제에 의해 주도될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대동아공영권) 안에서 지도적 위치에 올라서려는 욕망, 즉 일본(내지)에 이은 2등 국민으로라도 살아가고픈 욕망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들 조선인이 열등한 민족이라는 것은 증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근대문명을 도입하는 데 뒤쳐졌다는 것뿐입니다. (중략) 근년의 일을 보더라도 세계를 재패한 손기정 군이 우리와 똑같은 반도인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중략) 이처럼 우수한 소질을 갖고 있는 우리들 조선인이 내지인과 동등한 국민적 의무와 자격을 부여받을 경우 내지인과 동등하게 동양 건설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9)

이번 전쟁에 이길 것은 정해놓은 일이니까 이긴 뒤에 우리들은 전승국인 일본신민으로서, 우수한 지도 민족으로서 세계 어디라도 활기를 치면서 뽐내고 다닐 수가 있다. 그러나 너희들이 이번 성전에서 한 몫 끼지 않는다면, 이 전쟁에서 대체 무엇을 하였겠느냐 이렇게 된다면, 조선 사람은 영원히 지도자의 자리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조선인의 앞날과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절대적인 기회다. 10)


위의 인용문은 학병 출정을 독려하는 윤치호와 혜화전문학교 교장의 글이다. 윤치호는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까지 들먹이면서 조선민족이 열등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동양 건설의 지도자”가 되자고 주장하였다. 혜화전문 교장은 더욱 노골적으로 일본의 승전을 기정사실화하고 “세계 어디라도 활기를 치면서 뽐내고 다닐 수 있”는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성전에 나서라’로 선동하였다. 이들은 주관적으로는 “조선인의 앞날과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 내선일체를 수용하고 전쟁에 참가하자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결과적으로 민족적 자아를 말살하는 데 동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타민족에 대한 억압과 지배를 추구하는 ‘아류 제국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으며, 내선일체=황국신민화에 담긴 국가주의와 파시즘의 코드를 내면화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만일 제군이 일시의 투안(偸安)을 탐하여 이 중대한 시국에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국가의 부르심을 회피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제군의 일신의 치욕 무능을 폭로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장차 다음의 세대를 건설할 제군의 후배를 절망의 구렁 속으로 떨어뜨리게 될 것이니 (중략) 원래 아들이나 손자는 그 부모나 조부의 아들이요 손자이기 이전에 국가의 아들이요 손자인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개개보다 일단 높은 곳에서 이를 통합하고 운전하고 명령하는 것이니, 우리는 개개의 존재이기 이전에 국가에 속한 존재다. 11)
지금까지 우리 반도여성은 그저 내 아들, 내 남편, 내 집이라는 범위에서 떠나보지를 못했다. 떠나볼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자칫하면 국가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 일도 있었을 것이다. (중략) 국가를 위해서는 즐겁게 생명을 바친다는 정신이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내 남편도, 내 아들도 물론 국가에 속한 것이다. 최후의 내 생명까지 국가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중략)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바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나라의 것을 나라가 쓰는 것이지 내가 바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12)

앞의 인용문에서 기독교계 지도자였던 오긍선은 청년들에게 “제군의 후배”, 즉 조선민족을 위해 “주저말고 돌진하라”고 외치는데, 여기에는 국가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베어 있다. 모든 인간이 ‘국가’의 부속물이고 ‘국가’가 ‘국민’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뒤의 인용문은 징병제 실시에 감격한 김활란이 조선 여성들에게 ‘국가’ 관념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글이다. 그는 남편과 아들이 “국가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 여성들은 “국가를 위해서는 즐겁게 생명을 바친다는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친다 해도, 그것은 “나라의 것을 나라가 쓰는 것”이기에 국가를 원망하거나 대가를 바래서는 안된다고 강변하였다.


이러한 전향자들의 궤변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식민지의 삶을 살았고, 식민지 교육을 통해 자아를 형성했고, 학교교육을 통해 황국신민화 이데올로기를 집중적으로 주입받았던 청년학생들에게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차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논리는 항상 ‘더럽고 게으른 조센징’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민족 차별에 분노하던 조선인들에게 적잖은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우리 청년학도도 가열한 세기의 시련도장에 뛰어들어 귀중한 체험을 얻음으로써 반도민중을 황국신민으로서의 수준에 끌어올려 참된 내선일체의 실현을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 이때까지 자칫하면 오해되어 온 비난에 대하여 단호한 해답을 실천으로써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결코 내지인 학우에게 져서는 안 된다. 함께 가자! 세기의 결전장으로! 미·영 격멸전으로! 13)

위 인용문은 학병에 자원한 경성제대 법문학부 학생이 출정 소감을 밝힌 글이다. 조선의 최고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이 학생은 “이때까지 자칫하면 오해되어 온 비난”, 즉 조선인이 열등하다는 비난이 잘못된 것임을 온몸으로 보여주고자 “미영 격멸전”에 뛰어들었다. 그가 “결코 내지인 학우에게 져서는 안 된다”고 절규하는 것에서 민족적 울분을 엿볼 수 있지만, 이는 또 다시 “내선일체의 실현” 즉 조선민족의 해체로 귀결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부 청년들에게서는 민족적 울분조차 소거된 극단적인 자기부정의 논리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때까지 우리의 선배 혹은 우리들 중의 이기적 민족주의 사상은 몇 백 번 우리의 선배에 의하여 시험되어 온 것이며 그것은 또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중략) 우리의 젊은 생명을 바치는데 그 대상(代償)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종전의 이기적·타산적 민족주의 사상의 타기할 표현이 아니면 안된다. 우리는 이미 이같은 사상을 청산한지 오래다. 아니 그보다 우리의 피는 이미 대화(大和) 민족의 피를 느끼고 있다. 14)

반도동포, 특히 장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여야 할 우리들 학도가 이러한 현실 가운데에서 역사의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중략) 국가가 있은 다음에 학업도 있을 것이며 문화도 있겠고, 또 외래의 압박을 물리칠 힘이 있어야 비로소 심오한 진리의 탐구도 가능한 것이다. (중략) 이제부터 우리는 싸우며 배워야할 때가 도래하였다. 전장에는 총후에서 맛볼 수 없는 조국애도 느껴질 것이며 국체의 존엄함을 크게 깨달을 것이다. 15)


앞의 인용문에서 혜화전문학교 학생은 “우리의 선배”들이 추구하던 민족적 가치는 모두 무의미한 실패였다고 판단한다. 그는 학병으로 출정하여 생명을 바치는데 ‘피의 대가’를 따지는 것조차 “이기적” 민족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심지어 자신은 이미 ‘대화 민족’이라고 선언하였다. 뒤의 인용문에서 경성법학전문학교 학생은 “장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할 조선청년이 전쟁에 적극 뛰어들어야 한다며, 개인을 초월하여 모든 것에 우선하는 국가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겠노라 다짐하였다. 이처럼 일부 청년들은 내선일체=황국신민화의 논리에 빠져들면서 민족의식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식 국가주의에 포섭되기도 하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황국신민화의 그림자가 내선일체를 수용한 청년들에게만 드리운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엄혹한 전시체제 아래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불만을 품고 이에 저항하던 열혈 청년들에게서도 황국신민화의 전도된 각인과 무의식적 내면화가 나타난다. 16) 일부 청년들은 일본의 ‘대화(大和) 민족주의’에 맞서 조선의 고유성과 위대함을 강조하는 환상적 민족주의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이들은 절망적인 현실에서 민족의 힘을 발견하기보다는 ‘영광된 과거’에서 조선의 우수성을 찾으려는 경향을 보였고, 결국 일본적 국수주의의 뒤집어진 버전으로 한국적 국수주의를 탐닉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소규모 비밀결사를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맞서 싸우던 청년·학생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 히틀러와 이광수 등의 글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열독하였으며, 히틀러 같은 위대한 민족 영웅이 출현하기를 대망하였다. 심지어 독립 이후의 국가형태는 “나치스적 전제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대한 반감을 가진 청년들에게서도 ‘싸우면서 닮는다’는 역설이 나타났던 것이다.


4. 식민지 유산의 극복을 다시 생각하며


해방을 맞이한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치욕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황국신민화 정책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을 표출하였다. 창씨개명으로 잃었던 성명을 복구하고, 일어상용으로 빼앗겼던 국어를 되찾고, 무엇보다도 친일파를 배제하고 독립국가를 수립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처럼 한국인들은 황국신민화로 인한 ‘민족말살’에 대해서는 뚜렷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거기에 담긴 또 하나의 코드인 파시즘에 대한 자각적 극복 노력은 상당히 미약했다. 물론 언표상으로는 ‘파시즘’이나 ‘군국주의’ 잔재 청산을 외쳤지만, 이미 내면화된 파시즘적 규율과 인간형에 대한 성찰은 부족했다.


어쩌면 해방 직후 파시즘은 신국가 건설을 위해 민중의 에너지를 동원할 수 있는 대단히 효율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는지 모른다. 좌우 대립에 이어 남북 대립으로 이어지는 격렬한 쟁투의 과정에서 좌우를 불문하고 대부분 정치세력이 효율적인 대중동원을 위하여 파시즘적 체제·규율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장악하여 활용하고자 하였다. 일제가 개별 가호까지 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애국반은 이름만 달리하여, 남쪽에서는 국민반으로, 북쪽에서는 인민반으로 지속되었다. 천황에 대한 절대 복종은 사람만 달리하여, 남쪽에서는 이승만 박사에 대한 충성으로, 북쪽에서는 김일성 원수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졌다. ‘개인은 전체를 위하여’라는 슬로건, 국가의 발전을 위한 개인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발상,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 생존·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 효율성을 위해서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 이러한 파시즘적 규율과 논리는 남한에서도 1987년 이후 민주화 국면으로 이행하기 전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우리의 무의식 차원에 내면화되어 있다.


식민지 유산을 극복하는 것은 ‘친일’ 청산이라는 인적 차원이나 민족적 차원에 한정될 수 없다. 물론 친일 청산도 여전히 중요하고, 이를 통해 역사적 ‘책임’의 문제를 반추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개인적 변절 수준으로 왜소화해서는 곤란하고, 민족적 가치의 차원에서만 바라볼 것도 아니다. 우리의 시야가 친일파 청산이라는 인적 청산 수준에만 머무른다면, 자칫 식민지의 그림자는 친일파로 규정한 자들에게서만 찾아지고,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식민지의 유산을 성찰할 수 있는 안목을 얻지 못할 수 있다.


한국근대사 수업을 하면서 흔히 겪는 일이 있다. 친일 청산의 당위성이나 필요성을 크게 느끼는 학생들에게도 ‘만약 일제시기에 살았더라면 나는 어떠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나 또한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는 대답이 의외로 많이 나온다. 우리가 ‘나중에 태어난 자들의 특권’으로 친일 문제나 식민지 경험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에 대한 반대 명제로 ‘그래서 독립운동가는 대단한 것이다.’라는 논리가 도출되는 것도 뭔가 허전하게 느껴진다. 역사가 단순히 도덕이 아니라면, ‘올바르게 살자’를 반복하기보다는, 그렇게 살기 힘들었던 과거의 실상을 찬찬히 따져보고, 올바르게 살려다가 좌절한 자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럼에도 그들의 전향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가를 냉정하게 비판하는 게 필요하다. 또 지금 우리의 삶이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게 아니라면, 그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우리 스스로 역사적 책임의 무게를 느끼는 것이 역사의 교훈적 기능을 살리는 방법일 것이다.



1)학부 수업에서는 아무래도 교수의 생각이 압도적인 ‘권위’로 다가가겠지만 대학원 수업은 (파견)교사들이 많은 교원대의 특성상 나름 마지막 수업은 열띤 토론의 장이 되곤 한다. 이 글은 평소 한국근대사 수업을 종결지으면서 필자가 강조하곤 했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구성하지만, 2020년 1학기 대학원 ‘한국근대사특강’ 수업의 토론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수업 내내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하고 굽힘없이(?) 의견을 개진해주었던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와 우의의 마음을 전한다.

2)친일의 역사적 책임에 관한 진지한 성찰은 김민철, 2006, 「‘친일’ 문제-인식, 책임, 기억」, �기억을 둘러싼 투쟁�, 아세아문화사 참고.

3)한국사 교과서는 3시기로 구분하는 경향이 강한데, 1931~1937년에 해당하는 세 번째 시기가 ②와 ④ 중에서 어느 하나로 애매하게 편입된다. 학계에서도 세 번째 시기를 부르는 용어가 특별하게 개발되어 있지 않고 1937년 이후의 전시체제를 의식하여 ‘준전시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적절한 용어가 없어 필자도 그렇게 부르지만 세 번째와 네 번째 시기의 차이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향후 적절한 용어가 필요하다고 본다.

4)「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임원총회석상의 총독 연설(1939.5.30.)」(조선총독부, 1940, �조선에서의 국민정신총동원�, 90~104쪽에 수록)

5) 朝鮮軍事普及協會 편, 1942, �朝鮮徵兵準備讀本�; 「皇國臣民タルノ自覺ノ徹底」 �文敎の朝鮮� 1938.3.(宮田節子, 이형랑 역, 1994, �조선민중과 「황민화」 정책�, 일조각, 106쪽에서 재인용)

6) 식민지 조선인은 공식적으로는 일본인이면서도 내지인과 달리 ‘조선적(朝鮮籍)’을 가진 외지인으로 구분되어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내지인(일본인)과 동등하게 갖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참정권의 박탈과 병역 의무의 면제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조선인을 ‘일본국민’으로 편입함으로써 국민의 의무를 고스란히 부과하고자 하였다. ‘국민학교’ 제도를 시행한 것도 바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국민의식’을 주입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일제가 추진한 국민화 프로젝트가 조선인들에게는 ‘우리 나라’가 아니라 ‘저들 나라’의 국민 되기였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효과만 남겼겠지만, 식민지하의 ‘국민화’라는 문제는 거기에 담긴 내셔널리즘 비판의 맥락에서 향후 깊이 반추되어야 할 지점이다.

7) 파시즘은 여러 가지로 정의될 수 있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 본다면 전체주의와 민족주의(내셔널리즘)가 결합된 반동적 이념·운동·체제이며, ‘자발성의 동원’과 ‘지도자에 대한 복종’을 주요한 특징으로 삼는다. 만주사변 이후 군국주의 일본은 전형적 파시즘 국가였던 독일·이태리에 비해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이 떨어지지만 넓은 의미의 파시즘으로 볼 수 있으며, 많은 논자들이 이를 ‘천황제 파시즘’으로 부르기도 한다. 일제말기 전시총동원체제를 ‘식민지 파시즘’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살핀 연구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방기중 편, 2004, �일제 파시즘 지배정책과 민중생활�, 혜안; 2005, �일제하 지식인의 파시즘체제 인식과 대응�, 혜안; 2006, �식민지 파시즘의 유산과 극복의 과제�, 혜안.

8) 宮田節子, 1994, 앞의 책, 159~189쪽.

9) 윤치호, 「내선일체에 대한 소신」, �동양지광� 1939.4.(권태억 외, 1994, �자료모음-근현대 한국 탐사�, 역사비평사, 282~285쪽에 수록)

10) 「학도출진을 말하는 좌담회② - 천재일우의 호기회」, �매일신보� 1943.11.9.

11) 오긍선,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② - 환하게 열린 征路, 주저말고 곧 돌진하라」, �매일신보� 1943.11.6.

12) 김활란,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12.(권태억 외, 1994, 앞의 책, 286~287쪽에 수록)

13) 金本光治(경성제대 법문학부 2학년), 「결전장에 달리는 학도의 열정① - 황국 대생명에 융합」, �매일신보� 1943.11.3.

14) 武山忠治(혜화전문 1학년), 「결전장에 달리는 학도의 열정② - 유구한 대의에 살자」, �매일신보� 1943.11.5.

15) 夏山正義(경성법학전문 1학년), 「결전장에 달리는 학도의 열정④ - 국가 있고 개인도 있다」, �매일신보� 1943.11.7.

16) 이하 내용은 변은진, 2013, �파시즘적 근대체험과 조선민중의 현실인식�, 선인 참조.




<참고문헌>

宮田節子(미야다 세스코), 이형랑 역, 1994, �조선민중과 「황민화」 정책�, 일조각.

김민철, 2006, �기억을 둘러싼 투쟁-친일문제와 과거청산운동�, 아세아문화사.

변은진, 2013, �파시즘적 근대체험과 조선민중의 현실인식�, 선인.

최유리, 1997, �일제말기 식민지 지배정책 연구�, 국학자료원.

정운현 편, 1997,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학병권유 친일문장선집�, 없어지지않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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