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니어도,
영웅이 아니어도

수업이야기 >> 역사교사를 위한 영화수업 ②

≫ 최은(영화평론가)


편집자주] ‘역사 교사를 위한 영화수업’은 2020년 여름 호부터 신설된 코너 입니다. 영상 매체를 통하여 역사 수업을 꾸릴 여지를 찾아보기 위해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영화평론가 최은 님께서 필자로 참여해주십니다. 이번 호에는 윤용한 선생님(경기 송정초)께서 영화 편지에 참여해주셨습니다. 다음 호에도 전국 각지 선생님들이 보내주신 주제 중 하나를 선정하여 연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수업에 적용하고 싶은 주제를 보내주시면 원고 작성을 부탁드릴 때에 참고하겠습니다.(관심 주제를 발송하는 방법은 추후 안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이 코너가 독자 선생님들의 수업 구상에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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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여성이 단독 주인공인 영화는 큰 인기를 끌기 어렵다는 것이 영화계의 통설입니다. 그나마 박찬욱 감독과 함께한 <친절한 금자씨>(2005)의 이영애나 허진호 감독이 만든 <덕혜옹주>(2016)의 손예진 쯤 돼야 무시당하지 않는다고나 할까요. 천만 관객 영화들의 포스터를 온통 남성의 얼굴들이 가득 채운 와중에, 두 영화는 각각 300만과 5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헌데 2000년대와 2010년대 중반, 여성이 단독 주인공인 작품으로서 이 두 영화가 얻은 성과는 꽤 상징적입니다. 지난 20여년 사이 여성들이 어떤 장르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 때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어왔는지를 한눈에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구했’거나, ‘엄마’이거나

우선, <친절한 금자씨>는 범죄 스릴러이고, 여기서 금자씨는 복수하는 여성입니다. 비슷한 시기 <오로라 공주>(2005)와 <세븐 데이즈>(2007)의 주인공 엄정화와 김윤진도 아이를 잃은 엄마들입니다. 이들은 타고난 집념으로 실종되고 살해된 아이들을 직접 찾아 나설 뿐 아니라 법 바깥에서 사적인 응징을 시도하는데요. 대개는 부패하고 무능한 경찰과 검사, 정치인들, 또는 더 나아가 국가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하는 2000년대 한국 범죄영화들의 관습을 따릅니다. 이들의 강인함은 ‘모성’에서 비롯된 것이고, 내 아이는 내가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냉정한 현실인식과 절박함에서 출발한 것이었죠. 이런 맥락에서 한국사회에서 모성신화가 갖는 의미와 모순을 폭로한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와 혈연에 의한 모성을 넘어서는 여성을 제시한 이창동 감독의 <시>(2010),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2016) 같은 영화들을 유심히 보아두면 좋겠습니다.


한편 천만 관객 영화 <암살>이 개봉한 2015년 전후로, 여성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커졌습니다.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이 실존 인물 남자현 지사(1872-1933)를 모델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였죠.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라 할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한국영화는 이제 역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을 찾는 데 열심을 보입니다. 그 동안 아픈 역사의 피해자로만 간신히 등장할 수 있었던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이 고발자의 신분으로 대중적인 극영화에 비교적 무난히 안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시기의 일입니다. 미 하원의원 공개청문회에서 증언한 이용수님과 고 김군자님을 모델로 <아이 캔 스피크>(2017)가 만들어졌지요. 이 영화는 320만 관객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비슷한 시기 <허스토리>(2018)도 ‘관부재판(1992-1998)’을 위해 일본군 ‘위안부’와 ‘여성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모시고 활동했던 김문숙님을 스크린에 불러냈습니다. 배우 김희애가 연기한 인물입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에는 <항거: 유관순 이야기>가 개봉했죠. 이 영화는 ‘유관순 누나’라고 불린 탓에, 어린 여성이 기특하게 만세운동을 주도한 듯한 이미지로 기억되기 쉬운 유관순 열사가 실제로 옥중에서 어떤 고충을 겪었는지 보여주는 데 주력했습니다. 잘 배웠고 혼자 똑똑해서 역사에 남은 영웅이 아니라, 8번방의 여인들과 내세울 것 없던 수많은 여성들이 그와 연대했다는 점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허진호 감독의 <덕혜옹주>는 이처럼 <암살>과 <항거: 유관순 이야기> 사이 어느 지점에서 출몰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덕혜옹주가 비극적인 생을 살았던 ‘마지막 황녀’임을 강조한 나머지, 그가 강제노역으로 끌려온 재일동포들 앞에서 한국말로 무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는 내용의 항일 연설을 했다고 말하는 무리수를 두고 맙니다. 더욱이 영화에서 이 옹주마마는 한글학교를 설립하기까지 합니다. 역사왜곡이라는 논란이 일자, 허진호 감독은 ‘역사적 상상력’이었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랬으면(용기와 힘을 내서 독립운동을 좀 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했다고 말이죠. 하지만 그는 왜 이 비운의 여성에게, 그보다 10여 년 전 윤종찬 감독의 영화 <청연>(2005)이 같은 시대의 여성 비행사 박경원(장진영)에게 했던 질문을 던져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꿈)은 무엇이냐?”는 단순하고도 사려 깊은 질문 말입니다. 마지막 황녀로서 덕혜에게 타이틀과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하라고 영화에서까지 버거운 짐을 지운 것은 아닌가 싶어지더군요. 영화가 그려낸 대로 평생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했던 황녀는 죽어 등장한 영화에서조차도 독립운동가와 황족의 가면을 쓰고서야 환영받을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것도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말이지요. 역사적인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한 여성의 삶을 영웅-희생자의 구도에 가두어두었다는 점에서 그건 혹시 영화적인 퇴행이 아니었을까요.


한편으로, 근육질 남성 이미지로 점철된 한국의 대중영화시장에서 울고 앉아있지만 않고 내 아이를 직접 찾아 나선, 즉 몸과 마음의 근육을 지닌 엄마들을 만나는 것, 고통을 넘어서서 아픔을 증언하고 서로 연대하며 역사를 만들어가는 여성 영웅들을 찾은 것은 분명히 반가운 일입니다. 다만 이런 종류의 여성 재현은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성을 모성이라는 신화에 제한하거나 국가와 사회 또는 대의명분에 기여하며 희생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성을 우위에 둘 수 있는 한계에 자주 노출되어 있다는 점은 기억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래 남성 중심이었던 한국영화현장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려온 여성 감독들이 속속 여성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고 나타나 스크린을 점거하기 시작한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입니다. 이 주인공들은 너무 평범해서 평소에는 잘 눈에 띄지 않고요, 정의로운 누구 엄마 아니면 옹주나 열사 같은, 의미심장한 명칭보다는 그냥 자기 이름으로 불리는 여성들입니다.



은영-지영-아영으로 이어지는 평범한 이름, <82년생 김지영>(2019)

<82년생 김지영>은 2016년 출간된 조남주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가 원작인 영화입니다. 김지영(정유미)은 소설 출간 당시 34세였고, 영화가 개봉한 시점엔 30대 후반인 37세입니다. 남동생이 있고, 삼남매 중 둘째딸인 지영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어렵게 홍보회사에 취업했는데, 결혼하고 출산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었어요. 남편인 정대현(공유)은 IT계열 회사에 다니고 있어 형편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우울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지영이 헛소리 같은 것을 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친정엄마 오미숙(김미경)씨의 흉내를 내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다 이미 고인이 된 대학시절 동아리 선배였던 차승연이 되기도 하고 외할머니가 되기도 합니다.

‘김지영’이라는 아주 흔한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웠지만, 이 작품이 모든 30대 여성들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대졸여성이고 비교적 생각과 마음이 열려 있는 ‘공유 같은’ 남편을 두었고,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베란다 창을 열면 그나마 햇살과 바람을 대하고 숨 쉴 틈을 얻을 수 있는 형편이며, 늦게나마 “지영아,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말해주는 친정엄마도 있죠. 헌데 이 영화는 그런 지영조차도 병들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되묻게 만듭니다.

소설 원작이 김지영씨의 삶에 집중하는 반면 영화가 김지영의 ‘계보’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영화에는 김지영이 빙의하는 인물에 외할머니가 포함되었고, 그 외할머니가 어머니 미숙씨를 위로하는 장면이 더해졌어요. 오늘의 지영 이전에 아들들의 교육을 위해 딸을 청계천 옷 공장에 보내야 했던 외할머니, 오빠와 남동생들을 위해 미싱을 돌리면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을 포기해야 했던 지영 엄마 미숙씨가 있었던 겁니다.

은영-지영-아영으로 이어지는 이름의 배치도 흥미롭습니다. 지영의 언니인 은영은 IMF시절 등록금이 싸고 취업이 쉬운 교대에 진학해서 교사가 됐어요. 은영은 원작에서는 기혼인데요, 영화에서는 화려한 싱글입니다. 한편 원작에서 지영의 딸 이름은 지원이었는데, 영화에서는 아영으로 바뀌었습니다. 은영-지영-아영. 자매 같기도 하죠. 지금 같은 환경에서 그대로 자라면, 다음 세대인 아영은 어쩌면 은영처럼 살 수도 있고 지영처럼 살 수도 있겠지요.



방앗간집 둘째딸이 만난 세계의 ‘무너짐’, <벌새>(2018)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는 지난 해 세계 각국의 영화상들을 수십 개나 휩쓸면서 한국영화계에 그야말로 작은 벌새처럼 날아들었습니다. 김은희(박지후)는 대치동 서민 아파트에 살고 있는 중학교 2학년 소녀입니다. 아파트 상가의 방앗간집 딸이에요. 일을 하느라 늘 바쁜 엄마(이승연), 아빠(정인기)와 언니 수희(박수연)와 오빠 대훈(손상연), 이렇게 다섯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언니는 8학군에 살면서도 공부를 못해 강북에 있는 고등학교에 갔구요, 하나뿐인 아들인 오빠는 공부까지 잘해서 외고와 서울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구박받는 언니와 모범생 오빠 사이에서 은희는 존재감이 별로 없는 아이예요.

영화의 배경인 1994년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성수대교가 무너진 해입니다. 이 해 은희는 일상에 침범한 크고 작은 ‘무너짐들’ 혹은 찢어짐들에 마주하게 되는데요, 특히 성수대교의 붕괴는 누구도 무너질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고, 실상 가장 무너져서는 안 될 것이 무너져 내린 사건이었어요. 영화 속 누군가 처절하게 외칩니다. “어떻게, 다리가 무너지니?!” 그밖에도 은희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하급생 유리(설혜인)에게 고백을 받았다가 관계가 깨어지기도 하고, 인생의 멘토 같은 한문선생 영지(김새벽)를 만났다가 이별하기도 합니다.

영지 선생님은 은희에게 무너지고 깨졌다고 해서 무조건 동정할 일도 아니고,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참아서는 안 되며,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어요.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날 아침 은희는 철거지역을 지나다가 주민들이 내건 현수막이 처참하게 찢어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부모가 자꾸 싸우고, 오빠가 때리고, 남자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친구가 배신하고, 귀밑에 혹이 나서 아팠던 한 소녀가 사회의 거대한 붕괴를 경험하는 날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재개발 지구, 즉 개발과 성장논리와 무관하지 않고, 성공이 제일 중요해서 중학생들에게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폭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겁니다. 이처럼 영화는 촘촘하고 성실하게, 개인의 삶에 벌어지는 작은 찢어짐 또는 균열과 사회적인 사건을 연결해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로 알려진 벌새는 초당 80회의 날갯짓을 한다는데요, 은희는 영지 선생님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물었어요. “선생님, 제 삶도 언젠가는 빛이 날까요?”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은희가 제 살을 째고 혹을 떼낸 뒤 ‘차라리 병원이 편하다’고 말할 때, 남자친구 때문에 속상하고 슬퍼서 미친 듯이 춤을 출 때, 무너진 다리 앞에 서서 새벽에 간절히 두 손을 모을 때... 이 아이의 작은 날개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며 반짝거리고 있었는지 말입니다. 그 순간은 존재 자체가 이미 빛이라는 것도요. <벌새>는 그래서 열다섯 살 여성인 은희 뿐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생명이 고맙다고 생각하게 되는 영화입니다.


현재의 존엄과 용기를 지지하는 ‘할머니’ 영화, <69세>(2019)

오십견으로 정형외과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던 69세 효정(예수정)은 퇴원 전날 29세인 남성 간호조무사 이중우(김준경)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며칠 후 효정은 이중우를 고소하기로 결심하고 경찰을 찾아가요. 효정과 함께 살고 있는 책방 사장 남동인(기주봉)이 동행합니다. 성범죄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피고소인은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고 주장하고, 경찰은 “친절이 과했네.”라고 무심히 농담을 던집니다. 69세인 여성 노인이 29세인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 맞고, 효정은 증거물도 갖고 있는데요, 효정은 혹시 치매라서 기억이 왜곡된 거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습니다. 효정은 혼자 사는 여성이었고, 요양보호사라는 ‘돌봄 노동자’였어요. 이 영화는 여성과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편견이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는 현실을 드러냅니다. 법원은 자꾸 이중우의 구속영장을 기각해요.

60대 요양보호사 여성의 이야기이고, 여성의 성폭행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69세>는 언뜻 이창동 감독의 <시>를 떠올리게 합니다. 윤정희씨가 주인공 미자를 연기했죠. 단, <시>에서 피해자는 미자가 얼굴도 몰랐던 여중생이었어요. 미자의 중학생 손자가 가해자중 하나였고요. 소녀는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요, 가해자의 아버지들과 공권력은 서둘러 합의로 끝내려 하고, 손자도 전혀 반성이 없습니다. 미자는 자신이 돌보던 노인에게 몸을 내주고 돈을 얻어서 합의금을 지불하고 손자를 경찰에 넘겨줍니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에서 우리가 봤던 것처럼, 한국사회에서 ‘모성’을 지닌 엄마가 자식을 손수 경찰서에 넘기는 설정은 낯선 이야기지요. <시>에서 미자는 할머니여서 가능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성을 뛰어넘은 대안으로 손자의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한 거였죠.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자신의 몸을 던져 속죄를 완성하기로 결심을 했고요. 미자는 소녀를 위해서는 애도의 시를 한 편 남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미자는 여성 자신이라기보다는 희생자, 대속자이면서 구원의 이미지를 품은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69세>의 효정은 어머니도 모성의 대안으로서의 할머니도 아니고 구원자는 더더욱 아닌 오롯이 여성 자신입니다. 자신의 시대가 이미 끝이 났으므로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한다는 과거나 미래적 존재로서의 가치, 즉 또 따른 의미에서의 ‘영웅’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노년 여성으로서, 현재와 효정의 존재 자체를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그리하여 (미자처럼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는 할머니 효정은 음지로 숨어드는 대신 동일이 쓴 시 「봄볕」의 한 구절처럼, “볕으로” 당당히 나아갑니다.

세 편의 영화에서 각각 30대와 10대와 60대인 지영과 은희와 효정은 홀로 흥행영화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어딘지 ‘약해’ 보입니다. 나라를 구하기는커녕 발랄한 로맨스가 기대되는 싱글의 젊은 여성도 아니고 또래보다 영특한 어린이도 아니고 연하의 남성과 불같은 사랑을 나누는 중년도 아니며 심지어 누군가의 할머니도 아니죠. ‘맘충’이나 ‘급식충’으로 비하되는 존재이거나 좀처럼 ‘성적인’ 주체라고 상상하기 힘든, 하지만 필요에 따라 모성적인 돌봄이나 성적인 쾌락을 제공하는 여성으로 소환되기도 하는, 애매모호한 노년의 싱글 여성입니다. 하지만 그들 각자의 삶은 충분히 그 자체로 반짝반짝합니다. 우리들 대다수와 이웃들의 삶이 그렇듯이요.

여성과 약자들의 서사에 관한 한 아직도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이 많고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영화 <82년생 김지영>과 <벌새>와 <69세>는 지난 10여 년의 한국사회의 변화가 만들어낸 작은 결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영화는 지금도 서사의 사각지대를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가장 윤리적이고 사려 깊은 방식으로 약자들의 편에 서려고 애를 쓰는 이 시대 예술가들의 움직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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