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 정욱식의 피스메이커④
>>정욱식(평화네트워크 대표)
“미중 패권 경쟁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최근 들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현재뿐만이 아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이는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언론과 전문가들도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하지만,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만큼 궁금하면서도 어려운 문제이다.
세계 양대 강대국으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경쟁 및 갈등이 격화되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전방위적이다. 미국은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이고 중국은 최대 무역 상대국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특히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되면서 한반도 문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격화되는 미중 경쟁과 갈등이 한반도 문제 해결에 구조적 제약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구조의 문제 못지않게 인식의 문제도 중요하다. 이는 예단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조적 제약을 우리가 적응하고 순응해야 하는 거대한 힘으로 인식할 경우 대북정책을 포함한 한국의 전략적 선택은 ‘미중 경쟁의 범위’에 갇히게 된다. 이는 한반도 문제를 미중관계의 종속 변수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고착시키거나 불안정성을 가중시킬 위험이 크다.
대안적 접근은 미중 경쟁을 한반도 문제의 중대 변수로 간주하면서도 둘 사이의 상호 작용 및 자율성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에서 마련할 수 있다. 미중관계와 한반도 문제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구조는 아니다. 한반도 문제의 악화가 미중간의 협력을 야기할 때도 있었고, 거꾸로 한반도 문제 해결의 진전이 미중관계 악화를 가져온 때도 있었다. 낯선 진단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러한 사례들은 더러 있다. 또한 한반도 문제가 미중관계에 완전히 밀착된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의 전략적 선택의 폭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에 본 글에서는 북핵 문제를 중심으로 한반도 문제와 미중관계 사이의 관계 동학을 짚어보고자 한다. 초점은 미국이 중국 견제 및 봉쇄를 위해 북핵 문제를 어떻게 악용해왔는지를 살펴보는 데에 두었다. 이는 한반도 문제를 미중관계에서 최대한 분리시켜 해법을 모색하는 데에 유용하다.
미국은 공개적으로는 북핵 문제 해결을 비롯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추구한다고 해왔지만, 그 속내를 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들도 많다. 중국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중국의 국가 이익에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긍정적인 역할도 해왔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가 미중관계에 비해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하는 경향도 강하다. 세계 양대 강대국인 미중관계가 중국의 이익과 안전뿐만 아니라 세계 질서에서 중대한 변수라는 점에서 이러한 인식은 일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중국이 한반도 문제를 미중관계의 하위 변수로 취급하면, 미중관계가 풀려야 한반도 문제도 풀 수 있다고 여기기 쉽다.
이러한 경향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중국도 부지불식간에 한반도에서 ‘현상 유지’에 기여하게 된다. 이는 한반도에서 부전(不戰)과 불란(不亂)을 수호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전쟁도 평화도 아닌 비정상적인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비핵화를 달성해 한반도의 평화적인 ‘현상 변경’을 실현하는 데에는 부족하다. 추세적으로 볼 때, 미중관계가 협력보다는 경쟁과 갈등이 심화되어왔다는 점에서 ‘선(先) 중미관계 개선, 후(後) 한반도 문제 해결’도 기약 없는 것이다. 한반도 문제 해결의 때(時)를 놓칠 수도 있다.
더구나 북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1990년대 초반 이후 한반도 문제와 미중관계는 밀접한 연관을 가져왔다. 소련의 몰락과 중국의 부상이 교차하면서 단일 패권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꾸준히 가져왔다. 하지만 대놓고 중국봉쇄론을 말하는 것은 꺼려했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밀접히 연관된 상황에서 중국을 대놓고 적대국으로 취급하는 것은 미국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북한위협론을 ‘꽃놀이패’로 이용했었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때마다 어김없이 북핵 문제를 과장하고 강경하게 대응해왔다는 것이다. 미국의 강경파들은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마다 북한의 비밀 핵 의혹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의혹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된 것이었었지만, 그 목적은 대부분 달성되기도 했었다.
먼저 199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당시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북일관계도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은 북한의 비밀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를 ‘기만 계획’이라고 불렀다. 핵심적인 요지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신고한 플루토늄 90g은 거짓이고 북한의 플루토늄 보유량은 핵무기 1~2개 분량인 10kg 정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일치’가 발생하자 미국은 북한에 특별사찰을 요구했고 북한이 이를 “강도적 요구”라며 거부했다. 그러자 딕 체니 국방부 장관은 한미 정상이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당시 세계 최대의 군사훈련이었던 ‘팀 스피릿’ 훈련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고, 북한은 이에 격렬히 반발하면서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1차 북핵 위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1992년 불거졌던 ‘불일치’ 문제는 16년 후에 대략적인 진실이 드러났다. 2008년 미국은 북한이 건네준 영변 핵시설 가동 일지를 검토한 결과 북한이 1992년에 신고한 게 정확했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2002년에 북한을 이라크 및 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불렀던 부시 대통령이 2008년에 북한을 테러지원국 목록에서 제외하겠다고 발표한 결정적인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이때에는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2000년 6월에 열리는 등 남북관계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2002년 9월에는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도 성사돼 ‘평양 선언’이 채택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200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천신만고 끝에 정권교체에 성공한 미국 공화당이 취한 첫 번째 조치가 바로 대북정책 ‘교체’였다. 이들은 인수위 시기에 클린턴의 방북을 가로막았을 뿐만 아니라 백악관에 들어가자마자 대북 협상을 중단시키고는 ‘북한 위협’을 이유로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을 선언했다.
2002년 10월에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HEU)을 이용해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1994년 제네바 합의뿐만 아니라 남북관계와 북일 관계에도 제동을 걸려고 했다. 당시 부시 행정부의 의도는 존 볼턴 국무부 차관의 발언 속에 잘 담겨 있다. “HEU는 제네바 합의를 깨부술 해머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의혹은 여전히 논란거리이지만, 분명한 점은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친서를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려고 하는 등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강력히 희망했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편지조차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유 제공도 중단했을 만큼 강경한 자세로 일관했다. 이로 인해 제네바 합의는 깨졌고 북한은 NPT 재탈퇴와 더불어 봉인되었던 플루토늄 프로그램을 재가동하고 말았다. 이른바 ‘2차 북핵 위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말았다.
2007년에는 북한의 시리아 핵 개발 지원설이 불거졌다. 이때에는 부시 행정부가 뒤늦게 북한과의 직접 협상을 선택해 6자회담에서 2.13 합의와 10.3 합의가 나오는 등 북미관계와 6자회담이 선순환을 그리고 있었다. 이에 힘입어 2차 남북정상회담도 열렸다. 그런데 딕 체니 부통령 등 잔존 네오콘은 이스라엘이 공습한 시리아의 의혹 시설은 핵시설이고 이건 북한이 지어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실은 오리무중에 빠졌고 협상 동력은 급격히 위축됐다. 설상가상으로 청와대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이명박 정부마저 대북정책을 ‘교체’하면서 6자회담은 파국을 맞이하고 말았다.
2009년 1월에 취임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대단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선 후보 당시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공약했지만, 2009년 북한의 위성 발사 및 핵실험에 실망했다며 ‘전략적 인내’로 후퇴했다. 전략적 인내는 북한의 비핵화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줄 때까지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과 북한이 6자회담 재개를 요구해도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지 않겠다.”며 거부했었다. 그 결과 오바마 행정부 8년 임기 동안 6자회담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고 북한의 핵 능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왜 한반도 정세가 중대한 전환점에 설 때마다 어김없이 미국발 ‘비밀 북핵설’이 불거지거나 미국이 나태한 모습을 보인 것일까? 이는 미국의 패권 전략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견제와 봉쇄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때마다 북핵 문제를 과장하고 강경하게 대응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과거지사가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에 미국은 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에 따라 주한미군도 대대적으로 감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펜타곤은 중국의 부상에 대비해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대규모의 주한미군 주둔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북한의 핵 능력을 침소봉대하고 중단키로 했던 ‘팀 스피릿’ 훈련 재개를 밀어붙였다. 이러한 강경책의 이면에는 21세기도 ‘미국의 세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경쟁자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는 중국을 군사적으로 견제·봉쇄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이 강하게 깔려있다. 그리고 북핵 위기를 틈타 주한미군 3단계 감축 계획은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1994년 북미간의 제네바 합의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 부시 행정부는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간주하고는 중국이 미국과 대등한 지위로 올라서는 것을 좌절시키기 위해 군사 수위(military supremacy) 전략을 분명히 했다. 구체적으로는 전략적 중심축을 대서양에서 아시아-태평양으로 옮기고 MD 및 한미동맹 재조정과 미일동맹 일체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가장 큰 구실로 ‘북한위협론’을 들고 나왔다. 중국을 직접 거명하기보다는 북한위협론을 지렛대로 삼아 중국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도 비슷한 행태를 보였다. 미국이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에 허덕이고 금융위기의 늪에 빠진 사이에 중국은 급격히 부상했다. 중미 양국 사이에 기후 변화, 금융위기 대처, 비확산 문제 등에 대한 이견도 커졌다. 그러자 오바마 행정부는 2009년 말부터 대북정책과 관련해서는 “전략적 인내”로 후퇴했고 중국을 겨냥해서는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추구했다.
지난 30년간 미국의 북핵 대처에서 주목할 점은 협상은 결렬과 재개가 반복되어왔지만, MD는 일관되게 추구해왔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중국은 미국 주도의 MD를 21세기 최대의 전략적 위협의 하나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미중간의 핵전력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방패까지 갖는다면 양국 사이의 전략적 균형은 무너질 것이라고 우려해왔기 때문이다. 한반도 문제와 중미관계 사이의 관계동학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준 장면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999년 1월 30일 펜타곤 기자회견장에 선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 그는 “점증하는 깡패국가들(rogue states)의 탄도미사일 위협으로부터 미국과 동맹국을 방어할 수 있는 MD를 구축하라”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의 입에서 거명된 두 나라는 북한과 러시아였다. 코언은 미국의 MD는 깡패국가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북한을 그 예로 들었다. 반면 러시아를 언급한 이유는 정반대였다. “제한적인 MD는 러시아의 핵 억제력에 대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러시아는 걱정할 이유가 없다.” 그러자 한 기자가 손을 들고 물었다. “장관님, 32년 전에 맥나마라 국방장관 역시 방금 장관께서 말씀하신 것과 흡사한 연설을 했습니다. 맥나마라 장관이 (북한 대신에) 중국을 깡패국가라고 불렀던 것을 제외하곤 말이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황한 코언은 “제한적인 MD는 북한과 같은 깡패국가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미국인 기자가 거론한 1967년 맥나마라의 기자회견 장면을 보자. 그는 중국을 “깡패국가”로 부르면서 “중국을 겨냥한 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이 내세운 명분은 다량의 핵미사일을 보유한 소련이 아니라 이제 막 핵보유 문턱을 넘어선 중국이었다. 소련을 직접 거론하면 소련을 자극해 군비경쟁과 안보 딜레마를 격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국 내에서는 “소련은?”이라는 반문이 나왔다. 이에 대해 맥나마라는 2주 후 기자회견을 통해 “만약 우리가 미국 전역에 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배치하면 소련은 확실히 그들의 공격 능력을 강화시켜 우리의 방어적 이점을 무력화시키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MD는 중국이 조만간 보유할 것으로 보이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소련을 중국으로, 중국을 북한으로 이름만 바꿔보면, 1990년대 이후 MD에 대한 미국 정부의 화법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는 미국 MD의 최대 명분이었다. 미국 주도의 MD가 본질적으로는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고 제기되었지만, 미국은 MD와 중국을 직접 결부시키기를 부담스러워했다. MD가 중미관계에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의 전직 국방장관들을 비롯한 전략가들은 2008년에 펴낸 <미국의 전략 태세>라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주문했다. “미국이 MD를 구축하는 과정은 러시아나 중국이 미국 및 동맹에 대한 위협을 증대시키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위협론을 먹잇감으로 삼아 MD 구축에 박차를 가하면서 이러한 모호성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2016년부터 한중관계를 강타해온 사드문제가 대표적이다.
2014년 5월 들어 미국이 한국에 사드 배치를 시사하고 나오자 중국과 러시아는 사드 배치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러자 미국 국방부는 “사드는 전략적 MD가 아니기 때문에 중국과 러시아는 사드를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미국의 본심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미국 스스로 사드를 비롯한 MD 배치가 중국의 안보 이익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밝혔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관리들은 “중국은 항상 그들의 ‘핵심 이익’과 그들이 대응해야 할 위협을 말하고 있다”며, “이제 중국은 우리 역시 우려를 갖고 있다는 것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는 곧 중국이 북한을 압박하지 않으면, 미국은 중국이 가장 우려하는 MD 구축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발언도 있다. 1기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힐러리 클린턴은 2013년 6월 4일 골드만삭스 임원진을 대상으로 한 비공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중국인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북한이 이대로 핵 개발을 계속하고, 소형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ICBM을 손에 넣게 되는 상황을 우리는 용납할 수 없다고 말이죠. 그러한 상황은 우리의 동맹인 일본과 한국에게 위협일 뿐만 아니라 하와이, 그리고 미국 본토의 서부 해안까지 위협을 미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우리는 중국을 MD로 에워쌀 것이며, 동아시아 지역에 더 많은 함대를 배치할 것입니다.”
클린턴은 이런 말도 했다. “북한이 주기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이를 굳이 나쁘게 볼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미국의 입장에서는 반길 만합니다.” 이는 문맥상 북한이 간혹 핵실험이나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하는 것이 미국에게 이롭다는 뜻을 내포한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북핵 문제와 MD는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양수겸장(兩手兼將)에 해당된다. 북핵 문제 악화의 주된 책임을 중국에게 돌리면서 중국의 안보 이익을 침해할 수 있는 MD 구축에도 박차를 가해왔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MD와 북핵의 적대적 동반성장이 품고 있는 핵심에는 미국의 대중국 봉쇄전략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셈이다.
미국의 ‘북한위협론’은 ‘말이 씨가 된다.’는 격언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미국은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에는 소극적이면서 북한 위협 과장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사이에 북한은 실제로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 구비의 문턱까지 도달했다. 2017년 수소폭탄 실험에 이어 ICBM에 해당하는 탄도미사일 시험발사까지 성공하면서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것이다. 미국의 적대국이 핵탄두 장착 ICBM 문턱까지 도달한 것은 1970년대 중국 이후 처음이었다. 이로 인해 미국은 더 이상 북한에 대한 ‘전략적 인내’를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또한 미국은 2017년 12월에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국제질서의 현상변경을 추구하는 수정주의 국가들”로 못 박았다. 냉전 종식 이후 이 표현이 미국의 국가 문서에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미국의 관성에 비춰볼 때, 대북 협상과 대중 봉쇄는 어울리는 짝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에게 북한의 핵탄두 장착 ICBM 보유 저지는 당면 과제였고, 중국 견제는 전략적 과제였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는 2018년 6월 북미정상회담을 거치면서 북한의 핵탄두 ICBM 제한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 중국 견제 및 봉쇄 쪽으로 빠르게 방향을 전환했다. 이게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이 일방적이고 강경하게 변해온 것과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무역전쟁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을 대하는 태도도 180도 달라졌다. 그는 1차 북미정상회담 성사를 두고 “내 친구 시 주석의 큰 도움을 잊지 말라”며 “그가 없었다면 (북미관계는) 더욱 길고도 험난한 길이 되었을 것”이라고 중국의 역할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에는 화법이 확연히 달라졌다. 북한이 미국에 불만을 표하거나 북미협상에서 트럼프 자신이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 책임을 중국에 전가하는 화법을 즐겨 사용한 것이다. 일례로 트럼프는 2018년 8월 24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취소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의 무역에 관한 훨씬 더 강경한 입장 때문에 중국이 예전만큼 비핵화 과정을 돕고 있지 않다.”
1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미국의 달라진 태도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을 또다시 떠올리게 했다. 미국이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배경에는 미국이 ‘중국몽’을 꺾기 위한 전략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은 미중 무역전쟁과 한반도 문제는 별개라는 입장을 분명히 해왔지만, 미국은 이 두 가지를 연계시키면서 북한과 중국을 동시에 압박했다. 특히 미중 무역전쟁에서 중국에게 사실상 백기투항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무역전쟁 격화는 물론이고 한반도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는 책임도 중국에 전가하려고 했다. 그리곤 ‘선(先) 미중 무역협정 타결, 후(後) 북미 합의’를 선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트럼프는 2019년 2월 말 2차 북미정상회담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하노이 노딜을 중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지렛대로 활용하겠다는 의도까지 내비쳤다.
미중무역전쟁은 미국의 대북 제재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는 북한만 겨냥한 것이 아니라 중국까지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은 북한과의 경제협력 확대가 중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들인 동북 3성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일대일로를 남북한과 연결하는 방안까지 거론되었다. 그런데 이를 위한 대전제는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 완화와 해제에 있었다. 하지만 대북 제재 해결에 대한 중국의 요구와 기대감이 높아질수록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는 유지·강화되었다.
이처럼 미중 패권경쟁과 한반도 문제가 상당히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북한위협론’을 지렛대로 삼아 중국의 부상을 견제함으로써 유일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와 북핵 문제 해결 시도 사이에서 오락가락해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중국 견제 및 봉쇄는 전략적이고도 장기적인 목표인 반면에, 북핵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가시적인 성과와 이익이 불분명한 중국 봉쇄보다 해결하기만 한다면 가시적인 성과가 명확히 드러날 수 있는 북핵 문제 해결이 미국 행정부의 우선순위가 될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때가 한반도 문제를 미중 패권경쟁에서 최대한 분리해 문제 해결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이런 기회는 몇 차례 있었다. 북핵 문제가 처음 불거지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과 북핵 문제가 중대한 분수령을 만났던 2008년이 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인 기회들은 미국 강경파의 반발과 더불어 한국의 퇴행적인 선택과 북한의 경직된 태도가 맞물리면서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양상은 최근에도 나타나고 있다.
한반도 문제의 미해결을 미중관계의 탓만으로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실용적이지도 못하다. 북한은 단계적인 해법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과감한 해법을 들고 대담판을 시도해야 한다. 한국 역시 이러한 접근이 가능해지도록 그 여건과 분위기 조성에 힘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