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운동의
새로운 서사를 모색하다

수업이야기 >> 교과서 분석 - 한국사 교과서 형평운동 서술 검토


≫ 신진균(경남 옥종고등학교)


2015년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가 전 국민의 저항으로 무산되면서 2015 교육과정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2020학년도부터 학교 현장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국정에서 검정으로 한국사 교과서 편찬제도가 바뀌고 2007, 2009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교과서 집필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교과서의 질과 수준은 크게 향상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 교과서에 대한 평가는 약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이고, 사람마다 교과서관이 다를 수 있고, 국정화 소동을 겪으면서 집필 시간이 부족한 탓도 있으리라.

이 글에서는 2015 교과서가 형평운동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비교・분석해 보고자 한다. 글쓴이는 역사교사는 지역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형평운동, 진주농민항쟁, 진주성 전투, 남명 조식, 논개 등 진주 역사에 관심이 많다. 올해로 18년째 형평운동기념사업회에 몸담고 있으면서, 연수‧답사‧강의‧캠프‧공모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형평운동을 알리고 있다. 아울러 2023년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학술대회, 후손찾기 및 자료수집, 각종 공모사업, 형평공원 및 형평기념관 건립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형평운동은 일제강점기 진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하여 간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이자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금자탑으로 평가받는 사건이다. 분석대상으로 삼은 교과서는 금성출판사, 동아출판, 미래앤, 비상, 씨마스, 지학사, 천재교육, 해냄에듀(가나다순) 등 총 8종이다. 형평운동에 대한 학계의 연구업적으로 바탕으로 형평운동의 배경, 전개, 주도 세력, 평가 등 질적 분석을 주로 시도할 것이다. 나아가 목차구성, 서술 분량, 보조 코너, 자료(사료) 등 양적 분석도 시도할 것이다. 때로는 출판사별 비교・분석을 넘어 바람직한 서술 방향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1. 형평운동의 배경


형평운동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8종 교과서 모두 백정에 대한 편견과 차별 때문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백정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여전하였다.”
(씨마스, 191.)


모든 교과서가 문장까지 유사하다. 당시 백정들이 겪어야만 했던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느냐에 대해서는 교과서마다 조금씩 다르다. 일제강점기 백정들이 겪었던 대표적인 차별은 호적에 백정 신분을 표시하는 것과 교육차별이었다.

대부분의 교과서는 “호적에 직업이 백정으로 기록되었으며, 자녀의 학교 입학이 거부되기도 하였으며, 자녀의 학교 입학이 거부되기도 하였다.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차별을 받았다.”(동아)라는 식으로 호적과 교육차별을 모두 서술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일제는 호적에 붉은 점 등으로 표시하여 백정 신분이 드러나게 하였다.”(미래앤)라고 하여 호적 차별만으로 서술한 교과서도 있었다. 호적에 백정 신분을 드러내는 ‘붉은 점’을 표시하여 백정을 차별하였다고 소개하는 교과서(비상, 금성, 미래앤, 지학사)가 많았고, 동아출판의 경우 “도한으로 써넣거나 이름 위에 붉은 점을 찍었다.”라고 서술하여 ‘도한’이라는 표현을 유일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도한(屠漢)이란 잡을 도, 사나이 한, 즉 짐승을 잡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백정 중에서도 짐승을 잡고 고기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2)


2)도한은 재설꾼 혹은 칼잡이로도 불린다. 도한 이외에도 하늘 일에 따라 다른 종류의 백정이 있었는데, 가죽 제품을 만드는 일을 하는 갖바치, 고리버들로 키나 바구니 같은 생활용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유기장이 있었다.




본문 서술이 아니더라도 보조 코너-용어해설이나 탐구교실-를 통해 백정에 대한 차별을 분야별로 다양하게 소개하는 교과서도 있었다.(비상, 금성) 비상의 경우, 용어해설을 통해 백정에 대한 차별 사례로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거나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고,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입학 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서류에도 신분을 반드시 표시하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는 호적에 붉은 점 등을 표시하여 백정을 구별하였다.”라고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금성의 경우에는 탐구교실이란 코너에서 백정에 대한 다양한 차별 사례를 그림과 함께 제시하여 학생들의 이해를 높였다. 일반적으로 백정들은 출생에서 죽음까지 전 생애에 걸쳐 차별을 겪어야 했다.3)


3) 김중섭, 형평 운동 연구, 민영사, 1993. pp. 50-52.




백정이 태어나면 조선 시대에는 호적에 오르지 못했고, 이름자에 석(石), 돌(乭), 피(皮)와 같이 좋지 않은 뜻의 글자를 사용해야 했다. 갑오개혁 이후 신호적법에 따라 신분은 사라졌지만, 직업을 기재하는 란이 있어 여전히 신분이 드러났던 것이다.
백정은 교육기관(학교)에 입학할 수도 없었고 과거를 포함한 일체의 공권에서 배제되었다. 서당이나 학교로부터 입교를 거부당하거나 입학하더라도 백정 신분이 알려지면 온갖 핍박과 차별로 학교에 다니기 어려웠다. 성인이 되어서도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취직도 불가능하였다.
일반인과의 혼인은 금지되고 백정들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다. 신랑과 신부는 ‘소등 장가’나 ‘널빤지시집’이란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었다.
백정은 일상생활에서도 차별을 겪었다. 백정들은 성안에 사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일반인들과 떨어져 살았다. 남자는 상투를 틀지 못하고 여자는 비녀를 꽂지 못했다. 명주옷이나 두루마기를 입을 수 없었고 갓 대신 패랭이를 착용해야 했다. 백정이 사는 집 지붕에 기와를 얹거나 주택을 화려하게 치장하지 못했다. 일반인에게는 나이에 관계없이 존댓말을 사용해야 했다.
백정은 장례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상을 당했을 때 상복이나 지팡이를 쓸 수 없었고, 삼베 두건만 사용할 수 있었다. 상여를 탈 수 없었고 일반인들의 묘지와 격리된 곳에 매장되었다.


이상으로 8종 교과서 모두 백정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형평운동의 배경으로 서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정에 대한 차별과 편견의 구체적 사례는 교과서마다 차이가 있었는데, 백정임을 알려주는 호적 표시와 교육에서의 차별을 주로 제시하고 있었다. 다만 씨마스의 경우, 형평운동을 독립항목으로 설정하지 않았고 서술 분량도 너무 소략해서인지 백정들이 겪었던

구체적인 차별 사례를 제시하지 않고 있었다.


형평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설을 주장하고 있다.4) 대체로 이학찬 씨 자제의 공립보통학교 입학 거부 사건이 그 배경이 되었다는 설, 일본의 특수 부락민 ‘에타’의 신분 해방 운동인 수평사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노동・농민・여성운동 등 사회운동이 활성화되었던 것이 큰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설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농청의 부당한 횡포 때문이라는 설, 일제의 경제적 침탈로 백정의 전통적인 산업기반의 붕괴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어느 한쪽의 영향만이 아니라 여러 배경이 종합되어 형평사가 창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김재영, 일제 강점기 형평운동의 지역적 전개,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그러나 8종 교과서 모두 백정에 대한 차별을 주요 원인으로 보고 있으며, 사회주의 영향, 일제의 경제침탈, 농청의 횡포 등은 아예 언급조차 없다. 수평사 영향설은 해냄에듀만 “일본에서 시작된 수평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의 특성상 모든 역사적 사실을 담아낼 수 없으며 특정 사실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할 수도 없다. 즉 내용 선정이나 서술 분량, 그리고 서술 방향에 있어서 선택의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영향설은 직접 언급은 없지만 모든 교과서에서 3.1운동 이후 농민・노동・청년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이 활성화된 배경으로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점은 2015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제시하는 대단원 3-일제 식민지 지배와 민족 운동의 전개-의 목차구성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으로 민족 내부의 계급 모순에 주목하게 되었고, 온갖 차별과 억압 속에 놓여 있는 백정들에게는 계급 해방은 희망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일제의 경제침탈은 일부 교과서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개항 이후 일본 상인들이 영국산 면제품을 가져와 팔고 조선에서 소가죽, 쌀과 콩 등을 사 갔다. 특히 소가죽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백정의 전통적인 산업기반이라 할 수 있는 피혁 산업이 침탈당하면서 백정층 내부에서도 계층분화가 가속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다수 백정들은 상호 결속을 통해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농청은 두레꾼들의 공동 집회소이자 회의 장소였으며 농민들의 공동 창고이자 휴식 장소였다. 보통의 경우 농청은 하층 농민과 머슴들을 조합원으로 하여 20~200명의 청년들로 구성되어 활동하였다. 하층 농민들로 구성된 농청의 특성상 양반 지주 세력의 비호 아래 양반 중심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첨병 역할을 해 왔다. 실제로 진주의 반 형평 사건에서 잘 드러나듯이 농청은 형평운동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단체였던 것이다. 농청원들은 지주(구 양반)의 사주를 받아 형평사 사원과 간부들을 집단으로 폭행하기도 하고, 비백정 출신의 형평 사원들을 ‘신백정’이라 부르며 그들의 가게나 집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농청의 부당한 횡포로 인해 형평사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선택과 배제의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형평사 창립 배경을 서술할 때 백정에 대한 차별과 함께 수평사 영향설은 언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수평사 영향설은 이학찬 불만설과 함께 조선총독부 기록 5)에 동시에 확인되지만 우리 학계에서는 부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5)朝鮮總督府,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1936년판, 1938년판; 朝鮮總督府警務局, 高等警察用語辭典, 1933



이 점은 형평운동의 주도 세력(지도자)으로 이학찬을 비중 있게 다루는 것과 대조적이다. 즉, 형평운동의 배경과 관련하여 이학찬과 수평사가 똑같이 조선총독부 기록에 실려있지만, 수평사 운동이 형평사 창립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외면하면서도 이학찬이 형평사를 창립했다는 사실은 강조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일본의 수평사 운동은 형평사 창립 1년 전인 1922년에 일어났고, 이후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두 단체 간의 국제적 연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비중 있게 다룰 필요가 있다.



2. 형평운동의 전개. 발전, 쇠퇴


형평운동이 1923년 진주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8종 모두 언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평운동이 어떻게 확산하고 쇠퇴하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교과서마다 전혀 다른 서술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우선 “언론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하였고”(지학사)라는 서술처럼, 대부분의 교과서가 형평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발전하는 데 언론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었다. 형평운동의 발상지 진주만 하더라도 초기 지도자 강상호, 신현수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지국장을 맡고 있어서 형평운동의 실상을 비교적 쉽게 보도할 수 있었다. 이점은 형평운동에 관한 연구가 대부분 당시 신문자료에 근거하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형평운동이 전국적으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언론의 지지 외에도 “언론과 사회주의 계열의 지지에 힘입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천재, 비상)고 한 것처럼, 사회주의 계열의 지지가 있었다고 서술한 경우도 있었다.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회 운동 단체와 연대하여”(미래앤)라고 서술한 교과서도 있었고, “조선 청년 동맹 같은 사회단체도 형평 운동을 지지하였다.”(해냄)고 한 것처럼 구체적인 단체명을 제시한 경우도 있었다. 금성출판사의 경우, 형평운동의 전개 방식으로 ‘강연과 청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하였다.

조선 형평사가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산하여 간 배경에는 지사와 분사의 설립이라는 조직적 팽창이 한몫했다. 동아 교과서의 경우, “1927년에는 전국에 지사와 분사를 두고, 회원이 7천여 명에 달하는 단체로 발전하였다.”라고 서술하여 지・분사를 통한 형평운동의 전개 과정을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1927년에는 전국에 지사와 분사를 두고”라는 서술은 1927년에야 지사와 분사를 둔 것처럼 오인할 우려가 있고, 바로 뒤에 이어지는 “회원이 7천여 명에 달하는 단체로 발전하였다.”라는 서술은 자칫 조선 형평사가 조직 면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시기가 1927년이었을 것이라는 오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검토해 보면, 조선 형평사의 지・분사의 조직은 1923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사원 수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1928년(9,688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6) 따라서 “조선 형평사는 각 지역에 지・분사의 설립을 통해 조직을 확대해 나갔고, 1928년에는 회원이 9천여 명에 달하는 단체로 발전하였다.”라고 서술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6) 고숙화, “형평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pp.100-101. 김중섭, “형평 운동 연구”, (한국사회학연구소, 1993) 1927년 통계는 나와 있지 않다.


1923년 진주에서 시작된 형평운동은 1년도 안 되어 지도자들끼리 활동 방향 등에 대한 견해 차이를 드러내면서 파벌 싸움으로 확대되어 심각한 내부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본사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총본부의 소재지에 따라 ‘진주파’와 ‘서울파’로, 지역적 지지 기반에 따라 ‘남파’와 ‘북파’로, 활동 방향에 따라 ‘온건파’와 ‘혁신파’로 갈라지게 되었다.7) 8종 교과서 중에서 “조선 형평사는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1925년에는 본부를 서울로 옮기고 형평사 전조선 대회를 열었다.”라고 하여 유일하게 ‘본부 이전’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동아출판 교과서이다. 진주파와 서울파의 대립은 1924년 8월 15일~16일 대전에서 전국대회를 개최하여 형평사의 명칭을 조선 형평사 중앙 총본부라 고치고, 본부를 서울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이후에도 대립과 분열을 거듭하다가 1925년 4월 25일~26일 제3회 전국대회(전 조선 형평 대회)에서 양파의 합동을 결의하기에 이른다.8)


7) 김중섭, 앞의 책, p. 136.

8)고숙화, 앞의 책, pp. 86-96.



모든 유기체가 그러하듯이 사회운동도 발생-성장-쇠퇴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형평운동도 1923년 창립 이후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하다가 1920년 말부터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백정의 후손임을 유일하게 밝힌 김영대는 형평운동의 발전 과정을 창업기(1923~1925), 활동기(1926~1928), 시련기(1929~1931)로 나누었다. 실제로 형평사 사원의 통계 수치를 보더라도 1929년 즈음에 급격히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형평운동의 쇠퇴를 언급하고 있는 교과서는 3종이었다. “형평운동은 일제의 통제 및 탄압과 내부 갈등 등으로 쇠퇴하였다.”(지학사)고 추상적으로 서술한 교과서도 있고, 다음 두 교과서는 형평사 해소론을 염두에 두면서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말 내부적으로 이념 갈등이 심해지고,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힘을 잃어 갔다. 결국 조선 형평사는 점차 경제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로 변모하였고 형평운동은 쇠퇴하였다.(금성)

…그러나 1920년대 말부터 내부적으로 이념 갈등을 겪으며 조직이 약화되었고,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회원의 친목 도모와 경제적 이익 추구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다.(동아)


형평사 해소론은 일제강점기 사회(민족해방) 운동사가 그러하듯이 신간회 해소론의 등장과 궤를 같이한다. 즉, 사회주의 경향의 활동가들이 비계급적이고 비대중적인 형평사를 해소한 뒤, 각자 종사하는 분야의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계급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10) 형평사 해소 논쟁의 파장은 1930년대 초반 지도 세력 간의 주도권 다툼과 결합되어 형평사원이나 조직 수가 뚜렷하게 감소하는 등 형평운동의 퇴조를 가져왔다. 결국 1933년 ‘형평청년 전위동맹’ 사건으로 형평사는 급진 세력이 몰락하고 온건 세력에 의해 일제 부역 집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대륙침략을 준비하던 일제가 군수품인 피혁제품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형평사 내 급진 세력을 탄압함으로써 형평사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 11) 이후 형평사는 1935년 제13회 전국대회에서 대동사로 개칭되면서 만 12년의 역사를 지닌 형평사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선택과 배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 역사 교과서의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한 사건이나 운동을 다룰 때, 발생-성장-쇠퇴의 추이를 파악할 수 있는 서술은 교과서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가 아닐까.


10)형평사 해소론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중섭의 앞의 책, pp. 265-279; 고숙화의 앞의 책, pp. 263-283. 참고

11)형평 청년 전위동맹 사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중섭, 앞의 책, pp. 279-285; 고숙화의 앞의 책, pp. 284-316. 참고




앞에서 살펴본 대로 형평운동의 쇠퇴 과정에서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형평사 해소론’, ‘ 형평청년 전위동맹 사건’, ‘대동사’란 단어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내부 이념 갈등”, “일제의 탄압”, “경제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 등의 표현으로 형평운동의 종언을 서술하고 있었다. 형평운동의 전개 과정에 한정하여 본다면, 동아와 금성 교과서가 형평운동의 흐름을 잘 드러나게 서술하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형평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의 하나가 ‘반 형평운동’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형평사가 창립되자 당시 언론과 사회단체에서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지지하였다. 그러나 형평운동과 사원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공격과 억압도 여러 형태로 일어났던 것이 사실이다. 학계에서는 형평운동에 대한 일반인들의 반대 활동을 ‘반 형평운동’이라 명명하며 주목하였다.12) 이에 관해 두 교과서만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2)반 형평운동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중섭, 앞의 책, pp. 161-192. 참고



해냄에듀의 경우, 본문에서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백정에 대한 차별을 옹호하며 형평 운동을 공격하는 반 형평 운동도 일어났다.”(205쪽)라고 서술한 뒤, ‘정리하고 역량 키우기’ 코너에서 진주와 예천 사건을 자료로 제시하여 탐구와 토론 과제로 반 형평 운동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금성의 경우, 탐구교실이라는 코너에서 반 형평 운동의 사례로 진주와 예천 사건을 소개하면서 “반 형평 운동에 대해 당시 백정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생각해 보자.”라는 활동을 제시하고 있다.(211쪽)

그런데 반 형평 운동에 대한 교과서 서술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용어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사회운동[social movement, 社會運動]이란 “사회의 변혁·개량이나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집단으로서 지속적으로 행하는 행동”(두산백과)으로 정의된다. 때로는 지배계급이 자기 이익을 지키고 현존 사회제도를 존속·강화시키기 위하여 벌이는 사회운동도 존재하지만, 피지배 계급이 주도하는 경우가 많고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지향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백정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바탕으로 형평사의 활동을 반대하고 사원들을 공격했던 일반인들의 움직임을 ‘운동’이라는 용어를 붙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대신 ‘활동’이나 ‘사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형평운동에 대한 일반인들의 반대 움직임을 ‘반 형평 활동’으로, 나아가 일반인들의 백정에 대한 공격으로 일어난 충돌(사건)을 ‘반 형평 사건’으로 명명할 것을 제안한다.



3. 주체의 문제


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는 이른바 주체의 문제이다. 누가, 어떤 세력(집단)이 주도했는가의 문제는 그 운동의 성격이나 지향을 규정짓는 결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8종 교과서에는 형평운동의 주체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조선 형평사에는 백정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가입할 수 있었다.(해냄에듀)

백정은 자신들에 대한 차별을 폐지하여~~ (미래앤)

이에 백정들은 ~조선 형평사를 조직하고,~~~ 진주 백정 이학찬 등이 중심이 되어~형평사를 창립하고~~ (동아출판)

이에 백정들은 ~~형평사를 조직하였다.(금성)

백정들은 ~~형평사를 만들고~~ (비상)

경남 진주의 백정들은 조선 형평사를 조직하여~~(지학사)

이들(백정)은 1923년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씨마스)

모든 교과서에서 백정이 형평운동의 주체임을 서술하고 있는데, 해냄에듀 교과서만이 “백정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가입할 수 있었다.”라고 하여 비백정 출신도 형평사원이 될 수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형평사 사칙 제4조에는 “본 사원의 자격은 조선인은 하인(何人)을 불문하고 입사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여 사원 자격을 백정만이 아닌 모든 한국인으로 하고 있다. 이점은 형평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되어 간 동력이 되기도 하였지만, 형평운동의 방향과 조직상의 혼란을 가져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형평사 창립기 혹은 초기 형평운동을 이끌어간 사람들은 백정 공동체의 영향력을 가진 부유한 백정들과 직업적 사회운동가들이었다. 초기 형평운동을 이끈 지도자로-강상호, 이학찬, 장지필, 신현수, 천석구 등이 거론된다. 그중에서 비백정 출신은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인데, 그중에서도 강상호는 형평사 창립부터 대동사 시기까지 형평운동에 깊이 관여한 중요한 인물이며, 진주 지역에서는 ‘형평운동의 아버지’로 불린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교과서의 서술은 자칫 형평운동이 처음부터 백정들만의 계급 운동이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이 동참한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백정 출신 중에서는 이학찬이 유일하게 언급되고 있는 점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7차 교육과정 시기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이후 이학찬의 이름은 교과서에 자주 언급되곤 하였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학찬이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 형평사를 창립하게 되었다는 총독부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학찬이 백정 출신으로서 초기 형평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백정 출신으로서 형평운동이 전개되는 전 기간에 걸쳐 훨씬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지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은 앞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장지필은 경남 의령 출신으로 일본의 메이지대학을 중퇴한 엘리트로 1910년대 도수조합 결성 시도, 형평사 초대총무, 형평사 혁신동맹 총본부 임시의장,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투옥, 형평사 총본부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4. 평가의 문제: 연대, 민족 해방 운동으로의 확산


우리는 흔히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운동이 누가, 왜 일으켰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무엇을 지향했는지, 나아가 당대 혹은 후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따져보게 된다. 일제강점기 가장 활발하게 오랫동안 지속하였던 형평운동을 과연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단순히 백정들만의 신분 해방 운동이었을까, 아니면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했던 민족 운동으로 볼 수는 없을까? 조선 형평사가 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살펴보면, 형평운동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사회단체와 연대를 통해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해냄)

백정에 대한 편견과 차별 철폐 운동에 그치지 않고 파업이나 소작 쟁의 등 여러 사회운동과 연대하였다.(천재)

다른 사회운동 단체와 연대하여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미래앤)

다른 사회운동 단체와 협력하여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동아)

조선 형평사는 다른 사회운동 단체와의 연대에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민족을 넘어 수평사라는 일본 단체와 함께 차별 철폐 및 인권 신장을 추구하였다.(금성)

나아가 조선 형평사는 다른 분야의 사회 운동 단체와 협력하면서 파업, 소작 쟁의 등에 참가하는 등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비상)

파업이나 소작 쟁의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사회 운동에도 참여하였다.(지학사)


대부분의 교과서가 다른 사회운동 단체와 연대한 사회운동으로 형평운동을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항일 민족 운동’의 성격으로 서술한 교과서도 3종이 있었다.(해냄, 미래앤, 비상) 특히 금성 교과서처럼 일본의 수평사와의 연대를 강조한 경우도 있었다.

형평운동의 성격이나 지향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형평사 주지나 사칙일 것이다. “아등은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권장하여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기를 기함”이 형평사의 주지라고 밝혔고, 사칙에서는 “계급타파,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권장, 상호의 친목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과서의 특성상 형평사 주지나 사칙을 소개하고 분석하면서 형평운동의 목적을 서술하는 데는 분량 면에서 한계가 있다. 형평운동은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철폐하고 인간으로서의 기본권리를 쟁취하려는 신분 해방 운동으로 출발하였고, 이는 우리 역사에서 인권운동, 사회평등 실천운동으로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봉건유제를 타파하고자 하는 사회개혁 운동이라는 점에서도 그 역사적 위치를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금성 교과서는 ‘차별 철폐와 인권 신장을 추구’하였다고 서술하였고, 비상 교과서는 “백정의 인권이 향상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는 거처럼, ‘인권’이란 용어를 직접 사용하면서 인권운동으로서의 형평운동을 강조하였다.

형평운동이 인권신장 내지 신분해방을 내세운 사회운동이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과연 항일 민족 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형평 운동에는 좁은 의미의 ‘신분 해방’을 넘어서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의 성격을 포괄적으로 내포하게 되었다. 보기를 들어, 혁신파의 핵심 지도자들은 민족 해방을 추구하는 고려 혁명당에 참여하였고, 192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젊은 지도자들은 사회주의 경향 아래 급진적 활동 성향을 드러냈다. 16)


학계에서는 형평운동이 일제강점기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목표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고, 가장 오랫동안 지속하였던 사회운동이자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지만 대부분의 교과서가 다른 사회단체와의 연대를 서술하고 있으면서도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고 서술한 교과서는 3종에 그치고 있다. 실제로 형평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강상호의 경우, 2005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는데 형평운동 공적이 아니라 진주의 3.1운동 공적으로 추서되었다. 이는 형평운동이 학문적 평가와는 달리 현실적・공식적으로는 항일 민족 운동으로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 해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고려혁명당 사건을 차치하고서라도 조선 형평사가 다른 사회 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반 형평 사건에 대한 일제 경찰의 차별적・방관적 태도에 대한 저항하는 과정에서 형평운동은 항일운동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사 교과서에 형평운동이 내포하고 있었던 민족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5. 내용 체계와 성취기준


역사 교과서는 특별한 양식에 공적 기억을 담아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역사책이다. 자유 발행제가 아닌 이상 그것이 국정이든, 검인정이든 국가 수준에서 요구하고 허용하는 기준(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결정하는 1차적 요인은 교육과정이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사 교과서는 2015 개정 한국사 교육과정에 의거하여 편찬되었다.

교육과정은 크게 성격, 목표, 내용 체계 및 성취기준, 교수・학습 및 평가의 방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교과서 서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부분은 내용 체계 및 성취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교육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내용 체계는 다음과 같다.

캡처.JPG


이에 기반하여 편찬된 2015 한국사 교과서의 단원 구성은 다음과 같다.

캡처2.JPG 표 2015 한국사 교과서의 일제강점기 단원 구성


대부분의 교과서가 대단원 Ⅲ. 일제 식민지 지배와 민족 운동의 전개, 중단원 사회・문화의 변화와 사회 운동, 소단원 다양한 사회・대중 운동 속에 여성, 소년 운동과 함께 형평운동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씨마스 교과서는 대단원 Ⅲ. 일제 식민지 지배와 민족 운동의 전개, 중단원 3. 식민 통치의 변화와 민족 운동의 성장, 소단원 3-2. 1920년대 국내 민족・사회 운동 속에 여성운동과 함께 형평운동을 다루고 있어 특이하다. 대부분의 교과서가 형평운동을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다루기보다는 일제강점기 사회운동 속에 형평운동을 위치시킨 것과 달리 씨마스 교과서는 민족 운동사 속에 형평운동을 편재하고 있는 것이다. 씨마스의 경우,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 대주제-일제 강점과 민족 운동의 전개, 소주제-국내 민족 운동의 전개 속에 형평운동을 구성한 것과 유사한 내용 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즉, 2009 개정 교육과정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 속에 사회운동을 포함시킨 것과는 달리, 2015 교육과정에서는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분리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씨마스 교과서가 내용 체계상으로는 1920년대 항일 민족 운동의 전개 속에 형평운동을 다루고 있지만, 분량 면에서 너무 소략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2015 교육과정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성취기준이 도입된 것이다. 성취기준이란 “학생들이 교과를 통해 배워야 할 내용과 이를 통해 수업 후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능력을 결합하여 나타낸 수업 활동의 기준”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중학교 교육과정(교육부 고시 제2018-162호 [별책 3], ‘일러두기’.

이러한 성취기준은 전국의 모든 학교에 적용하기 위한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기준의 성격을 갖는다. 이 성취기준은 학교 현장에서 수업의 방향을 설정하고 교수·학습 내용선정뿐만 아니라 교과서 개발 및 검·인정을 위한 중요한 기준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형평운동과 관련하여 2015 교육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성취기준과 해설은 다음과 같다.


[10한사03-04] 사회 모습의 변화를 살펴보고, 다양한 사회 운동을 근대 사상의 확산과 관련지어 이해한다.

[해설] 교통과 도시의 발달, 식민지 경제의 변화가 도시와 농촌 및 개인 삶에 미친 영향을 파악한다.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자유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등 근대 사상과 전통사상에 입각하여 청년·농민·노동·여성·소년·형평 운동 등 다양한 대중운동이 전개되었음을 인식한다.


교과서 편찬과 서술에 국가 차원에서 영향을 주는 것으로 교과서 집필기준이 있다. 2015 교육과정의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집필기준을 적정화하고 최소화한다는 원칙에 따라 대주제별로 중점이 되는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 범위를 제시하여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과서가 제작될 수 있도록 하였다. 형평운동에 해당하는 집필기준은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근대 문물의 내용과 근대 의식의 확산이 도시와 농촌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제시하고, 여성 운동을 비롯한 사회 운동의 전개과정을 설명한다.”라고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사회사를 2015 한국사 교육과정-집필기준에 근거하여 교과서를 쓴다면, 일제강점기(1920년대)에 다양한 근대 사상이 확산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서술하라는 것이다. 1920년대 다양한 사회운동의 전개를 구체적인 ‘근대 사상의 확산’과 관련지어 서술하라는 지침은 2015 교육과정에서 새롭게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2015 교육과정의 성취기준과 해설(그리고 집필기준)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려고 노력한 교과서는 금성출판사와 동아출판 2종이다. 금성의 경우, ‘주제 49 다양한 사상의 수용과 발전’이라는 별도의 소주제를 설정하여 ‘개조 사상, 민족주의, 사회주의, 신여성’ 등의 항목을 서술한 뒤, ‘주제 50 대중 운동의 확산’이라는 소주제 속에 농민・노동 운동, 청년 운동, 소년 운동, 여성 운동 과 함께 형평 운동을 서술하고 있다. 동아의 경우, 소단원 ‘근대 사상의 유입과 사회 운동’ 속에 ‘근대 사상이 확산되다’라는 항목을 두고 공화주의, 사회 개조 사상 및 사회주의, 자유주의, 페미니즘 등을 서술한 뒤, 청년 운동, 소년 운동, 여성 운동과 함께 형평 운동을 서술하고 있다. 나머지 출판사의 경우, 1920년을 전후하여 확산된 사회주의 정도를 별도의 항목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2009 개정 교육과정 교과서와 대동소이하다.


6. 서술 비중, 보조코너와 자료에 대한 분석


어떤 사건이나 주제에 대한 중요도는 그에 대한 출판사별 서술 비중의 비교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교과서 서술 비중을 비교할 때는 단순히 양적 비교 뿐만 아니라, 본문 서술과 함께 용어해설, 탐구활동 등의 보조코너, 그리고 자료(사료, 이미지 등)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할 필요가 있다. 다음 표는 형평운동 관련 출판사별 서술 비중과 보조코너, 자료 등을 비교하여 정리한 것이다.



캡처.JPG 표 2015 한국사 교과서 서술 비중, 보조코너, 자료 비교


출판사별 서술 비중을 살펴보면, 본문 서술은 동아출판 교과서가 가장 많고, 보조코너 분량은 금성 교과서가 가장 많았다. 본문과 보조코너를 통틀어서 보면 금성 교과서가 1쪽을 살짝 넘는 분량으로 가장 많았다. 물론 서술 분량의 많고 적음이 교과서의 수준과 질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사건이나 운동을 교과서에 담아낼 때는 최소한 그 본말(원인-전개-결과)은 서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나치게 압축된 역사 서술은 특정 사실을 암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참고로 2009 교과서(비상)의 서술 비중을 살펴보면, 본문이 대략 11줄, 용어해설에서 백정에 대한 차별, 보조 코너인 생각을 키우는 자료에서 형평운동의 전개, 자료(사료, 이미지)에서 포스터, 취지문 등을 2/3면을 할애하여 제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2009 교과서에 비해 2015 교과서가 형평운동 관련 서술 비중이 늘어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2015 고등 한국사의 집필기준에서 핵심 개념 중심의 학습량 적정화를 내세워 전체적인 서술 분량이 많이 줄었다. 비상 교과서에 한정해서 총 분량을 비교해보면, 2009 교과서 424면에서 2015 교과서 330면으로 대폭 줄었다. 다만, 2015 한국사 교과서의 가장 큰 특징이 근현대사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형평운동 관련 서술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은 보조코너에 대해 살펴보자. 해냄에듀의 경우, 소주제마다 ‘정리하고 역량 키우기’라는 코너를 두고 ‘개념 파악’, ‘인물/시간/공간 파악’, ‘탐구와 토론’ 문항을 각각 1문항씩 구성하였다. 이 중에서도 ‘탐구와 토론’ 문항이 다른 교과서의 탐구활동에 해당된다. 형평운동 관련 해냄에듀의 탐구활동은 아래와 같이 진주와 예천의 반 형평 사건을 자료로 제시하고, 제목 만들기와 토론 과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2015 교육과정에서 강조하는 핵심역량을 기르기 위한 탐구활동으로, 역사과 핵심역량 중에서도 ‘역사적 판단력’을 고려한 문항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금성 출판사의 경우, ‘탐구교실-차별을 넘어 인권을 향한 발걸음’이라는 코너를 전면에 배치하고 있었다. 형평운동이 백정들의 단순한 신분 해방 운동이 아니라 인권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페이지 전체를 할애하여 백정들이 어떤 차별을 받았는지, 형평운동을 일으킨 목표는 무엇이었는지, 반 형평 사건을 통해 당시 백정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추체험하게 하는 탐구활동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 구성은 10줄로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잘 짜여진 탐구활동을 전면에 구성하여 형평운동 전반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있었다.

비상 교과서의 경우, ‘생각을 키우자’는 코너를 설정하여 농민, 여성, 소년, 형평 운동 관련 자료를 제시하고 각 운동의 내용을 정리해 보는 탐구활동과 각 운동을 알리는 격문을 만들어 보는 문항을 구성하였다. 지학사 교과서의 경우, 탐구활동은 아니지만 ‘백정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었을까’라고 한 것처럼 질문 형식의 보조 코너-‘자료로 이해하기’를 구성하였다. 나머지 교과서들은 형평운동을 주제로 한 탐구활동을 구성하지 않았고, 빈칸 채우기나 단답형의 문항을 설정하여 정리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형평운동과 관련하여 아예 학습한 내용을 정리하거나 탐구활동을 배치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다음으로 각 교과서에서 어떤 사료와 이미지 자료를 활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형평운동 관련 자료는 총독부나 일본 경찰 등 일제 식민통치 기관의 기록이나 당시 언론의 기사가 거의 대부분이다. 사회적으로 가장 차별받고 억압받았던 백정의 사회운동이었기 때문인지 그들 스스로 남긴 기록이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는 1차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몇몇 후손들의 증언 자료가 있기는 하지만 연구자의 글을 통해 단편적으로 소개될 뿐이고, 절대 다수의 후손은 자신이 백정의 후손임을 밝히기조차 꺼린다.

우선 텍스트 자료로는 형평사 창립 선언문에 해당하는 ‘형평사 주지’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형평사 주지’라는 용어를 사용한 교과서는 하나도 없다. 대신 ‘조선 형평사 설립 취지문’ 혹은 ‘조선 형평사 취지문’ 혹은 ‘조선 형평사 창립 취지문’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형평사 주지(취지문) 본문에도 ‘주지’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각 교과서에서는 주지(主旨)란 용어를 ‘주된 뜻’, ‘주장’ ‘중요한 뜻’으로 풀어쓰고 있다. 아예 형평사 주지를 게재하지 않은 교과서도 3종(씨마스, 천재, 해냄)이나 된다. 형평사 주지의 첫 문장이자 핵심 부분은 이렇게 시작된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다.”(비상)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간의 본령이다.”(지학사, 미래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간의 본성이다.”(금성)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간의 근본이다.”(동아)

형평사 주지 원문에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다.”라고 되어 있다. 형평사 주지를 자료로 제시한 모든 교과서가 공통적으로 인류→인간으로 변환시킨 것이 눈에 띈다. 교과서가 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학습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변환, 즉 약간의 의역은 허용된다. 이를테면, 애정→사랑, 본량→본성으로 해석한 비상이나 금성 교과서의 경우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동아출판의 경우처럼 본량→근본으로 번역한 것은 ‘근본’이라는 단어가 반복될 뿐만 아니라 오해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지학사나 미래앤 경우처럼 본량→본령으로 번역한 것은 명백한 오역이다. 대부분의 연구서에는 본량이란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최근 출간된 연구서에 의하면 ‘본래의 양심’으로 풀이하였다.


형평운동 관련 이미지 자료는 기관지 정진의 표지 사진이나 몇몇 형평 운동가들의 사진이 남아있지만, 정기 대회 포스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형평운동의 상징이 된 조선 형평사 제6회 정기 대회 포스터는 8종 교과서 모두 싣고 있다. 제6회 대회와 제8회 대회 포스터를 함께 제시하고 있는 교과서는 동아출판과 금성 두 종이다. 다만 포스터의 명칭이나 용어는 “형평사 제8회 전국 대회 포스터, 형평 운동 포스터, 조선 형평사 제6회 전국 대회 포스터, 형평사 대회 포스터, 형평사 정기 대회 포스터, 조선 형평사 포스터” 등 천차만별이다.


1.jpg
2.jpg
조선형평사 제6회 전국대회 포스터(좌) / 조선형평사 제8회 전국대회 포스터(우)


미래앤, 천재교육 교과서처럼 원자료 그대로 ‘형평사 제6회 전 조선 정기 대회 포스터’로 하든지,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해냄에듀 교과서처럼 ‘형평사 대회 포스터’로 변환해도 큰 문제는 없다. 다만, 동아출판 교과서처럼 두 포스터를 동시에 제시하면서 하나는 ‘형평 운동 포스터’로, 다른 하나는 ‘형평사 제8회 전국 대회 포스터’로 명명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제6회, 제8회 대회 포스터’라는 점을 표시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7회 전국대회 포스터

한편, 최근 형평운동 관련 새로운 포스터가 (최초로) 공개되어 주목된다. 이 포스터는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자료로, 1929년 4월 23~24일 서울 천도교기념관에서 개최한다는 내용이다. 맨 위쪽에 형평 로고와 함께 ‘모히라! 자유평등의 기치하에로’라는 구호가 있고, 형평사원이 사기(社旗)로 추정되는 흰색과 붉은 색으로 구성된 깃발을 들고 있다. 1929년에 열린 제7회 대회는 사기를 새로 제작하였고, 형평사 기관지인 ‘정진’ 창간호를 발행하였으며, 형평사원임을 증명해주는 마크[메달]를 제작하는 등 중요한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따라서 이 포스터를 교과서에 제시하여 활용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7. 바람직한 서술 방향을 위한 제언


우리가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운동(사)를 서술할 때는 그것의 배경, 전개 과정, 주도 세력, 결과 및 의의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물며 역사 교과서는 교육적 목적으로 쓰여진 공적 기록이기 때문에 학습자의 역사이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형평운동의 배경에 대하여 모든 교과서가 백정에 대한 차별을 주요 원인으로 서술하고 있었다. 형평운동은 백정에 대한 차별로 일어난 차별 철폐 운동이긴 하지만 수평사 창립,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 일제의 경제침탈, 농청의 횡포 등 다양한 원인과 배경이 작용하였다. 그중에서도 1년전 일본에서 창립된 수평사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후 두 단체 간의 국제적 연대를 도모했다는 점과 함께 교과서에 반영되어야 하지 않을까.

형평운동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교과서가 언론의 역할과 사회단체와의 연대(지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분사의 설립을 통한 형평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서술한 교과서는 단 1종밖에 없었고, 그나마 학습자로 하여금 오개념을 형성할 수 있는 약간의 실수도 있었다. 형평운동이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내부의 이념 갈등이나 파벌싸움도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외면하고 있었다. 형평운동의 발생-성장-쇠퇴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울파와 진주파의 갈등, 형평사 해소론, 형평청년 전위동맹 사건 등을 다룰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형평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당시 일반인들의 반응으로 반형평 운동을 소개하는 것은 좋았지만, 백정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바탕으로 형평사를 공격했던 움직임을 ‘운동’이라는 용어를 붙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신 반 형평사건이나 형평운동 반대활동이라는 용어 사용을 제안한다.

형평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나 집단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형평운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주제의 하나다. 대부분의 교과서에는 백정들이 주도한 운동으로 서술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백정 출신 중에서도 이학찬이라는 이름을 언급한 교과서가 유일하다. 그러나 형평운동이 전개되던 전 시기에 걸쳐 활동한 비백정 출신의 강상호, 백정 출신의 장지필이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형평운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 내지 사회운동이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항일 민족 운동으로 서술한 교과서는 3종에 그쳤다. 형평운동이 다른 사회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당대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고, 고려혁명당 사건에도 형평 지도자가 깊이 연루되었으며, 형평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제 식민통치에 맞설 수밖에 없었던 점에서 항일 민족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적극 반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형평운동이 한국사 교과서 속에서 어떤 단원에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의 문제는 형평운동이 일제 강점기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다. 2015 교육과정에 의하면, 형평운동은 대주제 일제 식민지 지배와 민족 운동의 전개, 소주제 사회・문화의 변동과 사회 운동 속에 편성되어 있다. 일부 교과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과서가 2015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에서 제시하는 지침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다만, 형평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자유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등 근대 사상의 확산과 관련지어 서술하라는 교육과정-성취기준-집필기준을 충실히 반영한 교과서는 2종 뿐이었다. 그런데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과서의 제작을 위해 집필기준을 적정화하고 최소화한다는 원칙에 비추어 보면, 교육과정-성취기준-집필기준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2015 교과서는 근현대의 비중이 77%로 2009 교과서에 비해 약 22%가 늘었지만, 전체 분량이 줄어들면서 형평운동의 서술 비중은 오히려 약간 낮아졌다. 역사교육에서 중요도의 문제는 내용 선정 뿐만 아니라 역사교육의 목적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형평운동이 단순한 사회운동을 넘어 한국 최초의 인권 운동으로서의 위상을 갖는다고 볼 때, 형평운동이 갖는 의미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교과서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역사책이기 때문에 학습자의 활동을 돕는 다양한 보조코너와 자료(이미지, 사료)들이 있다. 탐구활동의 경우, 교과서마다 편차가 있었는데 단순한 암기보다는 역사과 핵심역량을 기르는 활동이나 역사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 문항 제시가 요구된다. 형평운동 관련 자료로 형평사 주지와 포스터가 대표적이다. 형평사 주지라는 단어가 생소한 탓인지 다양한 용어로 번역하여 사용하였는데, 통일성도 없고 오히려 혼란을 야기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형평사 주지문도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명백한 오역도 있었다. 포스터의 경우에도 다양한 캡션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표기 원칙도 없고 용어의 통일성도 없었다. 어설프게 풀어쓰기가 곤란하다면 원문대로 표기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