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겨울 광주 자주연수 후기
/ 이재호(서울 개운중학교)
당신이 세상과 싸움을 하고 있다면,
세상의 편에 서라
-카프카-
세상의 편에서라. 세상과 당신이 싸움을 한다면 세상의 편에서라. 이 말 참 묘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무서운 말처럼 들렸다. 당신의 지향을 버리고 세상이 바라는 삶에 길들여지란 말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그것이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라는 유혹 말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결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 테다. 그 의미는 아마도 세상 속에 있는 함께 싸우는 이에게 손을 내밀라는 것이며, 자신의 상처와 두려움, 공포와 이미 나약해져 버린 모든 것을 보호하기 위해 닫아버린 문을 열라는 것이었으리라.
광주에 대한 첫 기억은 푸른 눈의 목격자를 통해서였다. 내가 이 영상을 보면서 카프카의 말을 떠올렸던 것은 광주에 대한 남다른 감회 때문이다. 내가 광주를 들렀을 때, 나는 언제나 세상에 상처받고 지쳐 바닥을 치고 난 후 또 다시 세상의 편에 서기 위해 수줍은 발걸음을 내밀었던 시기였고, 그때 광주의 품은 마치 지독한 사랑 뒤에 새롭게 다가온 사랑처럼 강렬하며 따듯한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광주에 그렇게 손을 내밀었고, 광주의 기억과 마주하게 되었다.
80년 5월 15일 서울역에는 10만 명의 학생들이 민주화의 구호를 외치며, 서울의 봄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생일대의 판단착오―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와 판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다―를 하고야 만다. 그들은 군부개입의 막연한 두려움으로 청와대로 향하지 않은 채 자진해산한다. 그리고 다음날 광주에서는 6.25때에도 경험하지 못했던, 처절한 살육과 공포가 엄습한다. 속전속결의 군사작전은 작전명 '화려한 휴가'처럼 짧고 경쾌하게 끝이 나고, 모든 유흥의 전말은 은폐된 채 세상은 다시 평정을 찾는다.(이번 연수에서 알 수 있었던 사실은 실제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가 아니었다. 실제 공수부대가 투입된 5월 27일 작전명은 ‘상무충정작전’이라고 한다.)
그 후 세상은 고요했고 모든 것은 망각된다. 누군가가 이야기 했던 '학살의 망각 또한 학살'이라는 표현처럼 광주는 80년대 내내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한국 내에서만 그러했다.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패터'는 한국의 공포정치에 대하여 세상을 향해 폭로했고, 세계의 민심은 요동쳤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만은 고요했다.
이 모든 불행이 치열한 광주인의 투쟁을 통해 틈사이로 흘러나올 때 쯤, 모든 불행은 만신창이가 돼있었고, 분노를 넘어 절망을 향하고 있었고, 곧 망각될 위기에 있었다. 그러나 침묵하지 않았던 목격자들, 세상이란 바깥에서 '나'에게 손을 내밀던 그들은 결국 광주를 세상 바깥으로, 또한 서울역 회군 후 자괴감과 두려움으로 자아의 감옥으로 숨어든 '그들을' 세상의 바깥으로 끌어냈다.
치열하게 세상의 편에서 그들은 싸웠고, 한국 민주화의 꽃이 되었다. 그들의 부채의식은 여전히 민주화의 열정으로 승화되길 원하고 있으며, 또한 수많은 목격자들의 시선 속에서 자신과 싸우고 있다.
나는 서울역 회군을 기억하지 못한다. 또한 광주의 참혹상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20살이 될 때 까지, 이처럼 참혹한 사건이 한국이라는 땅에서 벌어졌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또한 관심조차 없었다.
내가 만난 그 시대를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의 부채의식은 가늠하기조차 힘들며, 그들의 상처 또한 섣불리 연민할 수 없을 만큼 내겐 헤아림이 적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의 열망과 그들의 숭고를 목격하고 있고, 그들이 살아온 길을 앞선 목격자에 의해 전해 듣고 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망각해 버린다. 기억 또한 그렇다. 누군가가 끊임없이 헤아려 주지 않는다면, 많은 것은 그렇게 되고 만다. 광주 또한 망각되고, 기억에서 삭제된 채 저 홀로 사라질 뻔했다. ‘목격자’ 그들이 끊임없이 저 광막한 힘에 저항하지 않았다면, 또한 그들이 끝까지 살아남지 않았다면, 진실은 불행하게도 저 홀로 사라지고, 흔적조차 없었던 것처럼 되고 말았을 것이다.
첫날 답사는 이처럼 고독과 싸운 광주의 흔적을 찾아 새로운 목격자가 되는 일부터였다. 폐허가 되어버린 보안사 건물, 지하에서 있었던 그날의 만행을 목격했다. 그날의 흔적이 숲으로 뒤덮인 채 폐허 그 자체로 남아 있는 지하 취조실의 음습함은 가공되지 않은 그날의 횡포와 권력의 추악함이 온몸의 감각으로 스며들며 각인되었다. 우리는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최대의 악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저녁 해가 질 무렵 영창을 살펴보았다. 왜 그들은 젊은 청년들을 영창으로 데려갔을까? 그것은 모든 질문의 열쇠였다. 그들은 자국 시민을 향해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것은 권력에 의한 무차별적인 토벌이었고, 학살이었으며, 제노사이드와 유사한 살해행위였다. 그 어떤 정당성도 존재하지 않는 가장 포악한 권력의 가장 추악한 만행이었다.
영창에서 그날의 목소리를 들었다. 1980년 봄 광주, 고등학생이었던 두 소년의 기억은 너무도 생생했다. 그날의 풍경과 아픔을 드라마틱하게 전달하면서도, 그날 홀로 살아남았다는 마음의 짐도 스며있었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그날을 회고하는 두 소년은 그 짐이 있었기에 윤상원이 했던 그 말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리라.
"너희 들은 반드시 살아남아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한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 이 싸움의 모든 기억을 세상을 향해 소리쳐야 한다." 그 어린 두 소년은 역사교사가 되었고, 그들이 살아남았기에 광주는 살아남았다.
역사가는 때때로 냉철한 목격자이어야 한다. 세상의 일에 처절하게 싸우다 함께 죽지 못하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마음의 빚마저 참아내며, 어찌되었건 살아남아 그 모든 불의를 목격하고 기록해야 하며, 반드시 진실이 저 홀로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중년의 멋스런 역사교사가 된 그날의 두 소년은 살아남아 광주가 저 홀로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었다.
밤이 되어 우리는 광주 그날의 영상을 보았다. 그날의 생경한 모습은 모두를 숙연하게 했다. 우리는 또 한 명의 목격자가 되었다. 그리고 광주와 손 맞잡은 ‘우리’가 되어 세상의 편이 되었다.
밤이 깊어 갈 때 쯤, 역사교사모임의 백미인 참가자 소개가 시작되었다. 각 지역의 역사교사들이 광주라는 상징 속에 자신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5.18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 광주의 고독한 싸움을 지켜주지 못했던 부채감 속에 젊음을 보내었던 세대, 그리고 광주의 그날과 민주정신을 있는 그대로 교과서를 통해 배울 수 있었던 세대, 광주의 정신을 특정 시대정신에 가두지 말고 새로운 민주정신으로 용해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세대, 그리고 광주정신에 대한 심리적 치열함이 생경한 세대, 또는 동학이나 4.19와 같은 역사적 사건의 하나로서 심리적 거리감을 가진 세대, 너무도 다양한 5.18에 대한 이해들이 소통되었다. 나는 너무도 훌륭한 공론의 장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유쾌하고 개성 넘치는 자기소개 속에 광주라는 매개로 전달되었던 우리가 함께 한 이야기는 광주에 대한 이해의 역사였고, 우리가 만들 새로운 역사에 대한 방향추이기도 했다.
벗이여,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황금빛 생명의 나무는 푸르도다
- 괴테 파우스트 중 -
우리는 괴테를 사랑한다. 괴테의 가장 아름다운 말 중 하나가 이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이 말의 출원이 메피스토펠리스의 말이라는 것이다. 절대지에 대한 파우스트의 갈망을 지식의 젖가슴에 대한 인간의 유아적 탐닉으로 전락시킨 일갈. 그럼에도 우리가 이 말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현실에 뿌리박은 사고를 하라는 것일 테다.
둘째 날, 우리는 꿈에 대한 답사를 진행했다. 답사는 꿈을 꾸었으나 이루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민중의 여망이 모여 새로운 시대를 꿈꾸었던 모든 이의 상징이 되었던 공간 운주사,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가장 이상적인 나라로 설계하려 했던 젊은 개혁가 조광조.
이른 아침을 먹고 운주사로 향했다. 운주사는 낯선 곳이었다. 투박하고 비대칭적이며, 잡다한 것들 투성이였다. 마치 난장(亂場)위에 선 가람처럼 보였다.(대칭적이고 세련되며, 계획적인 것은 오직 답사책자의 줄기를 따라 그대로 이어지는 답사 설명뿐이었다.) 난장 그래 운주사는 난장이었다. 난장은 민중이 모이는 곳이다. 민중이 모여 자신의 목소리를 소통하는 곳이기도 하다. 정치한 이론도 없으며, 세련된 문법도 없는, 욕망천지인 난장은 민중의 가장 내밀한 생활을 보여주는 곳이며, 그들이 요구하는 세상, 아니 그들이 극복하고 싶은 세상의 모습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운주사는 그러한 파편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가람에 트인 길을 따라 우리는 답사를 진행했다. 다양한 양식의 탑과 불상은 민중들이 꿈꾸는 세상의 파편들처럼 보였다. 그 파편들을 따라 정점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와불을 목격하게 되었다. 와불은 민중의 파편들이 하나의 공(共)으로 쏘아 올려 졌을 때, 세상에 응해 일어선다는 전설이 있는 상징물이다. 그 이야기의 기원에 대한 설은 다양했다. 고려시대 도선으로 소급되는 설부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장길산, 그 이야기가 회자되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는 설까지 다양한 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와불은 입인상(立人像)을 목적으로 계획되었을 것이지만, 그것이 와불로 존재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더 많은 상징성을 부여받고, 작동하게 되었다. 와불을 지켜보며 그가 일어서기를 바랐던 사람들의 삶이 떠올랐다. 그 삶의 여망들이 하나의 꿈이 될 때, 난장의 목소리가 공명하여 공으로 쏘아 올려 졌을 때, 바로 그때 일어났던 그 간단하지 않은 민중의 꿈과 꿈을 이루기 위한 저항을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핏기 없이 그들의 삶을 역사교사로서 다루었던가? 조선 후기 나의 수업은 모두 회색빛이었을지도.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운주사를 떠나며 수업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조광조를 만나러 갔다. 그는 황금빛 생명의 나무 하나하나를 보지 못한 회색빛의 이론가였을 뿐일까? 조광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질문을 품으며 그의 흔적을 살폈다. 한 시대를 책임지고자 했던 젊은이, 그에게는 난장의 파편들이 쏘아올린 공을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권력을 가진 자의 꿈, 그 꿈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조광조는 황금빛 생명의 나무가 가진 푸름을 알고 있었다. 그가 품었던 꿈은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서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만 선비와 사대부의 삶에 제한되지 않았다. 왕에서부터 시정의 잡배까지 그들이 지닌 덕성을 최대한 펼 수 있는 세상, 그리고 그러한 세상의 실현을 위해 서로에게 규율되었던 도덕, 그것의 기반 위에 가장 공정한 질서가 확립된 체계를 조광조는 꿈꾸고 있었다. 그가 시도했던 모든 개혁은 그래서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고, 현실의 벽 앞에 좌초되었지만, 그의 꿈은 조선의 꿈이 되어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이 되었다.
조광조의 꿈을 목격하고, 우리는 그 옆 아늑한 까페에서 나른한 오후의 여유를 즐겼다. 여유를 풍성하게 하는 조광조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우리는 조광조의 꿈이 실패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조광조 또한 지식의 젖가슴에 대한 인간의 유아적 탐닉을 즐긴 회색 빛 이론가 중 한 명 정도로 치부하고 있진 않았을까? 우리는 조광조가 꾼 꿈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관심을 보였을까? 그가 바라본 황금빛 생명의 나무의 푸름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을까? 조선이라는 나라, 조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젊은 지식인의 고민에 대해 우리는 너무도 염치없이 짧은 몇 줄로 다루었던 것은 아닐까? 많은 고민을 품게 한 까페의 망중한이었다.
광주로 돌아와 우리는 진정한 난장에 모였다. 역사교사의 밤, 전남지역 선생님들이 준비한 홍어와 서대회 그에 안성맞춤인 막걸리, 모든 것이 완비된 밤이었다. 우리는 흥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난장판이었다. 흥에 따라 흐르는 밤, 역사교사로서의 묵중한 부담감을 내려놓고, 난장에 모인 민초의 흥으로 어울러졌다. 노래는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각자의 젊은 시절이 풍겨나는 선곡, 함께 부르며 공명하는 형언할 수 없는 일체감, 그리고 각자의 개성이 짓게 묻어나는 흥의 향연, 무엇보다 남도의 아리랑과 남도의 흥이 이 공간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역시 광주는 광주였다. 내일은 잊으리, 그렇게 밤은 흘렀다.
정의와 진실은 현실 속에서 끝없이 패배한다.
다만 긴 역사 속에서 승리할 뿐이다.
-조정래-
나는 조정래의 이 글이 참 맘에 든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패배를 목격해야 했고, 또한 살아남았던 목격자가 있어야만 했다. 때때로 역사가는 이러한 목격자가 된다. 아니 되어야한다. 나는 지금 역사를 공부하고 있고, 역사교사이기도 하다. 나 또한 목격자가 되어야 할지도.
오늘은 광주를 답사했다. 5.18 그날의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답사 내내 품고 있는 질문이었다. 내가 내린 답 중 분명한 것은 나 또한 목격자가 돼야 한다는 것. 물론 그 목격은 시대마다 달라질 것이다. 또한 어떤 목격인가가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그 ‘어떤’이란 것 또한 매우 중요 할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패배의 잔흔을 목격하며 왔다. 정의는 쉽게 승리하지 못했고, 승리하지 못하는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일상의 평화를 잃어갔다.
광주의 답사는 정의와 진실이 현실 속에서 끝없이 패배했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일상의 평화를 잃어갔는지 직면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접근할 수 없었던 곳을 목격할 수 있어 더 뜻깊은 시간이기도 했다. 도청과 기록관에서 공간이 주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80년 광주, 그곳에서 불안과 공포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벗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그들은 결국 패배했다. 그 패배의 깊은 아픔이 그곳에서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정의와 진실은 현실 속에서 끝없이 패배한다. 다만 긴 역사 속에서 승리할 뿐이다. 조정래의 바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실패를 목격한 사람들의 기억과 정의와 진실을 바라는 사람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그것이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목격한다. 하지만 그것은 잠언이나 교과서의 핏기 없는 몇 줄의 서술처럼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치열한 기억과 목격의 연이은 역사가 이어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답사의 첫 글귀를 세상의 편에 서라고 인용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남도의 맛을 즐기고 망월동 5.18 묘역으로 갔다. 가는 길에 잔잔하고 담담한 설명이 이어졌다. 80년에 광주에서 태어난 선생님의 설명은 담담하고 담백했다. 광주에 대한 부채도, 시대에 대한 과열된 분노도, 사건에 대한 심리적 격정도 없었다. 그저 마음에서 이는 그 느낌 그대로, 담담하게 그날을 기억하고자 했다. 그리고 전형적인 광주에 대한 태도들에 대해 의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다. 내가 느끼는 광주와 세상이 느껴야 한다고 하는 광주의 이질감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에서, 내가 목격하는 것은 무엇이며, 내가 꿈꾸는 파편들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진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어떤’ 목격자가 되어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한 내게 큰 공감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우리가 발 돋은 토대에서 광주의 기억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광주는 아직 승리하지 않았다. 오늘도 광주는 현실 속에서 수없이 패배하고 있다. 그러나 광주는 긴 역사 속에서 승리할 것이다. 그 승리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 시대에서 광주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답사는 그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큰 화두를 품고 끝이 났다.
광주, 역시 광주는 광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