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문제,
한국사에서 어떻게 가르칠까(1/2)

수업이야기 >> ‘초협력교실’-교사와 연구자가 함께 기획한 수업이야기

≫ 이건주(경기 의정부고등학교), 염운옥(경희대학교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①화(겨울호) – 기획과 고민 그리고 협력 : 블랙페이스 논란을 수업에서 녹여내다

②화(봄호) - 수업 이후의 과제 : 지금, 여기의 과제를 떠올리며 인종차별 문제를 성찰하다


편집자주] 이번 겨울호 <초협력교실>에서는 블랙페이스 논란 이후 의정부고등학교 선생님들의 수업 기록을 담았습니다. 역사교육에서는 지난 가을호에 <특집 – 2020 블랙페이스 논란에 대한 역사교사 집담회>(이하 <집담회>)를 게재한 바 있습니다. 이후 인종차별 이슈를 역사교과에서 구현할 필요를 절감하고 의정부고등학교에서 역사교과를 담당하시는 맹수용, 이건주 선생님 그리고 <낙인찍힌 몸>의 저자 염운옥 선생님과 한국사 수업 및 역사 전문교과 수업을 기획하였습니다. 이번 겨울호에서는 이건주 선생님의 한국사 수업 기록 및 맹수용 선생님의 고등학교 전문교과 수업 사례 ‘세계문제와 미래사회’(219쪽 참조) 기록을 담을 예정이며, 2021 봄호에 한국사 수업과 역사 전문교과 수업에 대한 맹수용 선생님의 수업 성찰 기록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COVID-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교육의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교육과 만남의 순간은 분명 움트고 있었습니다. 가을호 <집담회>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자 노력하셨을 선생님들께 이 수업의 기록이 또 다른 희망의 기록으로 읽힐 수 있기를, 그리고 2021년 봄에 새로운 교육의 희망을 이을 수 있는 싹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긁어 부스럼’이 될 수 있는 순간에 교육적 여지를 위해 기꺼이 용기를 내어 주셨던 두 분 선생님과 염운옥 선생님께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1. 나에게 수업이란? - 수업준비가 제일 무서워요.


올해로 6년째,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일상은 나에게 항상 즐거운 순간이었다. 초임 때에는 그저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좋았다. 그냥 내가 누군가의 담임 선생님이라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책임감도 느껴지는 동시에 그냥 아이들과 추억을 쌓아간다는 그 자체가 좋았다. 1정 연수를 받고 난 이후 4~5년차에 접어들었을 때엔 내가 하고 싶은 교육활동을 학교에서 스스로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이끌고 행사를 기획하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활동들을 하나, 둘씩 실행해보면서 만족감을 느끼곤 했다. 정말 말 그대로 충실한 자기만족의 삶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자기만족하면서 살아가는 내 자신이 좋다.

하지만 수업이라는 부분만 딱 떼어놓고 나를 바라봤을 때, 나는 과연 어떤 선생님일까? 학생들이 남긴 교원평가를 곱씹어봤다. 대체적으로 재미있다는 평가였다.(재작년쯤에 ‘좌익교사’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단어를 듣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실 재미있다는 평가는 그닥 유쾌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냥 내가 재미있는 것인지 내 수업이 재미있는 것인지, 내 수업에서 아이들은 어떠한 의미를 찾아간 것인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난 무언가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는데 그러진 못한 것 같다고 느껴진다.

수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생각해 볼 만한 의미를 잔뜩 주고 싶지만 사실 나는 수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수업준비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수업준비가 재미있다는 훌륭한 선생님들을 보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수업사례를 발표하는 것도, 잘된 사례의 발표를 듣는 것도 나에게 자괴감을 주었다. 사실 난 수업을 잘하지 못 한다고 인정하며 또 자책하곤 했다.

어느 순간, 수업을 제대로 못하는 나는 선생님이긴 했는데 역사 선생님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다시 고민해봤다. 내가 역사를 참 좋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의 문제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힘이 역사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러한 역사 수업을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의 수업은 바뀔 수 있을까? 그래서 올해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들어온 <초협력교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 수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 어떤 수업을 해야 할까?


1) 지금, 이 순간의 역사를 마주하다 – 의정부 고등학교 ‘블랙페이스’ 사태.

내가 근무하고 있는 의정부고등학교는 내 모교이자 지금은 전국적으로 창의적인 졸업앨범으로 유명한 학교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다른 내용으로 이슈가 되었다. 미국의 흑인 인권문제로 세계가 민감한 이 때, 의정부 고등학교의 졸업앨범에서 서양에서는 흑인차별로 금기시하는 ‘블랙페이스’ 분장을 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이 사진에 샘 오취리라는 방송인이 불편함을 언급하면서 사회적으로 공론화 되었다.

언론에서는 학생들의 졸업앨범과 샘 오취리의 불편함을 여과 없이 보도하였다. 대중들은 분노했고(학생들을 향한 분노보단, 무분별한 기사에 의한, 아직은 인권감수성이 부족한 사회에서 샘 오취리를 향한 분노였다.) 학교도 학생들도 모두 난리였다. 이 과정에서 오취리는 대중들에게 비난받았고, 학생들은 의도가 없었다는 이유로 면죄부 아닌 면죄부를 받았으며 우리 교사들은 이것을 보고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고 안도했다.

불편하다. 면죄부 아닌 면죄부를 받은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모습도 불편하고, 비난받은 오취리를 바라보는 것도 불편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교사들(그 속엔 나도 있다)을 보며 불편하다. 아니 불쾌하다. 그 과정에서 친구 동료교사의 차별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수업 제안은 나에게 큰 과제이자 해야만 하는 사명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떤 마음일까? 내가 가진 내 마음과 고민을 통해 질문을 던져본다.


2) 내게 던지는 질문들

사실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인종차별문제만으로 흑인 인권문제를 지금 현시점에서 꼭 집어서 수업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서의 인종차별문제를 수업하는 것은 학교 당사자로서(이 감정은 어찌되었든 학생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해야만 하는 현실에서 오는 감정도 포함되어 있다)도 불편하고, 시기에 맞춰서 마치 내가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누군가의 묵언적 강요에 의해 계기 수업을 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하지만 수업에서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 생각도 전혀 없었다. 어떻게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조금은 부드럽게 수업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다루면 어떨까? 라는 고민에 빠졌다.

이번 일련의 사태를 보며 대한민국 사회와 우리 학생들이 가지는 인권에 관한 감수성이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대화를 해보면 우리 아이들(남고의 특수성도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함)이 너무나 경쟁을 당연시하고 차별과 혐오에 대한 발언을 일상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차별과 혐오에 대해 많이 무감각하다는 점은 분명했다. 따라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의 중요성을 알리고 경쟁이 당연시되고 이로 인한 차별과 혐오의 키워드가 계속되는 것의 위험성을 재고하는 수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으로 다시 수업을 기획하다보니 나는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선 아이들이 이 문제를 좀 더 보편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본질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문제의식(차별과 관련한 한국사 수업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나서 우리가 수업할 부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실 현대사와 관련 짓고 싶었으나 1학기 때 이미 현대사 수업을 마친 상황이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차별이라는 주제와 수업을 연관 지으며 주제를 둘로 좁혀 보았다.

하나는 전근대사에서 있었던 차별사례에 대한 수업, 둘째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겪던 차별문제에 대한 수업이었다. 고민의 끝에 후자의 고민이 조금 더 우리가 지금 고민해야 할 부분과 맥락이 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보편적으로 차별이 행해졌던 당시의 상황을 오늘날에 현실에서 다시 한번 고민해보고 싶었다.


3) 다시 수업으로

잠시 펼쳐두었던 넋두리를 접고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요즘 내가 가장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오늘날 능력지상주의에 입각하여 경쟁이 최우선 되는 우리 아이들의 현실, 그 속에서 발견되는 차별과 혐오의 일상화였다. 이런 고민으로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니 당시의 상황 속에서 오늘날 현실과 유사한 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식민지배의 과정에서 전 세계에 제국주의의 광풍이 불었다. 제국주의의 지배자들은 사회진화론으로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며,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을 당연시했고, 인종주의와 우생학 등의 다양한 학문적 기반으로 차별과 혐오를 일상화했다. 이 시기의 이러한 점들을 배우고 오늘날과 비교해봄으로써 오늘날 우리 일상 속 차별과 혐오에 대한 성찰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고민을 담아 수업을 구상해보았다.

먼저 수업은 총 3차시로 구성할 계획이었다. 그 중 1차시에선 ‘제국주의의 확산과 제국주의의 지배논리’라는 주제로 일제가 우리를 식민 지배하는 과정에서 세계의 다양한 나라들이 사용했던 사회진화론, 인종주의, 우생학과 같은 그들의 지배논리를 수업할 계획이었다. 또한 이를 받아들인 동양의 입장을 공부하고, 지배논리가 가지는 모순점을 파악해보고자 했다.

2차시에선 사회진화론에 집중하여 ‘사회진화론과 같은 식민지배논리를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라는 주제로 수업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당시 다양한 관점에서 수용되었던 사회진화론의 과정을 비교하는 동시에 비판적 입장을 고민해보며 사회진화론을 당대적 관점에서 주목해보고자 했다.

3차시에선 오늘날 현실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했다. ‘우리 일상에서의 차별과 혐오’라는 주제로 과거 당시의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의 관점에서의 다양한 사례를 바탕으로 오늘날 일상에서 우리가 무심결에 사용하고 있는 차별과 혐오의 발언에 주목하여 이를 반성하고 성찰해보는 수업을 계획하고 싶었다. 이를 통해 적어도 ‘우리 아이들이 무심결에 사용하는 차별과 혐오에 대해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진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져보며 수업을 기획하였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생각을 차별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주신 염운옥 선생님께 아래의 계획안과 질문들을 함께 보내드렸다.


1.jpg <참고자료 1> ‘제국주의의 지배논리 – 차별과 혐오의 일상화’ 수업 계획안



3. 연구자와의 소통과 대화 – ‘염운옥’ 선생님과의 수업 기획


위와 같은 수업계획안과 몇 가지 질문에 대해 염운옥 선생님께서 친절하게 답해주셨다. 특히 수업 계획안에 대한 조언을 깊이 있게 해주셨는데 다음의 답변들을 받고 좀 더 세부적으로 나의 수업을 다듬을 수 있었다. 특히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여러 고민들을 터놓고 이야기해볼 수 있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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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JPG <참고자료 2. 수업계획안에 대한 연구자의 조언>



<참고자료 3. 추가 질문에 대한 연구자의 답변>


1) 오늘날에도 발생하는 다양한 차별(특히 인종차별)과 관련하여 사회진화론적인 관점이 남아있는 부분은 없을까요?<지금까지 남아있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사회진화론의 잔재는요?>

--> 사회진화론의 잔재는 오늘날에도 발전론이라는 형태로 당연히 남아 있습니다. 다양성을 중시하는 다원주의적 사고,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관계론적 사고가 많이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시간적 계기에 따라 단순한 사회에서 복잡한 사회로, 야만에서 문명으로 발전해왔다는 서사에서 우리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사회진화론적 사고에 갇히면, 동시대 같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양한 인간집단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 우열의 판단을 끊임없이 내리게 됩니다. “한국의 60년대를 보는 것 같다”, “아마존 원주민의 원시적 삶” 이런 표현들이 바로 진화론적 사고방식의 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지금, 여기’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공존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공통성의 인식을 방해합니다. 진화론적 사고방식에서는 정교화, 전문화, 복잡화되는 것이 진보로 여겨집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화론적 사고는 발전론으로 나타나는데, 발전론을 부정하기는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비판의 입장에 서지 않는다면 진화론적 사고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장 강력한 인종차별인 흑인차별과 관련해서는 아프리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문제적입니다. 아프리카는 여전히 역사 없는 어두운 대륙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 보다도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우리에게 떠오르는 아프리카의 첫 이미지는 대자연과 빈곤 같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아프리카의 일부일 뿐입니다. 아프리카는 구대륙으로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노예무역과 식민지 지배를 겪으면서 아프리카의 경제와 사회는 서구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 얽히게 되었고, 서구의 이해관계에 맞춰 개발되었습니다. 오늘날 아프리카 55개국의 반듯반듯한 국경선과 종족 갈등은 식민지배의 직접적 결과입니다.


- 만일 남아있다면,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온 보편적인 현상의 연속일까요? 19세기 이후 만들어진 잔재일까요?

--> 기원을 따지면 근대 이전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인종주의나 사회진화론이 분명하게 모양을 갖춘 것은 역시 19세기 이후이고, 그런 의미에서 근현대 역사를 관통하는 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과거에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인종차별(서양인의 사회진화론과 오리엔탈리즘을 포함)은 오늘날의 흑인 인종차별 문제들에서 어떤 부분에서 달랐을까요?

--> 오늘날의 흑인 인종차별은 좀 더 교묘해 졌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제는 적어도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든가, 흑인을 노예로 부려도 된다든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 정의라든가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인종주의자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제국주의 시대와 식민 지배를 거치고, 홀로코스트와 탈식민화 역사를 지나온 인류에게 인종차별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하나의 교훈으로 남게 된 것이죠. 유엔 인권선언 같은 것이 이런 경험을 압축적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특히 미국에서 흑인은 인종적으로 뿐만 아니라 계급적으로 억압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제도화된 인종주의(institutional racism)’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종차별이 개인의 일탈행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제도 전반에 구조적으로 기입되어 상존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하고 흑인들은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에 취약합니다. 미국에서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많이 희생된 사람들은 아프리칸-아메리칸과 히스패닉입니다. 몇몇 주에서 코로나19 사망자 가운데 아프리칸-아메리칸의 비율은 70%에 달하기도 합니다. 즉, 오늘날 흑인 인종차별은 피부색에 계급문제가 더해져 발생하고 있습니다.


3) 계급사회가 형성된 이후 차별을 옹호하기 위해 신분제도와 같은 제도와 이를 뒷받침하는 사상(조선을 예시로 하면 성리학)이 지속되어 왔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차별적 요소들이 오늘날 이러는 차별 문제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할 수 있을까요? 있다면 어떤 연관을 가질 수 있을지요.

--> 신분제는 잘 아시다시피 근대 주권 국가에서는 일단 부정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자유, 평등, 우애)은 이런 이념을 잘 말해줍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선언의 차원이죠. 현실에서 특히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와 금융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면서, 사회계급 혹은 사회계층인 ‘신분화’ 되어 간다는 분석을 많이 합니다. 계급이나 계층과 신분의 결정적 차이는 세습 여부입니다.

오늘날 사회적 자원을 많이 가진 부모들이 자식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교육에 투자하고 특권을 이용하고. 그 결과 계급이 세습되는 현상, 즉 재(再)신분화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측에서는 사회적 상향 이동의 사다리가 막혀 버린 절망에 빠지게 되고, 절망감을 자신보다 약자에게 퍼붓게 됩니다. 모두의 절망이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으로 모아지면 좋겠지만, 강자에게 저항하기는 어렵고 약자 혐오는 손쉽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상승의 욕망이 좌절되고 하강의 불안만이 남았을 때, 더 아래로 추락하지 않으려는 절박함이 혐오로 표출되는 것이죠. 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좌절과 절망이 ‘상대적’이라는 점입니다. 소위 ‘멀쩡한’ 젊은이들이 일베 같은 공간에 혐오를 쏟아내는 현상은 상대적 박탈감과 능력 만능주의(meritocracy)가 결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능력 만능주의가 무서운 것은 능력에 따른 대우를 정당하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여기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같은 말이 능력만능주의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능력을 과연 입시 성적, 입사 시험 합격 같은 몇 가지 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요? 잠재된 역량이 학창시절 일찍 꽃피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뒤늦게 찾아오는 학생도 있습니다. 능력 만능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한 사람의 역량이 발휘되기까지 때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질문도 남습니다. 능력이란 무엇일까요? 경제적 사회적 성공은 능력을 증명해 줄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성찰 없이 능력에 따른 대우가 그 자체로 공정하다고 믿어 버리게 되면, 능력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은 그에 합당한 대우(즉, 무시, 멸시, 나아가 혐오)를 당해도 할 수 없다고 여겨지고, 그런 대우는 공정함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지역 혐오, 이주민 혐오, 난민 혐오, 여성 혐오, 계급 혐오 등 온갖 혐오의 밑바닥에는 이런 감정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4) 일제강점기 후반 1930년대에 들어서면 전시체제의 강화로 인해 내선일체를 강화하며 조선인과 일본인의 하나를 내세웠는데, 그럼에도 민족적 차별이 존재 했었나요? 조선 대중들이 삶에서 겪는 차별은 일본 대중과는 분명 달랐을까요?

--> 민족적 차별이 당연히 존재했습니다. 내선일체는 그야말로 명분일 뿐이었습니다. 우선 내선일체를 진정으로 하려면 선거권을 부여해야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하지만 참정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 즉 내선결혼도 장려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예외적으로, 조선 왕실과 일본 왕실 간의 내선결혼이 식민통치를 위한 프로파간다로 추진되었습니다), 군인으로 동원하고 무기를 쥐어 주는 일도 오래 망설였다고 합니다. 식민지 청년에게 무기를 들게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전쟁에 필요한 병력 차출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5) 3차시 활동에서 학생들과 일상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혐오에 관련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할까합니다. 그 중에서도 토론의 주제질문은 ‘의도하지 않고 차별과 혐오의 표현을 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는데요.

그 사례로 우리 의정부고등학교의 이번 블랙페이스 문제를 거론하려 합니다. 그런데 학생들 사이에선 이미 언론의 보도로 인해 인식이 왜곡되어 있기도 하고, 학생들이 우리의 문제라고 방어적으로 접근할까봐 걱정이 되긴 합니다. 이에 선생님이 또 추천해 주실 사례가 있으신지 아니면 위의 우리 걱정에 대해 조금 해소할 부분을 제시해주실 수 있으실지 여쭤봅니다,


--> 도움이 될 만한 예시들을 소개해드립니다.

(미국에서 동아시아 계에게) 동아시아 계 학생들은 수학을 참 잘해! 동아시아 계는 모범적 소수민족(model minority)이고 말이야.

* 미국에서 쓰는 ‘모델 마이너리티’라는 표현은 ‘모범적 소수민족’, ‘모범적 소수자’로 번역이 될 수 있습니다. 한중일 동아시아 계 사람들에게 많이 쓰는 표현이에요. 미국 백인들은 동아시아 계가 근면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민족이라고 여깁니다. 얼핏 들으면 칭찬 같지만, 이것이야말로 ‘친절한 차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편견들은 결국은 한 그룹을 통제하기 위해서 만드는 언어적 폭력입니다. ‘수학을 잘하고 순종적’이라는 정체성 속에서 다른 정체성을 삭제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성에게)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재원입니다.

* 결혼식 주례사 같은 장면에서 흔히 듣는 말인데 왜 여성은 항상 미모와 연결되는 것일까요? 반면, 남성에게는 외모 칭찬 보다는 능력 칭찬을 하죠. 여성의 경우 칭찬이든 모욕이든 외모평이 항상 따라다닙니다. 이는 여성을 외모로 판단하고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표현입니다.


(장학생에게) 이 학생들은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줄 때, 장학금 수여식 같은 것을 열고 학생의 신상이 공개되도록 한다면, 이는 문제적입니다(실제로 이런 경우가 있었고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때, 온정주의적 개입이 되지 않으려면, 세심한 배려의 윤리가 필요합니다. 서양 속담에 “자선(慈善)처럼 차가운 것이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선의에서 출발한다 해도 ‘동정’은 결코 ‘공감’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브래디 미카코의 저서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에서 저자는 아들 친구 팀에게 아들의 헌 교복을 수선해 물려줍니다. 팀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작아져 버린 교복을 그대로 입고 다녔습니다. 다른 구실로 집에 초대해 교복을 건넸지만, 팀은 “왜 나한테 주는데?”라고 반문합니다. 그 때 저자의 아들은 망설임 없이 “친구니까. 너는 내 친구니까”라고 답합니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지 태도의 윤리를 가르쳐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답변들을 바탕으로 수업안을 본격적으로 구성하였다. 수업을 구상하면서 들었던 추상적인 사회진화론과 오늘날 차별문제에 대한 고민을 실제로 수업할 수 있겠다는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해 주신 부분들이 좋았다. 우리가 수업을 할 때 역사를 소재로 오늘날의 문제에 역사적 사례를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은 아닌지 고민이 많았는데 선생님과의 질문과 답변의 과정을 통해 실제로 수업해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수업에 의미를 가지는데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 무엇보다 오늘날 교사가 마주하는 다양한 고민들이 교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수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배운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교과서적인 지식에 몰두해서 오늘날 연구 경향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나의 모습에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수업 진행 – 일제강점기와 지금 우리 곁의 차별과 혐오에 대하여


수업 계획을 세우고 3차시에 걸친 학습지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학습 자료는 교과서에 있는 다양한 자료와 활동을 기초로 연구 논문들을 활용하였다. 특히 근대 일본과 한국의 사회진화론과 아나키즘 사상의 수용을 다른 논문이나 개항기 동아시아 각국의 사회진화론의 수용과정을 다룬 논문들은 당시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논리와 당대 사람들의 입장을 잘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를 토대로 1차시의 수업에서는 동아시아 각국의 사회진화론이 수용되는 과정과 그 논리 자체의 모순점을 찾는 데 주목하였다. 특히 전 세계적인 흐름에서 사회진화론의 수용과정에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차별과 혐오가 일상화되었던 시대의 특징을 학생들과 이야기해보고자 했다. 학생들은 대체로 사회진화론의 특징을 찾는 부분에는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사회진화론이 가지고 온 결과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그 논리 안에 숨겨진 차별의 논리에 대해서는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반응이 다수 있던 것은 계획과는 조금은 다른 부분이라 특이했다.

2차시의 수업에서는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과 식민지 국가인 조선의 입장에서 사회진화론을 수용했던 4명의 인물을 뽑아 비교해보는 활동을 진행했다. 4명의 인물 모두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으나 그 과정에서 사회진화론을 추종하기도 하고 이를 비판하기도 하는 과정을 거친 인물들을 선정하였다.

제국주의 국가에서 사회진화론을 추종하였던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상황에서 사회진화론을 결국 비판했던 고토쿠 슈스이,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진화론을 추종하였던 윤치호, 같은 상황에서 사회진화론을 결국 비판한 신채호를 선정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의 사람들이 했던 고민들과, 사회진화론이 가지고 있는 맹점들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길 바라는 의도였다.

학생들은 4명씩 조를 이뤄서 서로 각기 다른 1명의 인물을 공부한 뒤 서로 모둠별로 알려주고 소개해주는 활동을 한 이후 가장 공감하는 인물과 가장 역사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사람을 뽑는 활동을 진행했다. 나는 학생들이 대체적으로 고토쿠 슈스이나 신채호의 입장에서 사회진화론을 비판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굉장히 많은 학생들이 윤치호에 공감했다. 사회진화론의 수용이 당시의 입장에서는 매우 그럴 듯하고, 약한 국가의 입장에서 힘을 키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주된 논리였다.

물론 이 이후에 각 인물들의 삶을 다시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 윤치호라는 인물의 선택이 결국 친일파의 논리로 매몰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설명해주었고 이를 들은 학생들이 다른 생각을 가지기는 했지만 교사의 입장에서 윤치호의 논리가 그의 삶과는 무방하게 학생들에게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이러한 문제를 염운옥 선생님과도 함께 수업하는 동료 선생님과도 여러 번 상의했는데 왜 아이들이 윤치호를 선택했을까를 고민해보았다.(참고자료 5 참조.)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무한한 경쟁 사회와 입시체제 속에서의 생존은 그들에겐 어쩌면 당연한 본능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기분을 남겼다.

마지막 3차시 수업에선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서 남아있는 차별과 혐오’라는 주제를 가지고 당대에 사회진화론, 우생학, 골상학 등을 통해 차별과 혐오가 옹호되고 일상화되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과연 그로부터 자유로운 지를 가지고 수업을 계획하였다. 먼저 당대에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조선 계몽 운동가들마저도 인종적 차별을 당연하게 했던 당시의 상황을 분석해보고 이를 토대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금 하고 있는 차별적 행위에 대해서 분석해보는 활동을 진행하였다.

사실 이 부분을 계획할 때 남고라는 학교 특성상 학생들이 크게 공감을 표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학생들이 의외로 조별활동에서 공감의 의사를 표현해 준 것이 매우 인상 깊었다.(사실 매우 크게 안도했다.) 학생들은 주어진 다양한 예시에 대해 타인의 입장에서 잘 이해했고 이를 토대로 오늘날에도 있는 차별의 문제성에 대해서도 공감하였다.


**이건주 선생님께서 사용하신 활동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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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5. 추가 질문에 대한 연구자의 답변 2>


1) 사회진화론의 잔재인 발전론은 우리 일상의 능력지상주의 현상과 연관성을 가질수 있을까요?(2번 질문과도 연결하여 답변 부탁드립니다.)

--> 사회진화론과 진보주의는 오늘날 능력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능력주의는 서열을 중시합니다. 무엇이든 한 줄로 질서정연하게 줄 세우기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죠. 대학입시, 의사고시, 입사시험, 정규직 전환시험 등 어디 하나 엘리트주의에 물들지 않은 시험이 없네요. 제가 연구한 우생학은 이런 서열과 줄 세우기의 ‘끝판 왕’입니다. 일회성 시험이 아니라 인간의 총체적인 능력과 외모, 체격까지 점수 매겨서 그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고 ‘적격자’와 ‘부적격자’로 나눠 부적격자는 결혼 출산을 못하도록 하는 무서운 논리입니다. 우생학에 따라 한센병 환자, 유전성 정신질환자들은 불임수술(소위 ‘단종수술’)을 당했고, 심지어 나치는 정신장애자를 안락사하기까지 했습니다. 쓸모 없는 생명이라는 이유로 말이죠.

그런데 ‘우생학’이라고 하면 누구나 비판하지만, 그 뿌리에 있는 능력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생학처럼 극단적인 차별이 명확하게 보일 때는 비판하기 쉽지만, 능력주의처럼 사회의 지배적인 담론으로 존재할 때는 문제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요. 그래서 제안 드리고 싶어요. “능력주의, 엘리트주의가 뭐가 나빠?”라고 반문하는 학생들에게 그런 논리의 최종 도달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제시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론을 이끌어 내도록 하면 어떨까요?

2020년 12월 현재 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전 지구적 대재앙 앞에 가장 취약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다름 아닌 장애인입니다. 만일 능력주의가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된다면 장애나 질병을 가진 사람은 쉽게 능력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고 맙니다. 재난 상황은 누구를 먼저 구조할까라는 선택의 문제를 극대화합니다. 우생주의자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회복할 가능성이 큰 환자에게 경증 환자에게 병상을 내어주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생명의 우열과 경중을 따지는 것이 우생학적 선택의 핵심입니다. 생명에 가치를 따져 병상을 내어준다면 그 다음으로 ‘살 가치가 적은 생명’은 내 차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우생학을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전제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민감하게 여기는 시험, 성적, 입시 같은 문제에서 조금 벗어나 우생학의 역사, 여전히 존재하는 우생사상을 돌아보고, 여기서 현대의 능력주의와 연결되는 지점을 스스로 발견해 보도록 하는 것이죠. 우회로를 택해 학생들에게 스스로 사고해 보게 하는 것, 사회진화론과 우생학 비판이 그 우회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2차시의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사람들” 기획이 빛났습니다.


2) 일상적인 차별 논리에서 학생들이 가장 쉽게 접근하는 논리는 능력에 따른 차별(예를 들어 생물학적 차이를 차별의 논리로 옹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어떻게 비판할 수 있을까요?

--> 남녀의 생물학적 몸의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사실 대학 강의에서도 여성차별과 페미니즘은 가르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남녀 사이에 몸의 차이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죠(물론 여기에서 현대의 생물학적 성, 즉 섹스와 사회문화적 성, 즉 젠더 구분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 젠더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요. 일단 이런 논의는 너무 복잡하고 고등학생 수준에서 이해시키기 어려우니 일단 내려놓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역사 속에서 찾아보면 어떨까요?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선언했지만, 혁명 주체들이 말하는 ‘박애’는 결국 남성 형제들 사이의 ‘우애’였습니다. 혁명 대열에 함께 섰던 여성들에게는 참정권을 주지 않았죠. 프랑스 식민지의 유색인과 흑인 노예에게도 마찬가지였죠.(그래서 아이티 혁명 발생!) 그 때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는 것을 정당화한 논리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여성과 남성의 몸의 차이입니다. 여성은 출산과 양육을 하는 몸이니, 가정에 머물러 있으라는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논리에 따라 여성 참정권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흑인은 백인보다 지능이 열등하니 백인 밑에서 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공개적으로 이런 발언을 하는 경우 인종차별로 비난받게 됩니다). 학생들에게 반문하면서 수업을 이끌어 보시면 어떨까요?


능력주의 비판이라는 시급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 저도 더 깊이 고민해볼 기회로 삼겠습니다. 우선, 학생들이 쉽게 개인의 “능력”이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특권”일 수 있다는 비판으로 이끄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아래 다섯 권의 책이 도움될 것 같습니다.


1) 스티븐 J. 맥나미, 로버트 K. 밀러 주니어(김현정 옮김), 『능력주의는 허구다-21세기에 능력주의는 어떻게 오작동되고 있는가』, 사이, 2015.

2) 대니얼 마코비츠(서정아 옮김), 『엘리트 세습-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 세종서적, 2020.

3) 셰이머스 라만 칸(강예은 옮김), 『특권-명문 사립 고등학교의 새로운 엘리트 만들기』, 후마니타스, 2019.

4) 마이클 샌델(함규진 옮김),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와이즈베리, 2020.

5) 박권일 외, 『능력주의와 불평등: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믿음에 대하여』, 교육공동체벗, 2020.

또한 아래는 공정, 한국사회 능력주의 실태에 관한 심층기사들입니다.
1) 전혜원 기자, 「‘공정’은 어떻게 그들의 무기가 되었나」, 『시사인』, 2020. 9. 28.
2) 정의길 기자, 「전교 1등 ‘능력주의’는 공정한가?」, 『한겨레신문』, 2020. 9. 14.


5. 수업을 마치고 – 변화에 대한 믿음으로


사실 수업을 진행하며 염운옥 선생님과 여러 대화를 나눠보면서 차별과 혐오의 일상화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에 하나가 ‘능력지상주의’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 아이들과 대화하다보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성적은 곧 능력이고, 능력은 부정당할 수 없다.’는 결론이 반박이 불가능한 명제로 여겨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능력지상주의가 서로 간의 차별과 혐오를 인정하게 되는 기재임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 부분까지 수업을 하고 싶었지만 사회진화론 하나로 수업을 길게 끌고 가기엔 흐름상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으로 남겨두었다. 다음 수업에 대한 과제를 남긴 셈이다.

수업이 끝나고 과제가 남았다는 것은 나에겐 생소한 일이다. 사실 나에게 있어 수업을 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일도, 앞으로의 과제를 찾는 일도 한 번도 하지 않은 경험이다. 매일 하루살이처럼 수업하곤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수업 준비의 과정은 나에게 ‘성찰’의 즐거움을 알려준 좋은 계기였다. 특히 염운옥 선생님과의 여러 조언을 통한 소통은 그 과정만으로도 나에게 힐링이었다. 내가 가진 고민에 대한 위안을 받은 느낌이랄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이런 위안을 받고 나니 수업을 갈무리하며 학생들과 좀 더 깊은 생각을 나눠보고 싶은 마음에 우리 학교에서 작은 행사를 하나 열었다. 함께 수업하는 동료 역사 선생님과 염운옥 선생님의 저서 『낙인찍힌 몸』을 가지고 사제합동 독서토론을 진행하고 저자와의 대화를 진행했다. 염운옥 선생님께서도 흔쾌히 우리 학교에 직접 와주셨고 아이들과 여러 질문과 대화를 나눠주었다.

사실 그 동안 우리 학교(의정부고)에선 졸업 앨범과 관련한 어떤 교육 활동도 진행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생각도 궁금했고 한국사 수업을 통해 배운 아이들의 배움은 얼마만큼 일어났는지도 궁금했다. 책이 어려워서 다 못 읽은 친구들도 많았지만 학생들이 열심히 참가했다. 자기들이 배운 지식의 범위에서 나름의 고민을 가지고 책을 읽어냈고, 토론장에서 열띤 토론을 펼쳤다. 그리고 그 내용을 진지하게 작가에게 토론하고 질문하는 열혈 독자가 되어 있었다. 남고 아이들의 감수성은 현저히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표현하고 다녔던 나의 모습을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수업은 마무리 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사실 아직 크게 바뀌진 않았다고 본다. 아직도 교실에선 차별과 혐오의 표현을 쓰는 아이들이 있고, 교실 안 학생들 사이에선 우리학교 졸업 엘범 문제에 대해서도 둔감한 학생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라도 우리 교실 속에서 아이들에게선 작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어느 순간 나는 수업을 하면서 ‘수업으로 과연 세상이 바뀔까?’라는 고민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에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냥 수업의 의미를 찾기보단 다른 교육활동에 눈을 돌렸던 것 같다. 하지만 이때 이미 나는 불가능이라고 마음속에서 결론 내린 것은 아니었을까? 부끄러워졌다. 이미 사실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나에게 깨달음을 준 저자와의 대화에 참가한 한 학생의 참가소감이다.


작가님께는 죄송하지만 활동을 하기 전까진 '인종차별'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이상주의자들이나 하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활동을 하면서 이런 활동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 더욱 많아지고 어린 시절부터 '차별' 관련 활동에 많이 접하게 된다면 언젠가는 정말 차별이 사라지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느꼈다.


이 학생의 말처럼 나는 수업을 통해 무언가 변한다는 것은 이상주의자들이나 하는 주장이라 단정 지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정말 차별이 사라지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느낀 학생의 말처럼 수업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결국 우리의 모든 교육활동의 동력은 변화 그 자체가 아닌,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것이니까.

그동안의 핑계를 부리거나 좌절해오던 나를 반성한다. 나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열심히 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든 과정이 나에겐 너무나 고마운 순간이었다. 덧붙여 이 자리를 빌어 수업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있는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본 원고에 등장한 수업안은 전역모 홈페이지 게시판, <역사교육> 브런치 플랫폼에서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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