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 김원봉 논란

6.역사이야기 - 기고 /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특별기고 - 김원봉 논란


김원봉 논란,

투쟁이 아니라 견인을 감당해야 한다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2019년 6월, 대통령 현충일 추념사로 ‘약산 김원봉’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었다.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넘어 서훈 논란까지 이어진 이번 사안은 우리 공동체가 마주한 근현대사 인식 갈등을 있는 그대로 잘 보여준다. 역사 논쟁과 정치 공방을 어지럽게 오고 가는 이번 사안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원봉 논란’에 대해 역사 연구가인 심용환 작가가 <역사교육>에 글을 보내왔다. / 편집자 주


정치 문제인가, 역사 문제인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잠복되어 있던 논란이 정치적인 사안이 되버렸다. 영화 암살, 밀정으로 유명해진 인물 약산 김원봉. 애초에 김원봉을 둘러싼 담론은 빈약했고 신화적이었다.


“김구보다 높은, 일제 강점기 최고 현상금을 자랑했던 인물”
“단 한 번도 체포되지 않았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최고 현상금’이라는 타이틀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독립운동사를 포괄한 한국근대사의 역동성 그리고 초보 제국주의 국가에서 파시즘 군국주의 국가로 치달은 복잡다단한 일제 35년의 기간을 고려한다면 ‘현상금 액수’의 의미는 매번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만큼 대단한 독립운동가’ 정도로 서술하면 무난하겠지만 ‘최고 독립운동가’의 보증수표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체포되지 않았다’는 말 역시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단지 그간 알려지지 못했던 인물이 알려질 수 있는 좋은 수식어일 뿐이고 그 정도로 활용되면 적당한 수준인데 어느 순간부터 지나치게 남용되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업적은 인정하지만, 빨갱이였다”


반대 담론 역시 단순하고 치졸하기 짝이 없다. 기껏해봤자 인터넷 짜리시 수준으로 시작된 비판은 논란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방식이다. 일제 시대 항일 투쟁에 관해서는 인정하지만 결국 그는 북행을 선택했고 6.25전쟁 지도자로 엄청난 민족적 죄악을 저질렀다. 그런 인물을 기리는게 어떻게 타당하겠는가. 애초에 김원봉에 대한 반대 담론은 정치적 신념에 근거했기 때문에 서훈 논쟁이 터져 나왔을 때 곧장 이념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결국 김원봉을 둘러싼 논쟁은 역사적 토론과 고민의 대상이 아닌 정치적 찬반의 문제가 되었고 한 인물을 둔 평가는 이승만 논란과 유사하게 선과 악의 판단이 되어버렸다.


“김원봉,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 사용”
“문 대통령에 ‘김원봉 이념전’ 시도한 한국당, 이건 알고 있나”


오마이뉴스 등의 진보 매체를 중심으로 김원봉에 대한 적극적 옹호 기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또한 그간 <약산 김원봉 평전>을 비롯한 극히 적은 자료를 통해 단순한 이미지를 쌓아온 김원봉 지지파의 호응이 이어졌다.

“김원봉은 뼈 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당한 고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북행을 결정한 사람을 두고 토착왜구(자유한국당으로 상징되는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원색적인 표현)들이 2차 가해를 시도하고 있다”


‘빨갱이’라는 공박은 ‘민족주의자’라는 응전으로! 김원봉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기 보다는 ‘역사의 정치화’과정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사실 매번 반복되는 과정이다. 크게 논란이 된 적은 없지만 여운형을 둘러싼 갈등도 그랬고 보다 극적으로 분출된 이승만 평가 논쟁 역시 같은 방식이었다. 단지 이번에는 김원봉으로 주제가 바뀌었을 뿐.


“여운형은 해방 공간에서 이승만에게 비견 가는 저명한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그는 좌우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힘쓴 진보적 민족주의자 혹은 진보적 민주주의자이지 빨갱이가 아니었다”
“이승만은 ‘하와이안 갱스터’다. 이승만은 ‘친일파’.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


여운형을 둘러싼 논란이 비교적 담담한 언어로 정리가 가능한 것은 사회적 논란이 적었기 때문이고 이승만을 둘러싼 논쟁이 점입가경인 이유는 뉴라이트와 민족문제연구소의 대결, 즉 다큐 <백년전쟁> 논란이라던지 KBS 프로그램 <도올아인 오방간다>에 대한 조선일보의 비판 등이 이어지면서 더욱 과격화되었을 뿐이다.

참으로 소모적이고 따져보면 역사의 비역사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럴꺼면 역사를 공부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 대부분의 논란은 뉴라이트로 상징되는 정치적 보수주의 진영과 일부 역사학자들의 일탈 행위가 결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승만 신화를 조선일보의 조갑제와 역사학자 류영익이 뒷받침했듯이 말이다. 냉전의 산물, 반공지상주의. 아마도 이들은 정치적으로 소멸될 때까지 이와 유사한 행동을 무한 반복할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에 대한 ‘대응’이 적절한가이며 근본적으로 역사학과 역사교육은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며 참된 역사 배움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는가 이리다.



누구나 그렇듯, 복잡다단한 ‘독립운동가’ 김원봉


다시 김원봉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사실 김원봉을 지키기 위한 방어 논리는 역사왜곡인 경우가 허다하다. ‘김원봉이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했고 며칠간 두문분출하며 고통스러워하다 김구에게 북행을 결심했다고 말한 후 월북했다’는 이미 상식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는 사실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김원봉 관련한 어떤 연구에서도 이를 공식한 적이 없다.

굳이 당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었던 친일 경찰 노덕술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이는 1947년 3월 22일 전평(전국노동조합평의회) 총파업 관련으로 잠시 체포되었을 때일 것이다. 문제는 당시 김원봉은 이미 남한에서 좌익 노선을 견지하며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임시정부 2차 귀환 멤버로 들어왔던 김원봉은 1946년 1월초에 김구와 결별하고 좌익연합체인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고 의장직을 수행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해방 공간에서 친일파의 득세는 일반적인 현상이었고 이는 김원봉 외에 모든 민족 지사들에게 가장 어려운 주제였다. 친일파가 문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유독 ‘김원봉이 북행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논리는 성립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또한 김원봉의 북행은 통념에 비해 훨씬 늦은 1948년 초이다. 1947년 이 후 냉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김구, 김규식 주도의 남북직접 대화를 통한 분단 저지 시도가 1948년에 절정을 이룰 무렵 이러한 흐름에 동참했던 김원봉은 일단의 무리들과 함께 북한에 남는다. 그리고 이 후의 과정은 널리 알려졌듯 북한에서 검열상, 감사원장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지만 대부분의 비김일성 계열의 항일 영웅들이 그렇듯 비주류의 신세를 면치는 못했던 듯하다. 강제로 납북된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과 중립화통일을 시도했다는 일화를 그저 낭만적이고 민족주의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결국 1958년경에 숙청을 당하고 만다. 친일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해방 공간에서의 복잡성, 김원봉 본인의 정치적 선택, 정치판이 지니는 독자적인 역학 관계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말이다.

꼼꼼한 역사적 검증으로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검토해보면 널리 알려진 이미지와 상충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대통령과 많은 후속 기사는 그를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의 주요 인물로 부각시키거나 좌우통합의 상징으로 추켜세우기까지 한다. 하지만 과연 그랬는가. 1930년대 이 후 김원봉은 김구와 격렬한 정치 투쟁을 벌인다. 중국 관내에서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주도권 문제 때문이었다. 둘 다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던 상황이었고 김상옥, 나석주로 대표되는 의열단 활동, 이봉창, 윤봉길로 상징되는 한인애국단 활동 등 여러 면에서 비슷한 궤적을 밟은 이들은 1930년대 중국 관내 민족주의 진영 통합의 양대 인물로 부상한다.

김원봉은 민족혁명당을 이끌며 지청천의 조선혁명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재건파 등을 흡수하는데 성공하지만 독단적인 당 운영 등이 문제가 되어 통합은 지속되지 못한다. 결국 김구가 이끄는 한국국민당과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지청천, 조소앙 등의 통합 과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여당 격인 한국독립당을 만들며 치열한 정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 시기 김원봉은 중국공산당과의 관계가 뒤틀어졌고 중국 관내 최초의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 대부분의 대원을 중국공산당 산하 화북독립동맹에 빼앗긴다. 결국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만다.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등의 수식어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하지만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 후에도 갈등은 지속된다. 장준하의 회고록 <돌베개>에서 보듯 김원봉 계열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대미 외교에 있어서도 이승만의 라이벌이었던 한길수를 끌어들이는 등 비판적으로 본다면 통합의 가치에 어긋나는 정치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셈이다. 선과 악의 잣대로 도저히 평가할 수 없는 복잡한 독립운동사의 장면이다.

이념적 관점으로 볼 때 김원봉은 극도로 모호하다. 애초에 아나키즘에 기초하여 의열단을 운영했다고는 하지만 의열단이 정말로 충분히 성숙한 아나키즘 단체였는지, 김원봉이 얼만큼 아나키즘에 경도되었는지는 조금 더 진지하게 따져볼 문제이다. 중국의 민족주의 진영인 국민당 정부에 지원을 받으면서 조선혁명간부학교 등을 창설했고 또한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김원봉은 아나키스트인가, 민족주의자인가, 민족주의 좌파인가, 사회주의자인가, 공산주의자인가? 이를 두고 그는 단지 이동휘처럼 민족해방의 수단으로 아나키즘과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민족주의자라고 규정하며 강변한다면 이 또한 매우 용렬한 역사의식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말이 되고 이는 민족주의 중심의 이념적 독선주의가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가 단지 관념적인 논변이었던가. 1920년대 이 후 해방공간까지 혹은 해방 이후에도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역사적 실체 아니던가. 더구나 이런 견지에서 김원봉을 규정해나간다면 아나키스트나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김원봉은 참으로 부실하고 맥빠지는 얼치기 활동가에 불과하지 않은가. 김원봉을 지키려고 만든 논리가 김원봉을 옹색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적 사실 왜곡, 역사 해석의 경직 등 각종 문제를 발생시키는 황당한 상황이 만들어지고 마는 것이다.



역사 교육은 고유의 영역과 역할이 있다.


사실 더욱 큰 문제가 있다. 역사학, 역사교육 역시 세간의 이런 강렬한 논리에서 그다지 벗어지 않다는 점이다. 애초에 한국사 교과서의 근대사 서술은 철저하게 민족주의적인 세계관으 서술되어 있고, 은연 중에 업적 중심으로 나열되어 있다. 1920년대 의열단의 활약, 1930년대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무장 조직 ‘조선 의용대’의 탄생과 승전, 1940년대 통합임시정부와 군무부장 김원봉, 1950년대 좌우합작운동의 가치.

단순 암기의 나열 가운데 김원봉은 절대 선일 수 밖에 없고 여기에 미디어의 영향, 그리고 부실하기 짝이 없는 김원봉 전기 등의 영향으로 인한 통념이 결합하면서 결국 별반 다름없는 역사 교육이 진행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부터 해보자. 역사 교육의 목적이 ‘개인의 영웅화’인가? ‘역사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다’라는 근대역사학의 근본 화두를 차치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역사를 소비하는 관행을 고려해본다면 작금의 김원봉 열기를 두고 판사의 입장이 되고자 하는 것은 역사교육의 근본목적은 아니라고 본다.

1920년대 초반 이제 갓 20대가 되된 김원봉은 왜 아나키즘에 관심을 보였으며 민족주의 역사학자로 널리 알려진 신채호는 왜 비슷한 시기 아나키즘을 수용하여 의열단 활동 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는가. 그리고 이 후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은 물론이고 중국 공산당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는가.


1919년 3.1운동의 실패와 임시정부의 외교독립론이 처절하게 실패, 한 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를 맞이하여 일본을 통해 여러 서구의 급진주의 이론의 대거 수입되고 유행하는 현상. 그리고 조선인 혁명가들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해온 쑨원의 국공합작 등이 미친 영향. 이런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김원봉의 선택을 판단하기란 무척 어렵다.


사실 김원봉의 선택 또한 그다지 중요하진 않다. 결국 그도 시대의 편린. 기존의 민족운동이 성공할 수 없었던 당대 제국주의 국제 질서의 힘과 그에 저항하고자 한 동아시아 해방운동의 등 포괄적인 담론과 거시적인 이해가 더욱 중요할뿐더러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석하는데도 훨씬 유익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판결문을 써내려가는 듯한 정확한 결론 또한 필요 없다. 오늘 우리 역시 특정 정당을 지지하면서 입장이 갈린다던지, 정책에 따라 같은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내부 논쟁을 벌인다던지 각종 다양한 생각이 난무한다. 결국 역사 ‘교육’이란 그러한 과정,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고, 현재를 통해 미래를 이해하는 매우 실용적인 E.H 카 식의 학문 아니던가. 다양하게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이 역사 교육의 목적이지 않냐는 말이다.


그런데 복잡한 현실에 대한 다양한 고민은 사라지고, 시대가 아닌 개인에 집중하며 그가 영웅인가 아닌가를 둘러싼 논쟁 정도에서 이야기가 전개될 때 오히려 역사학계나 역사교육계가 이에 더욱 가세하거나 논란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이는 본인의 학문 분과가 왜 탄생했는지, 본인들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가당착일 수 밖에 없다고 본다.


더구나 충분히 ‘역사의 정치화’ 작업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각종 정치적 이익을 위해 역사적 사실과 해석을 악용하는 상태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적 노력의 포커스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일까 아니면 그것들의 무용성을 입증하고 새로운 담론과 성찰을 제공하는 것일까.


역사 교육 본연의 공간은 정치도, 인터넷도 아닌 교실이고 공부에 힘쓰는 교사와 학생이다. 누가 뭐라 해도 교육의 독자성, 역사교육의 가치를 독실하게 수행하며 독자적인 담론과 가치 있는 성과를 만드는 길, 그것이야말로 오욕에 찬 김원봉의 한스러운 인생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진정한 보답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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