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라지만 체득된 삶은 그저 움직여지는 것. 체념이 체득된다는 것은 체념이 익숙하다 못해 내가 체념을 했는지 아닌지에 대한 감각도 없이, 거대한 해류처럼 절로 진행되어 버리는 것. 마치 먹물이 종이에 툭 묻었을 때 그 얼룩의 느낌이 아주 만족스러운 경우처럼 의지를 뛰어넘는 경지.
체득된 체념은 감정을 넘어선다. 울퉁불퉁한 감정의 조각들을 쳐내고 정리해 가매 기복 없이 매끄러워지는 고지(高地)와 같은 것, 완만한 스카이라인 너머의 황금 노을.
해협가의 곶에 서서 뒤를 보니, 이미 멀어진 풍경들이 문득 파도타기를 하며 나를 북돋우고 있었다. 이방의 것인 줄만 알았던, 그래서 손사래 쳐 오던 것들이 실은 내 곁의 것들이었네. 이렇듯 체득된 체념이란 '흔연한 발견'. 의지로 행동하던 때엔 볼 수 없었던, 말할 수 없이 생그러운 존재들이 그제서 보이는 것.
내가 체념을 예찬하는 것은 무조건의 포기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얻기 위한 포기'를 좋아하기 때문이고, 내가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체념도 행복의 수단일 수 있음을 주장하기 위한 나름의 분투이며, 체념의 체득은 만년설을 밟는 나의 모습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