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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의 오후 Sep 04. 2020

그저 무엇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이거 예전부터 주고 싶었는데, 지금 생각난 김에... 가방에 챙겨 넣고 가지고 다니렴"

오랜만에 딸아이와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이때다 싶어 콘돔 두 개를 내밀었다.

무언가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지만, 시크한 척 내뱉었다.

"이게 뭔지는 알아?"

"응 알아. 학교 성평등위원회에서 전시할 때 봤어. 학교에서 나눠주기도 했는데, 난 안 받았어."

나의 예상과는 달리 아이는 나보다 더 시크했다. 나만 괜히 쫄았네.

언젠가 연애하는 딸애에게 주어야지 하면서 챙겨두었던 콘돔을 타이밍을 찾지 못하고 가지고만 있었다.


"네가 남자 친구도 있고 하니, 혹시 모를 상황에서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응급용으로 주는 거야.

엄마가 옛날 사람이라 보수적인지 몰라도 엄마 생각으로는 학생 때는 사용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게

엄마의 솔직한 바람이야."

'응급용'이라는 표현이 이상했지만,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응. 무슨 말인지 알아. 그게 뭐가 보수적이야. 엄마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행히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듣고 이해해주는 딸이 고마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때부터는 성인이니까, 네가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고...

어쨌든 이걸 사용하는 일은 책임이 필요한 행동이니 서로 준비가 될 때 잘 사용하면 좋겠어."

어떤 단어로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단어들을 고르고 있는데...

"엄마 나 A랑 섹스에 대해서도 서로 이야기해봤어."

먼저 쨉을 날린다.


큰아이가 초등 6학년이었을 무렵,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엄마를 찾더니 예상치 못한 훅을 갑자기 날렸다.

"엄마, 섹스해봤어?"

집안 일로 분주하게 움직이던 나는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모든 것이 멈춘 느낌이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빠르게 수습하려는 뇌는 의연하고 시크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럼 해봤지. 엄마는 애도 낳았는데..."

일단 한고비를 넘겼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애써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물었다.

"근데 왜? 어디서 들었어?"

"아니, 오늘 애들한테 들었는데..." 다행히도 아이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른 일 같았으면 나도 따라 들어가 학교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물어보았을 텐데, 준비되지 않은 나는 오히려 더 이상 물어보지 않은 아이가 고마웠다. 추측컨대,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날 나는 놀란 가슴을 조용히 쓸어내렸다.



그랬던 아이가 이제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고, 남자 친구와 연애 중이다.

"A랑 섹스 이야기를 한다고? 와~ 대단하네. 엄마는 대학교 졸업하고서도 잘 못했는데..."

"서로의 스킨십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데이트 폭력 이런 주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언젠가 딸아이가 생리통으로 남자 친구와 약속을 취소하자, 생리통에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과일이 좋지 않을까 해서 샀다며 모아놓은 용돈으로 청포도를 사 가지고 집 앞에 왔던 일이 생각났다.

학창 시절 난 누가 알면 큰일 날 것처럼 어떻게든 생리를 숨기기에 바빴는데, 요즘 애들은 이렇게 다르구나 싶었다. 생리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예쁘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둘의 관계가 훨씬 건강하구나 하는 생각에 기특하게 느껴졌다. 아이가 성에 대해 오픈마인드를 가진 데는 다니는 학교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공립형 대안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아졌고,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성찰이 많아졌다. 그래서 가끔 식탁 위에서 무장해제된 아빠를 공격하기도 했다.

몇 번 공격을 당했던 아빠는 딸아이와 이야기를 할 때는 단어 선택을 신중히 해서 빌미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이에게 콘돔을 건네준 이후 아들을 키우는 친구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친구는 아들이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콘돔을 주었다고 했다. '너의 즐겁고 자유로운 삶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라고. 나는 농담으로 '와~ 딸 부모는 응급용이라고 주는데, 아들 부모는 자유로우라고 주는구나, 와! 이렇게 차이가 나네~' 했지만, 나는 딸아이에게 왜 그렇게 표현하지 못했을까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 애도 낳았지만, 난 아직까지도 성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

그리고 나에게 성은 누려야 되는 즐거움보다는 조심해야 할 영역이었다. 그게 내가 성장했던 시대의 학습이었고 사회의 유전자였다. 그래서 딸아이에게 어떻게 하면 즐겁게 내 몸과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탐색하고 누려야 하는지를 말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고 보니 나에게 성은 삶을 좌지우지할 만큼의 즐거움을 주진 못했던 것 같다. 워낙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형도 아니고 성에 대해서 보수적으로 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그게 학습의 탓인지, 타고난 기질인지 가끔 궁금하긴 했다. 영화나 소설을 볼 때면, 이 나이 되도록 나의 경험과 감각이 상상하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가 참 많구나 싶었다.

그래서 난 아이에게 섹스가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섹스가 얼마나 서로의 존재를 충만하게 해 주는지를, 더 나아가 사회가 금기했던 많은 종류의 사랑이 삶을 얼마나 뜨겁고 풍요롭게 해 주는지를 말해줄 수 없었다. 영화 <윤희에게>의 윤희처럼 태어나지 않은 것에 단지 감사할 뿐.

어쩔 수 없는 부모인 나는 내 아이의 삶이 익명의 그늘 속에서 안전했으면 좋겠고, 자유로운 삶에서 얻는 기쁨보다는 고통받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이는 나와는 다른 존재니까,

내가 어쩐다고 저쩔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저 무엇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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