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半百)이의 소박한 스마트 세상
이제 곧 알람이 울리겠군 하며 아침 햇볕에 실눈을 게슴츠레 뜨자 잘 만났다는 듯 알람 속 그녀가 말을 건다.
“안녕하세요, 지금 시각 오전 7시 30분입니다. 현재 기온 섭씨 28도, 오늘 최고 기온은 ….”
시간을 말해 주고, 기온도 알려주고, 비 올 확률이 몇 프로이니 우산을 챙기라는 등의 주의도 잊지 않는다.
좋은 하루 보내라고 다정하게 격려도 해준다.
뻐근한 몸을 위해 텔레비전에게 “아침 스트레칭 영상 찾아 줘” 하니
아직 칼칼하게 잠긴 내 목소리도 한 번에 척 알아듣고 요것조것 몇 가지를 보여준다.
뭐하나 시키려면 최소 3번은 소리 질러야 알아먹는 아들놈보다 훨씬 더 효자다.
삐걱대는 뼈와 찌뿌둥한 근육에 활기를 좀 넣어주고 세수를 하러 간다.
상쾌한 아침을 위해 음악은 필수지.
음악 스트리밍 앱을 켜서 나를 위해 추천된 플레이리스트를 훑어본다.
어제, 그저께, 그리고 일주일 전 들었던 내 취향까지 다 고려해서는 호텔 뷔페식 마냥 #활기찬 아침 #비 오는 날 감성 돋는 음악 # 강남 클럽 EDM 참 다양하게도 뽑아놓았다. 기특도 하다.
아들을 깨워 온라인 수업에 입장시키고, 커피를 한잔 내려앉자 ‘띠롱’하며 알림이 온다.
오늘의 영어문장 한마디!
그래 글로벌한 아줌마가 되려면 하루 10분 정도는 필수지 하며(다음을 약속하는 날이 더 많다는 건 비밀) 그 문장을 따라 해 보고 즉석 평가도 받는다.
떠듬떠듬 읽어도 ‘니 발음 아주 괜찮아, 칭찬해’ 하는 걸 보니 온라인 속 사람? 아니 기계? 는 다들 친절한가 보다.
영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고 있는 마닐라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필리핀 절친 하나 없는 나는 아직도 영어의 바다에만 나가면 꼬르륵꼬르륵 가라앉고 있다.
이를 위한 구명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 각종 영어강좌 채널 및 어플들이다.
그중에서 요즘은 ‘cake’라는 어플을 구명조끼로 사용하고 있는데 다양한 카테고리가 있어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심지어 마음씨 좋게도 완전 무료이다.
알록달록하고 기능도 좋은 구명조끼를 입었으니 이제 내가 계속 물장구치기만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영어의 바다에서 익사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바다 수심이 너무 깊어 수영이 아니라 스쿠버 다이빙을 배웠어야 하나 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도 많다.
초간단 영어공부를 마치고는 머리도 식힐 겸 친구들 집에 놀러 간다.
운동화도 신을 필요 없고, 자동차도 필요 없다.
손가락 하나만 있으면 ‘난 너희가 어젯밤 뭘 했는지 다 알 수 있다’
인스타그램, 거기에 가면 내 친구뿐 아니라 친구의 친구까지 쉽게 안면 틀 수 있지만 군중 속의 고독을 가르쳐 주는 곳 또한 바로 그곳이다.
가끔 특별히 좀 더 친하거나 마음이 너그러운 이들이 나에게 달콤한 하트를 날려주기도 하는데도 엄친아가 대부분인 그곳에서 가끔 난 까닭 모를 상처를 받고 울적해질 때도 있다.
우정도 사랑도 늘 좋을 때만 있는 건 아니니 이해하기로 한다.
슬그머니 친구 집을 나와 책 수 만 권(이 담겨있는 태블릿)을 들고 가장 편안한 의자를 찾아 앉는다.
눈이 좀 침침해서 글씨가 잘 안 보여도, 골라 든 책이 내 취향과 좀 다른 것 같아도 걱정 없다.
어릴 적 찾아가던 만화방 주인아저씨보다 더 후한 인심의 독서 플랫폼은 한 달 단 돈 만원에 이 책 저책 다 빌려준다.
얼마 전부터 ‘책, 읽기 싫으면 들어볼래’하며 김혜수 언니가 소개한 곳에서는 나긋나긋한 찐 사람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는 서비스도 베푼다.
예전엔 외국에서 한국 책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책이 없어 못 읽는다는 핑계는 '마닐라에 눈이 온다'라는 말처럼 새빨간 것이 되고 말았다.
때로는 우아한 터치 말고 과격하게 손가락에 침 묻혀서 책장 넘기고 싶은 욕구가 일기도 하지만 나는 어느새 전자책의 매력에 길들여졌다.
그네들은 글씨 크기, 화면 밝기도 조정해주고, 꽤 오래전에 읽고 있던 책이라 내가 어디쯤 읽다가 그 책을 덮어버렸는지 잊어버렸어도 살뜰하게 여기부터 읽으면 돼 하고 책장을 넘겨준다.
가끔 책을 읽다 태블릿을 베고 잠들 때도 있는데, 아쉽게도 전자책 또한 베고 잔다고 책이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역시나 아니었다. 차마 거기까지는 친절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오후에는 과외수업에 참석한다.
유튜브라는 아주 다재다능하고 박식한 선생님들이 모여있는 강의실 겸 영화관 겸 음악실, 한마디로 총체적 멀티플렉스다.
나는 거기서 뜨개질도 배웠고, 젊고 잘생긴 선생님을 흠모하며 인문학 강의도 들어봤고,
심지어 물 새는 변기 고치는 법도 배웠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똑똑하다 못해 가끔은 엉뚱한 구석도 있어 내 앞에 생뚱맞은 화면들을 펼쳐놓기도 하는데 중심을 단단히 잡고 있어야지 안 그랬다가는 유튜브라는 개미지옥에서 오랜 시간 허우적대기 십상이다.
행여 잠 안 오는 밤, 그 지옥을 잘못 열었다가는 인터넷 무당집에서 사주팔자를 보고 있거나, 남의 집 구경을 다니거나 또는 전생 체험에 빠져서 하얀 밤을 지새울 수도 있다.
대체로 이런 모양새로 나의 소박한 스마트 하루는 지나간다.
이것들 말고도 내 핸드폰과 컴퓨터에는 수많은 애플리케이션들이 있다.
어떤 것들은 매일매일 뻔질나게 이용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누가 좋다고 해서, 언제 산지도 모르고 쟁여둔 물건처럼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기도 하다.
이 순간에도 발전하고 있는 편리하고 신박한 스마트 세상은 나에겐 너무나 넓다.
올해로 앞자리가 5자로 바뀐 나이다 보니 스마트 세상을 바삐 살아내기엔 내 몸이 그만큼 스마트하지는 않다.
손끝은 느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눈도 침침하다.
하지만 나는 기죽지 않을 생각이다.
그 세상에서 길 잃지 않도록 계속 배우고 익히며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을 바쁘게 놀리며 늙어가려 한다.
간혹 길 잃을 땐 지나가는 똑똑한 젊은이들에게 길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수요일, 창 밖을 보니 알람 속 그녀의 말처럼 비가 오고 있다.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그렇다. 나는 비 오는 수요일 하면 빨간 장미가 떠오르는 촌스러운 80년대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 흐린 아날로그식 감성 위에 선명한 디지털의 색채가 멋스럽게 어우러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띵똥'
인터넷 요금 납부하는 날이라는 알림이 왔다.
스마트 세상을 위한 일용할 양식, 인터넷.
한국과는 비교도 안될 수준의 남루한 서비스이지만 그래도 이런 나의 스마트한 하루를 가능케 해주는 필리핀 인터넷 회사에 '제발 고객센터 전화 좀 받으라'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담아서 얼른 돈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