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반백 수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닐라 Feb 16. 2022

입영통지서

“아들, 초콜릿 하나 먹지? 오늘 발렌타인 데이래”

냉장고에서 뒹굴고 있는 초콜릿 한 조각을 꺼내 내밀었더니 손사래를 친다.

“여자 친구가 주는 것도 아니고.. 엄마는 무슨 설날에 떡국처럼 초콜릿을 챙겨 먹어?”

퉁명스럽게 돌아서는 아들이 얄미운 게 아니라 안쓰러워 보이는 건 그저께 받은 입영통지서 때문 일 것이다. 


휴학하고 입대를 기다리며 빈둥거리는 듯한 아들의 일상이 한심하고 답답해 요 며칠 부쩍 잔소리도 많이 했었는데 덜컥 입영통지서가 날아와 한 달 후면 ‘군대’라는 무시무시한 데를 내 아들이 간다 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오그라든다.



이십여 년을 키워 오는 동안 웃는 날만 있지는 않아 한숨 쉬는 날도 많았고 서로 아옹다옹하기도 했었지만 

저 아이를 내 몸에 품고 있었던 열 달의 행복은 아직도 선연하다.

그 열 달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번뇌가 없던 때였다.

과거에 대한 후회를 돌아볼 시간조차 아까웠고, 미래에 대한 불안 따위는 내 맘을 비집고 들어 설 미력도 없었다. 

자존감 낮고 염세적인 편인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경이로운 충만함이었다. 

태교를 하겠다고 유난히 마음을 다잡은 것도 아니었고 당시의  상황이 핑크빛인 것만은 아니었는데도

세상은 환한 ‘빛’으로만 내게 다가왔다..

그때 그 마음으로 종교를 믿었다면 나는 진즉 회개하였으며 열반에 올라섰을 것이다.




처음으로 맞는 생경 해서 벅찬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번호를 매긴다면 

저 아이는 나의 찐첫사랑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첫사랑은 환상이 큰 법이라 태어난 아이를 20여 년 마주하고 사는 동안 그 환상은 깨졌다 빛나다 하며 얼룩덜룩해졌다.

한결같지 못했던 그 얼룩덜룩함이 오늘따라 아이에게 미안하다.


올해 봄은 나의 찐 첫사랑 걱정에 꽃들이 얼마나 붉은지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밤바람이 조금만 거칠어도 늦게까지 잠 못 들 수도 있겠다.

그래도 눈물바람으로만 그 시간들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의 1년 반 시간 동안 저 아이와 나의 사랑은 어느 때보다 깊어질 거 같으니...

아들, 잘 갔다 와





Photo by Filip Andrejevic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와 헤어지는 중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