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준비 해온 대답>을 읽고
편안한 집과 익숙한 일상에서 나는 삶과 정면으로 맞짱 뜨는 야성을 잊어버렸다.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도 잃어버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들에서 평화를 느끼며
자신과 세계에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김영하 <오래 준비해온 대답 중>
김영하 작가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작가의 시칠리아 여행을 담은 여행기다.
스마트 폰이 없던 십여 년 전에 전자기기를 이용한 길 찾기, 교통편 예약 같은 것 없이 떠난 순수 아날로그식 여행이었다.
시칠리아.... 영화 대부에서 본 몇몇 풍광 말고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기에 한없이 동경하게 되는 곳.
나의 기억력이 요즘 성실 근면하지 않는 탓에 책을 덮고 며칠 지나면 정확한 거리, 해변의 명칭은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책을 읽는 동안은 그곳의 태양과 바람을 나 또한 온몸으로 쐬고 있는 느낌이었다.
작가는 시칠리아 여행 동안 될 수 있으면 기차 타기를 고집했는데 인터넷 예매 같은 건 생각지도 못할 때였을뿐더러 시스템적으로도 다소 불편한 시칠리아 열차노선 때문에 집 떠난 고생을 톡톡히 한다.
그 장면들을 읽으면서 “헐, 황당했겠다” “아니 거기까지 어떻게 걸어가? 저 무거운 가방을 들고” “ 저기선 김영하 작가 부부라도 정말 싸울 각이었겠는 걸’. 하며 의외의 난관이 툭툭 튀어나오는 그들의 여행에 나 또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작가의 여러 흡인력 있는 문장들이 나 또한 시칠리아 길 위에 서 있게 했기 때문이었겠지만
저 위의 대목에서는 주책맞게 눈물이 났다.
특히나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도 잃어버렸다’라는 문장은 나는 왜 이렇게 나를 모르는 것 같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같이 느껴졌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을 나도 잃어버린 것이다.
눈알 굴려가며 잠시 헤매다 보면 나를 설명할 말들을 억지로 몇 마디 끄집어낼 수는 있었다.
그러나 나의 감각은 둔화되어 나를 감지하지 못하다 보니 나에 대한 생생한 형용사를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 스스로가 무감의 숲에 들어가서 나, 나의 일상, 나의 상상까지 다 무료하고 무상한 것들이라 단정 지었던 건 아닌가 싶다.
하상욱 시인의 ‘예전에는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랐다. 요즘엔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란다’라는 글을 보고 물개 박수로 격하게 맞장구쳤었다.
그렇지만 이제 다시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보려고 한다.
이제 와서 갑자기 내 일상이 휘황찬란해지지는 않겠지만, 호기심을 갖고 나와 내 주변을 감지하는 감각에 뾰족한 안테나를 세운다면 좋은 일이 수신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