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한국의 40대 이상인 사람들 중 이 장면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나 또한 황량한 정적 속에서 저 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뛰어나오던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굴렁쇠를 한 번도 굴려 본 적 없던 나는 '저 굴렁쇠, 쓰러지는 건 아니겠지'하는 걱정도 잠깐 했었었다.
저 소년은 아직 기억하면서도 저 장면이 담고 있는 뜻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전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88 올림픽 개폐막식 기획자가 이어령 선생이고,
저 장면은 목청 높여 외치는 구호가 아니라 순수한 정적이 주는 힘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대화체 형식의 책 편집은 익숙하지 않고, 이 책 또한 그저 엇비슷한 독려형 자기 계발서겠거니 생각했던 나는
이 책을 펼치기 전에는 그의 지성이, 그의 사유가 이렇게 깊고 반짝이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투병 중이었던 그는 이 책을 마지막 수업으로 남기고 그저께 돌아가셨다.
하이라이트로 칠해가며 읽던 그 책을 다시 꺼내본다.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 보게.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비어 있어야겠지. 비어있는 것, 그게 void라네.
그런데 비어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나? 우주까지 닿아.
그게 영혼이라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 채로 우주에 닿은 것이 영혼이야"
"그런데 빈 컵에 물을 따랐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런데 이것 보게, 그 마인드를 무엇이 지탱해 주고 있나?
컵 없으면 쏟아지고 흩어질 뿐이지.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액체로 채워져 있어.
마인드로 채워져 있는 거야..... (중략)
마음을 비워야 영혼이 들어갈 수 있다네."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겁던 물은 다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선생은 책에서 육체, 영혼, 마음이라는 삼원론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영혼과 마음' 다른 것 같기는 한데 어떻게 다른지 제대로 감 잡을 수 없었던 나에게 맞는 눈높이식 설명이었다.
'마음을 다잡자. 착하게 마음먹자, 마음 가는 대로 살자...'
그동안 나는 마음이 가장 큰 주춧돌이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마음은 컵 안의 액체처럼 존재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것이 아무리 선하고 부드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존재감이 예리하게 드러나는 것만으로
스스로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마음을 숨기지 못해 때론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오해가 얼마나 많았으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또는 마음 다잡기가 힘들어 생긴 자책과 절망은 또 얼마나 숱했던가.
내가 선생의 뜻을 곡해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음을 굳게 먹지 않으려 한다.
마음의 농도를 좀 흐리게 하며 살고 싶다.
성인군자들처럼 마음을 비우고 영혼으로만 살지는 못하더라도
빼곡한 마음 때문에 힘들고 싶지는 않다.
가끔씩 마음도 솎아내기를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유통기한 지난 마음,
너무 거창해 도저히 품을 수 없는 마음,
살뜰하다 못해 걱정이 되어가는 마음, 이런 것들 위주로 솎아볼까 한다.
그 공간에 나도 투명한 영혼을 들이는 연습을 해야겠다.
자유로운 한량 같은 흉내라도 내볼까 한다.
선생의 육체는 안타깝지만 이제 컵처럼 깨졌다.
그러나 그 영혼은 저 우주 어디에서 자유롭게 떠다니지 않을까
부디 평안한 여행이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