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소비에 대한 강박으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계시진 않나요
요즘 경제교육을 할 때나 1:1 재무코칭을 할 때 '가계부를 쓰느냐'고 물으면 거의 대다수는 못 쓰고 있다는 답이 돌아옵니다. 말 그대로 장부에 수기로 기록하는 가계부 말고도 다양한 어플이나 프로그램이 다수 개발되었는데도 생각보다 꾸준히 사용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가계부를 '못 쓰는 것'이 아니라 '안 쓰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못 쓴다'와 '안 쓴다'는 결과적으로 가계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의도나 태도 면에서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못 쓴다'고 하면, '가계부를 당연히 써야 한다'는 당위가 우선하는 느낌입니다. 어디에 돈을 쓰고 사는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기록하면 그래도 씀씀이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확인하지 않으면 뭔가 찜찜해서 등등 다양한 이유로 가계부를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왠지 가계부 얘길 하면 '가계부=절약' 혹은 '합리적 소비' 같은 강박이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린 알게 모르게 '절약'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산다는 얘기가 됩니다.
절약 혹은 절제된 소비,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지출 기록'을 하는 가장 중요한 기대 효과일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지출 내역을 기록해보면서 우리는 내게 주어지는 한정된 돈을 어디에 얼마나 쓰고 사는지부터 파악하게 됩니다. 혹시 편중된 지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덜 중요한 곳에 돈을 써서 정작 중요한 곳에 쓸 돈이 부족해지지는 않는지 등을 확인하는 일이 지속가능한 삶에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가계 운영은 주식회사 경영이 아니기 때문에 장부를 써서 무조건적인 절약과 흑자 달성을 목표로 운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오히려 국가 살림 운영처럼 부처별 예산을 정해 두고, 그 예산 안에서 교육 정책을 실현하고, 보건 복지 정책과 국토 개발 등을 실행하는 것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육부에서 교육 예산을 배정받으면 아껴서 남기는 것보다, 주어진 예산 내에서 교육 정책을 잘 구사하는 데 '잘 쓰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주어진 예산을 어떻게 쓰는 것이 잘 쓰는 일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경제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의사결정이죠.
결국 장부를 쓰면서 그 지출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한 가정의 삶의 우선 순위를 알고 그에 맞는 돈 관리를 한다는 데 목적이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막연한 절약 혹은 내집 마련 같은 것은 정작 실제의 돈 관리에 있어 그리 중요한 동기부여 요소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가계부를 몇 년 이상 써온 사람도 가계부 속에서 이런 우선 순위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산 대비 결산을 하기엔 가계부의 양식이 적절치 않기 때문입니다. 날짜별로 얼마 썼는지, 주간 통계, 월간 통계를 내서 결국 얼마 썼는지를 합산하는 것은 작성자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출 내역을 기록하면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진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일일이 적다보면 괜히 돈 쓰고 나서 후회만 하게 되어 정신건강에 해롭다, 기록한다 해도 마이너스가 줄어든다거나 돈이 더 생기는 것도 아니지 않나, 자꾸 돈돈하게 되어 속물이 되어가는 것 같아 씁쓸하다 등 다양한 부작용(?)이 회자되곤 합니다.
요근래는 '시발비용'이라는 신조어가 각종 매체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큰 공감을 얻으며 누리꾼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시발비용'은 비속어 ‘X발’과 ‘비용’을 합친 단어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비용’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상사에게 깨져서 마시게 된 술값'이라든가 ‘스트레스를 받고 홧김에 시킨 치맥’, '만성적 피곤이 겹쳐서 사먹지 않으면 하루를 버틸 수 없는 커피값' 등이 자조적으로 거론되며 '시발비용'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셈이죠. 고시생이나 취업준비생과 같이 경제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계속된 취업 실패로 매일 술을 마시는 등 시발비용 지출이 늘고 살만 쪘다”며 “이렇게 찐 살 때문에 헬스장을 등록해 또 다시 시발비용을 지출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또한 누리꾼들은 “스트레스로 시발비용이 지출되다 보면 탕진잼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시발비용보다 앞서 등장한 유행어 ‘탕진잼’은 “소소하게 탕진하는 재미가 있다”는 말을 줄인 것으로, 저가의 생활용품과 화장품을 여러개 구입하는 등 자신의 경제적 한도 내에서 마음껏 낭비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큰 금액이 아니지만 자신에겐 소소한 금액의 소비도 ‘탕진’으로 느껴진다는 자조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요. 어떤 컬럼에서는 무조건 필요에 따른 합리적 소비만 있는 것은 아니라며, '소비에 실패할 권리'가 있다고 호소하여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소비 생활이란 특정 환경의 제약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생존의 의무 방어같은 행위인 걸까요? 소비 주체로서의 나의 능동적 의사 결정과 판단과 선택도 분명히 존재할텐데, 이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사람의 소비 행위는 구조적 여건이나 상황, 내가 속한 사회의 규범이나 분위기 등에 못지 않게 나의 소비 성향과 선택, 그리고 판단 착오 등도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죠. 그런데 이런 다양한 원인들을 무시하고 특정한 외적 환경의 문제로만 지나치게 편중되게 되면 우리는 '상황적 귀인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귀인(歸因)은 특정한 행동이 발생한 원인을 추론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내 문제는 내가 행위자이므로 내 행위에 가해진 상황적 제약에 대해 잘 아는 반면, 다른 사람의 문제는 내가 관찰자에 불과하므로 상황적 제약에 대해 알기 어려워 그 사람 성향 탓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본적 귀인 오류 - 왜 내 문제는 ‘세상 탓’ 남의 문제는 ‘사람 탓’을 하는가? (감정독재, 2014. 1. 9., 인물과사상사)
시발비용이든 탕진잼이든 우리의 웃픈 소비생활을 자조적으로 반영한 말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소비의 결과'일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나의 소비의 결과가 내 스스로에게 유익해야 만족을 얻을 수 있을테니까요. 자신의 소비지출 기록을 통해 '소비의 결과'가 만족으로 이어지는지, 혹은 후회로 이어지는지는 오직 자기만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내 한정된 돈을 써서 '만족'을 얻는다면야 좋은 소비생활의 결과겠지만, 만약 돈은 돈대로 썼는데 만족은 커녕 후회만 얻는다면 이것은 심각한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돈은 돈대로 쓰고 가치나 만족을 얻지도 못하는 이중의 손실이 거듭된다면 우리의 지속가능한 소비생활은 물론 정신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입니다.
우리에겐 '소비에 실패할 권리'보다 '소비하고 후회하지 않을 권리'가 우선입니다. 무조건적인 절약에 치여 '매일 잘 참다가 한 번 욱하고 사고 치는' 소비 스타일에 대한 자기 점검이 있어야 좀더 지속가능하고 안정적인 소비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맹목적 '가성비'로 회자되는 소비 생활 만족도는 너무 돈 중심의 사고 구조와 생활을 만듭니다. 한번쯤 '자기 만족 중심'에서 솔직하게 소비 생활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성과 판단 그리고 교정을 위한 목적은 접어두고 좀더 자신의 소비생활을 통해 자기 성향을 발견하는 '지출관찰일기'를 쓰는 일이죠.
'지출관찰일기'는 종전의 지출계정 분류에 너무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지출 성향을 살펴볼 수 있는 다른 상위 분류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같은 식비라도 나의 '기본생계비'인지 '사회생활을 위한 비용'인지로 구분해서 파악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돈 씀씀이가 '식생활비', '주거생활비', '대인관계', '가족', '문화생활', '자동차', '자녀', '반려동물' 등 어디에 혹은 누구에게 주로 쓰는지, 어디에는 잘 안 쓰는지가 자신의 지출 성향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날짜별로가 아니라 지출처별로 상위 분류하여 지출 내역과 금액을 정리해보면, 오늘 얼마 썼는지가 아니라 오늘 생활비로는 얼마, 자기계발비로는 얼마, 사회생활비로는 얼마와 같은 식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아, 나는 식비 중심형 인간이구나', '먹는 데 많이 쓰는 줄 알았더니 가족에게 돈이 많이 들어가는구나', '반려동물에게 별로 돈이 안드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드는구나' 하는 자기 발견을 하게 되는 것이죠. 돈 가는 데 마음간다고, 결국 돈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곳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절약'이 아니라 그저 기록과 집계를 통해 자신의 우선 순위를 발견하는 과정은 '개인의 생활경제사'를 드러내는 소중한 아카이브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일기의 경제 버전인 셈이죠.
절약과 흑자생활에 대한 목적의식적 기록이 오히려 돈 관리 스트레스를 부릅니다. 좀더 자기다운 생활경제관리를 위한 기록과 정리를 통해 갈수록 복잡해지는 경제 환경 속에서 그나마 자신의 우선 순위에 따른 질서를 잡는 것이 괜한 미래불안과 혼란을 줄이는 삶의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이를 통해 100세 인생 시대 지속가능한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자신만의 우선 순위와 적정 기준이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결국 얼마나 효율적으로 돈을 관리하느냐보다 주어진 돈으로 얼마나 자기만족을 높이는 소비를 하느냐로 삶의 질이 달라질 것입니다. 중요한 곳에 돈을 쓰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곳에는 돈을 덜 쓸 수 있다면 같은 돈으로도 삶의 만족도를 좀더 높여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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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박미정
문헌정보학을 전공했으나 사서가 될 생각은 못하고 문화기획, 벤처회사 홍보팀 등 평균 1년에 1직장을 거치며 파란만장한 직장생활을 경험했다. 불안정한 직군에서 열정을 담보로 땀흘린 결과 신용불량과 개인파산까지 겪고 시름하다 금융회사 FP로 취직, 제법 높은 실적을 올리며 모든 빚을 한번에 해결했다. 그러나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자신이 팔았던 투자성 금융상품들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하며 고객들이 손해보는 것을 속수무책 지켜보며 현재의 금융경제 시스템에 회의를 느꼈다. 그렇게 돈 때문에 울고 웃어본 경험을 바탕으로 돈 관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취지 하에 <M밸런스노트>를 개발해 적정소비생활을 통한 심신의 안정을 전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