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기원을 찾아서!
몇 해 전 World Bank에서 발표한 글로벌핀덱스(Global Findex)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까지 전 세계 인구 중 금융 계좌를 갖고 있는 사람의 비율은 불과 절반(51%)밖에 안 된다고 한다. 또한 금융 계좌를 단 하나도 개설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무려 20억명 이상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모바일 금융 서비스 역시 전 세계 인구 중 불과 2%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보고서의 내용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만드는 내용들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만큼 금융서비스가 너무나도 친숙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은행이 없는 일상생활을 상상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은행이 없다면 월급을 보관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소소한 지출들은 모두 현금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 요금, 휴대폰 요금, 각종 공과금 모두 해당 회사에 직접 방문하여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은행의 대출 내지 할부 서비스가 없다면 아파트나 자동차를 구입하기 위해서 거금의 일시불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은행이 없는 세상은 단순히 불편함을 넘어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한 은행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을까?
최초의 은행은?
은행의 기원이 무엇인지, 무엇을 초기 은행의 형태로 봐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은행을 통해 수행하는 다양한 금융서비스 중에서 어떤 부분을 주목하느냐에 따라 은행의 원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 속에서 초기 대부업의 기록이 남아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은행이 처음 등장한 곳으로 볼 수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적지에서 발굴된 점토판은, 오늘날로 따지면 일종의 '어음' 내지 '채권'의 기능을 수행하였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점토판에 새겨진 내용을 보면, 이 점토판을 소지한 사람이 추수 때 얼마만큼의 보리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는지가 새겨져 있거나 만기가 되면 점토판을 소지한 사람에게 일정 수준의 은화를 지급하라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갚아야 할 금액과 시점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는 점토판은 왕궁이나 사원을 거쳐 발행됨으로써 점토판의 내용에 공신력을 부여했다. 따라서 점토판을 관리 감독하는 기관 내지 담당자가 은행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바처럼 대부업 기능을 중심으로 은행의 원류를 찾을수도 있지만, 은행의 가장 원시적인 기능은 귀중품을 보관하는 '공공금고'의 역할이 주를 이루었다.
물물교환으로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던 시대가 지나고, 금화 내지 은화와 같은 화폐나 귀금속을 거래에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들 화폐와 귀중품을 보관할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특히 강력한 중앙 정부가 형성되지 않았던 고대 도시국가들은 빈번히 다른 국가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재산을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자 하는 욕구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이때 고대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공간은 다름 아닌 사원이었다.
사원은 신을 모시는 폭력이나 절도와 같은 비도덕적인 일이 금지된 신성한 장소이다.
또한 신이 지켜보고 있는 신성한 곳에서 다른 사람의 귀중품을 몰래 훔쳐가는 행위는 저주 내지 불행을 자초하는 일로 여겨졌다. 때문에 강도나 폭도들의 침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원은 많은 사람들이 빈번히 방문하는 공공장소이다. 따라서 누가 언제 방문했는지 무엇을 들고 갔는지 확인해 줄 수 있는 수많은 목격자들이 항상 존재한다. 따라서 사원에서 아무도 모르게 무언가를 들고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설사 누군가 몰래 뭔가를 가져갔다 하더라도, 당시 상황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수많은 목격자들을 쉽게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사원의 공공성은 도난을 방지하고 도난 시 범인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준다.
초기 사원은 귀중품을 보관해 주고 직접적으로 대가를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점차 많은 사원들이 이를 비즈니스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수수료를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델포이와 올림피아의 많은 사원들은 많은 사람들이 맡겨놓은 금은보화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후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는 도시가 각지에서 등장하면서 단순 보관 기능을 넘어 환전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기 시작했다. 이는 지중해 연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북부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유럽 대륙 등과 다양한 지역과 교역을 수행했던 로마 역시 귀중품의 단순 보관 기능뿐만 아니라 환전서비스가 추가로 필요했다. 유럽 각지와 다양한 상거래를 수행하다보니 이 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화폐를 취급하게 되었고, 이들 화폐의 품질 또한 제각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적인 환전상에 대한 수요가 점차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빈번한 상거래를 지원하기 위한 영수증 발급과 어음 발행도 필요했다. 때로는 물건을 담보로 저당을 잡아줄 사람도 필요했다. 당시 로마는 이러한 시민들의 요구에 부합하고자 국가 차원에서 사원 이외에 귀중품을 보관할 수 있는 시설물을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상인들의 어음과 영수증 발급 업무를 도와주고 환전 관련 금융서비스를 주업으로 하는 환전상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상인들이 주로 왕래하는 거리에 탁자에 무게를 달기 위한 저울을 올려 놓고 벤치에 앉아 상인들의 교역 활동을 지원해 주었다. 은행을 의미하는 단어인 'Bank' 역시 당시 환전상이 거리 벤치(bench)에 앉아 업무를 수행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Bank의 어원이 이탈리아 말로 '탁자'를 뜻하는 반코(banko) 또는 반카(banka)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으나 이 역시 거리에 탁자를 두고 은행업을 수행한 상인들을 지칭하는 단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은행이라고 부르는 형태와 가장 유사한 모습은 언제부터 목격되기 시작했을까?
많은 학자들은 14세기 이탈리아가 근대적인 형태의 은행이 처음 생겨난 곳으로 꼽고 있다. 오늘날 금융 용어 대부분이 14세기 이탈리아 은행으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이다. 현금(cash)은 가사(cassa), 채무자(debtor)는 데비토레(debitore), 채권자(creditor)는 크레디토레(creditore)에서 유래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오늘날과 같은 은행의 모습이 생겨난 배경은, 교역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개인이 중심이 된 금융지원체계에 대폭적인 수정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베니스, 피렌체, 제노바와 같은 거대 교역도시가 등장하면서 특정 개인이 금융 업무를 수행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커져버렸다. 특히 원거리 무역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이들 원거리 무역은 고위험 고수익의 사업이었다. 교역을 위해 출항한 선박이나 상단 중 무사히 귀환한 사람은 절반 수준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위험성 높은 사업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금융의 안정성, 신뢰성을 제공할 공신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종교와 왕권 내지 귀족 가문이 적극 참여하였다. 물론 이미 많은 귀족과 추기경들이 음성적으로 은행업에 합세하였지만, 15세기 들어 교황 칼릭스투스 3세와 식스투스 4세가 공식적으로 은행 지분 소유를 전격적으로 허용했다. 이때부터는 대놓고 귀족이든, 국왕이든 은행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초기 은행들은 특정 가문 내지 특정 종교지도자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교역량의 증대와 이와 비례해서 급속히 증가한 금융서비스에 대한 수요 증대에 부응하기 위해 점차 다수의 지분 참여자들을 추가로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제노바를 대표하던 은행인 성 조지 은행의 총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 조지 은행의 총회가 열리면 오늘날로 치면 주주에 해당하는 500여명에 달하는 지분 참여자들이 모였다고 한다. 이들은 은행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8명의 행장, 재무담당 책임자 3명의 감사관, 2명의 비서관 등을 선출하여 은행을 운영하였다. 이렇게 다수의 지분 참여자들로 구성된 은행은 초기와는 달리 특정 가문 내지 국왕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당시 은행이 정부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있다. 모하메드 2세와 오스만제국 군대를 대상으로 전쟁으로 인해 제노바는 은행에 막대한 금액을 대출했다. 하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하자 이를 갚기가 어려워지자, 제노바는 흑해 소유권을 은행에 양도하였다. 리비에라 해변의 여러 도시국가 전체가 은행 소유로 넘어가기도 했다. 일부 도시국가는 은행 대출금을 갚기 위해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리를 은행에 넘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문헌들은 점차 은행이 왕실 내지 귀족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된 기관으로 거듭나고 있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
심지어 은행업을 중심으로 한 금융 세력이 기존의 왕실 내지 종교 세력을 대체하기도 하였다. 바르디(Bardi), 페루치(Peruzzi), 아치아이우올리(Acciaiuoli), 메디치(Medici) 가문이 대표적이다. 특히 메디치 가문은 작은 환전상으로 시작한 가문으로 14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하였고, 결국 자신들이 거대 금융 권력을 바탕으로 급기야 교황 2명, 프랑스 왕비 2명 등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융성한 은행업은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의 여타 국가에 커다란 귀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벤치마크의 대상이 되었고, 오늘날과 같은 은행의 형태와 기능을 전 세계적으로 유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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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박정호
KDI 전문연구원으로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경제학을 KAIST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였다. 세종시 지역산업발전위원, 양성평등위원, 한국디자인단체총연합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MBC 라디오 〈이진우의 손에 잡히는 경제〉, KBS1 〈아침마당〉, KBS2 〈여유만만〉, tvN 〈곽승준의 쿨까당>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경제 강의를 전개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 1, 2』, 『경제학 입다/먹다/짓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