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출장을 마치고 친정에 들렀다. 천안상록회관에서 청주공항으로 와서 일행들은 제주로 가고 나는 대전 가는 버스를 탔다. 대전에서 전주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순창으로 와서 택시를 타고서야 친정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산에 가서 감홍시를 따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친정에서 나는 아픈 손가락이다. 이런 나에게 부모님이 살아계신 건 큰 의지이다.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용기를 내서 다시 나아가게 할 힘을 주는 힘의 원천이다.
한봉을 치는 아버지
벌겋게 익어가는 감
강낭콩 10kg. 알밤 20kg남편은 한 번도 친정에서 술 마시고 실수 안 한 적이 없다. 1년에 잘해야 한두 번 가는 친정이었는데 말이다.
어느 해 한 번은 배에 차를 싣고서 친정에 갔다. 아마 어머니 칠순때였였을 것이다.
그날 밤도 남편은 한잔 두잔 술을 받아마시고 몰래 따라 마시고 술이 떡이 되었다. 술에 취한 남편은 밤새 들락날락 중얼중얼 잠을 자지 않았다. 행사가 있는날은 7남매가족에 고모들 가족까지 모여 거실에는 빼곡하게게 누워 잠을 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서방은 술주정을 했다. 오빠들이 달래도 소용없고 어머니가 혼내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내 형제들이야 그렇다 쳐도 고모들 보기가, 올케들 보기가, 조카들 보기가 부끄러웠다.
나는 마당으로 끌고나가 욕을 한 바가지 해줬다. 독이바짝 오른 내가 좋은 말을 했을리 없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남편이 사라지고 없었다. 핸드폰에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완도에서 3시 배를 타야 했는데 말이다. 당시 나는 면허를 딴지 20일쯤 됐었다.
나는 얼른 친정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서둘러 아이 셋이랑 차를 몰고 나왔다. 친정에서는 오빠들이 완도까지 데려다 줘야 한다며 걱정을 했지만 나는 잘 할수 있다며 아이들을 차에 태웠다. 처음엔 겁이 났지만 남편이랑 갈 때와는 달리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네비가 없을때라 아이들은 표지판을 읽고 지도를 보고 옆에서 길안내를 하며 응원해줬다. 설사 길을 잘못들어도 우리는 구호를 외쳤다.
"그럴땐 돌아가면 되쥐이."
"당황하지 말고 돌아가면 되쥐이."
아이들은 두주먹을 불끈 쥐어 가슴까지 올려 응원을 해주었다.
차가 화순쯤 들어서자 우리는 이미 드라이빙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들도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했다. 우리는 완도까지 오는 동안 삼전면이라 곳에서 짜장면도 사 먹고 고산 윤선도 고택 구경도 했다.
남편이 운전할 때는 술냄새가 날까 전전긍긍 과속 딱지 받을까 전전긍긍했지만 우리끼리 오는 동안엔 너무나 즐거웠다. 일단 불안감에서 해방된 기분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맛봤다. 나는 그때 내가 진작 면허를 따지 않은걸 후호했고 지금이라도 운전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나는 배에 차를 싣고 넷이 돌아가면서 포옹을 나눴다.
"엄마 잘했어요."
"아이구. 우리 새끼들만 있어도 엄마 잘 살수 있겠네."
나는 아이들을 꼭 안아주었다. 운전대는 내가 잡았지만 순창에서 담양,광주,나주,강진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제각기 길을 찾고 표지판을 보고 엄마를 응원했다.
나는 어쩌면 그때 처음으로 남편 없어도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동안 나는 남편이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아무리 술이 취해도 남편에게 심한 욕을 하면서도 원망하고 울면서도 남편없이 살 생각을 해보진 않았다. 그렇지만 남편이 운전면허 딴지 20일된 나와 아이들을 버리고 간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술이 취한 남편을 붙들고 원망하며 울었지만 술을 깨면 남편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이날 이후 나는 남편의 자리에서 남편을 치워버렸다. 아이들은 내가 남편과 거리를 둘때 나에게 와서 비비적 댔다. 와서 스킨십을 하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댔다.
그날 남편은 차와, 아내와, 아이들을 버렸지만 우리도 남편을 버린 날이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렇게 불안한, 언제 사고칠지 모르는 남편에게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보았다.
무엇보다 술 마시고 우리를 버리고 떠난 그놈을 남편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술에 취한 남편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난 화내지 않았다.
화도 아까웠다.
그때부터 내게 남편은 없었다. 그저 알코올 중독자인 아이들 아빠만 있었다.
이런 남편과 살다보니 친정에서 내 위치는 0.7정도였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형제간에서도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족들간에 받은 상처는 남들에게 받은 상처와 달리 잊혀지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문제는 상처를 준 사람은 자기가 어떤 상처를 줬는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족간에 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너무 슬펐다. 그러나 그마저 인정하기로 했다. 그들도 알콜중독자와 사는 동생이나 언니인 나에게 어떻게 위로를 건네야 하는지 방법을 모를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한번 포기하고 인정해버린 것에 대한 미련은 없는 편이었다.
나를 끝까지 인정해주고 상처 주지 않고 끝까지 애정을 철회하지 않은 사람은 아버지와 큰오빠였다.
아버지와 큰오빠는 알코올 중독자는 조서방이고 그런 조서방을 돌보며 아이 셋을 키우는 보통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용기를 주었다.
특히 아버지는 나만 보았다. 내가 알콜중독자인 남편을 두고 아이들 셋을 키우는 엄마로서 성장해가는 과정만 지켜보았다. 남편이 백수로 살든 알콜중독자이든 상관없이 큰딸의 위치에서 한번도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어떠한 비난이나 동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잘한 일에 칭찬하고 지켜보았다. 뭘 어떻게 하라는 충고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내게 하는 말은 늘 같았다.
"그려. 잘혔어."
하지만 형제들은 조금 달랐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은 고지서가 없지만
형제 간만 해도 반드시 고지서를 받게 되어있다.
찔끔찔끔 받다가 나중에 예상치 못한 고지서를 받으면 엄청 황당하다. 그게 돈이든 마음이든 말이다.
5남 2녀인 형제관계에서도 나를 대하는 태도도 제각각이었다.
늘 응원과 지지를 보내며 나에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은근 왕따의 시선을 보내준 사람
생각하면 가슴 아파서 잊고 지내다 간간히 술 마시면 이런 동생이 있는 게 슬퍼서 우는 사람
무관심한척 지내다 가끔 한 번씩 묵직한 위로를 보내는 사람
종종 안부를 챙기며 그래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은 사람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나 그들만큼 알코올 중독자에게 품위를 지킨 형제들도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형제들은 나에게 참 잘했고 훌륭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도 알지 못하는 상처를 준것은 기억하지 못할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나에게 상처를 줄 생각이 없었기에. 안타깝고 안된 마음을 어쩌 표현해야하는 지 몰랐기에 나에게 어떤 말이 위로가 되는지 몰랐기에 그랬을 것이라는 알기에 용서도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저 내가 받은 상처에서 벗어나야 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여동생이 말했다.
"언니. 지적 허영심이야. 언니 형편에 대학원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언니가 이제 와서 박사가 될 거야, 교수가 될 거야!"
난 그때 한 가지 진실을 깨달았다. 백가지 잘해도 한 가지 잘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사실을.
잘하는 것보다 잘못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동생이 나에게 물질적으로 한 것을 나열하자면 A4 한 장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나에게 상처를 준 것 또한 A4 한 장이 모자란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선물도 안 받고 상처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도움은 받으면서 상처 받기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김치 보내주는 것 거절
옷 사준다는 것 거절
신발 사준다는 것 거절
얘들 용돈 거절
그녀는 나에게 참 잘했다. 그러나 그녀가 내게 준 상처는 늘 치명적이어서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동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언니로서 아량을 베풀지 못했다. 언니로서 동생에게 잘해준게 아무것도 없다. 그저 동생에게 받기만 했다. . 그런데도 나는 동생과 거리두기를 선택했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여동생이 나에게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데 네가 그러면 되겠느냐고.
하지만 난 여동생의 도움으로 남편 병원비를 댄 적도 없고 여동생 도움으로 아이들 학비를 댄 적도 없다.
그녀는 내가 원하는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고 싶은 걸 주었다.
지금은 여동생과 거리를 두고 지낸다. 언니로서 내가 좀 넓은 마음을 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은 있지만 상처 받지 않아서 좋다. 그러면서도 구절초가 피는 가을이 되자 간간히 동생이 생각난다.
"언니 칠보에 구절초가 피었다네. 같이 가보세. 언니는 바위에 붙어 피는 구절초가 좋다고 했잖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