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다. 25호 태풍이 제주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던 2018년 10월 5일 아침이었다. 하늘길도 바닷길도 막혔다. 태풍이 지나가고 가을 햇살이 찬란히 내리쬐는 날, 볕 좋은 곳에 한 줌의 재로 돌아간 남편의 영혼을 묻었다.
남편의 장례식에는 그의 하나뿐인 혈육인 누나 가족과 나의 친정 식구들이 참석했다. 다행히 아들이 갓 스무 살을 넘긴 상황이라 아들의 친구들이 관을 들어주는 호사를 누렸다. 그가 그렇게 사랑하는 친구들은 태풍 때문에 아무도 오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나는 49재를 지내고 천도재를 지냈다. 참석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음 해 나는 국가직 공무원 시험을 봐서 최고령 합격자가 되었다. 남편이 죽어서야 나를 보살펴 주나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그가 묻혀 있는 한울누리공원에 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임용을 기다리던 중에 아랫배에 물혹이 있다는 걸 알았다. 무려 15cm의 물혹을 보고 산부인과 의사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대체 뭘 하고 사신 겁니까?”
“암인가요?”
“Size가 너무 커서 심각하긴 한데 만약 이렇게 큰 혹이 암이었다면 살아있지 못했을 겁니다. 물혹이길 바라야죠.”
의사는 당장 한라병원 응급실을 뚫고 최대한 이른 날을 잡아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소견서를 쓴 의사는 고맙게도 병원에 응급환자를 보내니 잘 부탁한다는 전화를 해주었다. 산부인과에서 한라병원까지는 직선거리로 2km쯤 되는 거였다. 걸어갈 생각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생각해보니 응급환자라는데 걸어서 가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침 택시가 와서 한라병원 응급실로 가자고 했다.
아들의 입영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수술을 마치고 열흘쯤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고 퇴원 3일 후 아들의 입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을 혼자서 입대시킬 수는 없었다. 입대 후 수술을 해야 해도 되느냐 물었더니 워낙 혹이 커서 한시가 급하다고 했다. 처음엔 물혹인 줄 알고 수술했다. 조직검사는 통과의례라고 했다. 수술후의 통증도 통증이지만 웬지모를 불안감이 찾아왔다. 퇴원 하루를 앞두고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 경계성 종양이었다.
경계성 종양이지만 난소암인지라 바로 암 환자로 등록해야 한다고 했다. 입영을 3일 앞둔 아들이 병원에서 서류를 발급받아 암 환자 등록을 마쳤다. 그날이 화요일이었던가, 수요일이었던가? 난소암에 대해 밤새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24살에 난소암 3기였다는 김뽀꼬 유튜브를 보았다.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신 김쎄오, 엄마 아빠 두 분을 암으로 보내고 소녀 가장이 된 꼬실이가 김뽀꼬의 친구였다. 암 환자로 서른이 되고 항암과 수술을 반복하며 서른 중반이 된 용감한 암 환자였다. 생방송에 댓글을 남겼다.
"금요일에 아들이 군대에 가요. 진해에서 예비 소집을 해요. 여긴 제주인데 목요일에 비행기를 타고 김해로 데려다줘야 해요. 그런데 오늘, 암 진단을 받았어요."
김 뽀꼬는 깊은 위로를 해줬다. 그녀가 암 환자라는, 더구나 난소암 3기라는 사실이 많은 위로가 되었다.
배에 복대를 하고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비행기를 타고 김해로 갔다. 김해에서 진해까지는 택시를 이용했다. 부대 앞 숙소는 나름 신경 써서 잡았어도 대낮인데도 방이 어두컴컴했다. 외투를 벗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아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였다. 아들의 부축을 받아 2km를 걸었다. 고기를 먹이고 싶었다. 인터넷 검색에서 찾아낸 꽤 유명한 장어집에서 아들과 나는 맥주를 한잔 마셨다. 옆 테이블도, 그 옆 테이블도 입영을 앞둔 가족이었다.
다음날 아들은 엄마를 안아주고 부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입을 삐죽이며 돌아서는 뒷모습에서 아들이 울고 있음을 느꼈다. 아들이 있어 어찌어찌 진해까지는 왔는데 혼자서 김해공항까지 갈 힘이 없었다. 창원에 있는 지인에게 전화했다. 그레이스 박이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한달음에 달려와 고맙게도 김해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 언제나 고맙지만, 특히 그날의 일은 매우 고마웠다.
아무리 초기라지만 암은 공포였다. 이렇게 초기에 발견된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라고 했다. 암 환자가 돼서야 나는 휴식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나에게 휴식은 또 다른 공포였다. 혈압조절이 되지 않았다. 동네 내과에 가서 혈압약을 처방받았다. 그러나 혈압약을 먹으면 저혈압이 돼서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어지러워 벽을 짚고 겨우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혈압약을 먹지 않으면 얼굴이 벌게져서 금방이라도 혈관이 터질 것 같은 공포감이 몰려왔다.
동네 내과를 서너 군데 전전하다가 찾아간 병원이 조대경 내과였다. 제주에서는 나름 이름이 난 병원이었다. 많은 환자로 붐볐지만, 의사는 내가 초진 환자라서 그런지 꽤 오랜 시간 동안 진료를 했다. 의사는 처방전을 내주며 약국에 다녀오라고 했다. 1층에 있는 약국으로 가서 약이을 처방받았다. 인데놀정 4/1알이었다. 그 약을 먹고 30분 기다렸다 다시 혈압을 재보니 정상혈압보다 많이 내려와 저혈압이 돼버렸다.
"최미경 님은 고혈압 환자가 아닙니다. 고혈압이 아닌데 혈압약을 먹으면 혈압이 뚝 떨어져 버리죠. 지금 최미경 님은 굉장히 불안한 심리상태에 있습니다. 제 말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정신과 치료를 좀 받으세요. 마침 4층에 슬하 정신과 의원이 있으니 소견서를 써드리겠습니다. 갖고 올라가 보세요.“
그렇게 정신과 치료가 시작되었다.
그사이 나는 국립농산물 품질관리원 서귀포사무소로 발령을 받았다. 힘들게 공부해서 공무원이 되었지만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정신과 치료는 1년 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주로 약물치료였다. 처음엔 아침에 한 알, 저녁에 한 알을 먹다가 나중엔 하루에 한 알을 먹었다. 그리고 그 한 알을 2/1로 줄여서 먹고 있을 때쯤 마르타 수녀님을 만나 건강상태를 털어놓았다.
마르타 수녀님은 10여 년 전 제주시가 중앙성당에 위탁한 ‘건강가정 지킴이 센터’에서 알코올 중독 가족 자조 모임을 운영했었다. 알코올 중독은 당사자뿐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기 마련이다. 알아넌은 알코올 중독자의 가족이 알코올 중독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가족을 건강하게 지켜낼 수 있도록 훈련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인연으로 수녀님과의 인연도 10년을 훌쩍 넘겼다.
수녀님이 상담사들을 치료해주는 슈퍼바이저를 소개해줄 테니 심리상담을 받아보라고 하였다. 상담료는 1회당 10만 원이고 10회는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나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첫 상담이 이루어졌다. 코로나 시대라 상담은 줌으로 이루어졌다.
심리치료는 여러 가지 심리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내담자가 왜 그런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는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과 절차로 상담해나갈 것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심리치료 이론이다.
내담자들은 성격과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고 각기 다른 문제로 아픔과 슬픔을 호소한다. 그러나 그들이 호소하는 고통은 거의 비슷하며 공통적인 증상을 호소한다. 슬픔 휩싸인 채 삶의 의욕이 없고, 비관적인 생각에 휩싸이며, 자기 비하와 무력감에 빠져 ‘우울증’이라는 심리적 장애를 겪는다.
정신과 의사나 임상심리학자들은 내담자의 문제를 특정한 정신장애로 진단하고 그 유형에 따라 심리적 원인을 밝히고 효과적인 치료 방법을 적용하려고 한다. 우울증을 나타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심리적 원인을 밝혀 우울증을 치료하는 효과적인 치료 방법을 개발하여 적용하려 한다.
반면 일부 치료자들을 섣부른 진단이 오히려 내담자를 이해하고 치료하는데 역효과를 준다고 생각한다. 우울증 환자로 낙인찍고 치료하는 사람에게 고정관념을 부여하는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심리치료이론에서는 진단 유용론과 진단 무용론이 혼재하고 있다.
그때는 슬하정신의학과 오동훈 원장님은 내가 우울증이다라고 정확한 진단을 내리진 않았다.
암수술이라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갱년기 우울증이 합해진데다 아이들의 진로 문제로 인한 불안이 겹친 것 같다고 했다.
“선생님 그럼 제가 우울증인가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다 그런 증상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오히려 증상이 없는 게 더 이상한 것이죠. 최미경님이 살아오신 삶을 살펴보면 이런 증상이 있는 것이 오히려 정상인 것이죠. 어쨌든 잘 오셨습니다. ”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그는 말했다.
“ 이 신호를 보냈다고 생각하세요. 내 마음도 살펴줘라고 말이죠.”
그런데 명** 교수님은 첫 시간에 나에 대한 진단을 내려주었다.
"최미경 님은 공동 의존증(Codependent)을 앓고 계십니다."
"예? 무슨 병이라고요?"
"아니. 꼭 병은 아니고. 주로 이 증상은 알코올 중독을 앓는 가족들에게 많이 나타납니다. 이제 최미경 님의 증상을 알았느니 앞으로의 상담 기간에 공동 의존증(Codependent)에 관해 알아가고 치료해가는 과정을 저랑 함께 해봐요.”
이후 나는 심리상담 이론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을 찾아 있던 중 『현대 심리치료와 상담이론』이라는 책을 연구하다시피 회독을 늘려갔다.
미국정신의학회에서 발간한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편람』에는 정신장애를 크게 20개의 범주로 나누고 그 하위 단계로 300여개 이상의 장애를 구분하여 진단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불안장애, 강박 및 관련 장애, 외상 및 스트레스 사건 관련 장애, 우울장애, 양극성 및 관련 장애, 정신 분열증 스펙트럼 및 기타 정신증적 장애, 성격장애 등 20개의 범주로 나누는데 성격장애의 하위 범주로는 경계선, 자기애성, 반사회성, 연극성, 편집성, 강박성, 의존성 성격장애 등이 있다. 코디펜던트는 성격장애중에서도 의존성 성격장애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공동의존자(Codependent). 잊고 있었던 나의 지난날, 내 가슴에 새겨졌던 이름표가 날아와 가슴팍에 탁 붙었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였다.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은 가고, 남아있는 나는 코디 펜던트라는 보도듣도 못한, 병은 아니라는 심리적 증세를 겪고 있다.
어쩌면 나는 이 글을 마칠 때쯤엔 공동 의존증을 극복하고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 꼭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