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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칼렛 Jul 23. 2022

2. 그 무엇도 나보다 우선할 순 없어

알코올 중독자 아내의 심료 치료 에세이

2. 그 무엇도 나보다 우선할 순 없어

공동의존자라는 진단을 받고 수많은 심리학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공동의존자는 주로 알코올 중독자 가족, 특히 그 배우자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알코올 중독자를 Chemical Dependent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배우자를 Co_chemically dependent, 줄여서 Codependent라고 부른다. 공동의존자들이 갖는 공통적 특징은 그들의 도움을 원하는 의존적인 사람과 개인적으로 혹은 직업적으로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공동의존자(Codependent)를 검색하면 자동으로 따라붙는 키워드가 나르시시스트이다. 공동의존자들은 나르시시스트의 밥이 되어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자기 파괴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상대방이 그들의 행동을 좌지우지하도록 허용하고 어느새 그의 통제에 놀아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기 파괴적이라는 말에는 공감할 수 없지만, 확실히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행동이 몸에 밴 것 같기는 하다.

우선 최근의 일을 소개해보자. 나는 서연이라는 16개월 아이에게 8개월부터 일주일에 두 번 책을 읽어주고 있다. 서연 엄마는 서울 사람이라 제주에는 연고가 없어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친정 이모처럼 도와주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우린 나이를 초월하여 상당 부분 의기투합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 서연이가 코로나가 의심된다고 전화가 왔다. 문제는 전파자가 친할머니라 친가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고 병원에 같이 갈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으며 이미 자동차 키를 찾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비닐장갑을 끼고 차만 운전해주리라 다짐을 하며 서연이 집으로 달려갔다. 막상 축 처진 서연 엄마와 기침하여 퉁퉁 부은 아기를 보자 나는 어느새 그들이 코로나 확진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짐을 싣고 두 사람을 부축해서 차에 태우고 있었다.

결국 서연이는 당일 확진이 됐고 서연 엄마는 다음날 확진이 되었다. 그사이 외할머니가 와서 서연이 보호자는 교체되고 서연 엄마는 집에 혼자 격리되었다. 나도 어제는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누워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다시 그 같은 상황이 온다면 어떡할 것인가? 아마 나는 그래도 달려갔을 것이다. 나는 서연이에게 일주일에 두 번 책을 읽어주는 사람일 뿐인데 서연 엄마가 혼자서 입원 절차를 밟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버린 것이다. 그녀가 차마 미안해서 부탁하기도 전에 내가 알아서 척척 수, 목, 금, 토, 오늘까지 1일 1회씩 병원을 들락거렸다. 물도 사다 주고 떡볶이도 사다 주고 라텍스 장갑도 사다 줬다. 오늘은 김밥집에 들러 서연 엄마에게 김밥을 사다 주고 서연이 외할머니의 약을 병원에 전달해 주었다.

천만다행으로 오늘 병원에 가서 검사받았는데 음성이었다. 처방해 준 약을 먹고 푹 쉬어서 그런지 컨디션은 다시 좋아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아마 이럴 때 어떻게 할까? 아마 절대로 나처럼 무모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무모한 배려심이 코디펜던트들의 공통적인 성격이다.     


철학자 칸트도 이런 동정적인 배려심을 평가절하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느라 영어 공부 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하였다. 다른 점수가 높아도 영어 과락을 면하지 못해 떨어진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 나는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써서 결국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이제는 영어 원서를 읽는 재미를 느낄 만큼 영어 실력이 향상되었다. 나는 공무원이 되어서도 공무원 시험 문제를 머리맡에 두고 읽곤 했다. 공무원 시험 지문은 정말 좋은 글을 다루기 때문이다. 내가 참 인상 깊게 읽었던 지문은 칸트의 정의론이었다.

어느 날 누군가 불이 났다고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어보니 이웃집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위해 119에 신고를 해주고 안으로 들여서 따뜻한 차를 대접하며 진정을 시켜준다. 그 글에서 칸트는 119에 신고하는 것까지만을 도덕적 정의로 규정한다. 집안으로 들여서 따뜻한 차를 대접하며 그의 재난에 공감하며 그를 위로하는 행위는 정의가 아니라 그의 성격이라고 규정하는 글이었다. 119에 신고하는 것은 옳은 이유로 옳은 행동을 하는 의무 동기이지만 후자의 일은 의무 동기가 아니라 이타주의자의 동정으로 찬사와 격려는 받을 수 있지만, 존경은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성격에 의해서 행하는 경향성 동기라는 글이었다.      

다행히 나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아서 서연 엄마와 서연을 도운 이번 일에 대해서는 배려심을 베푼 사람으로 찬사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코로나에 걸렸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서연 엄마는 아프면서도 내가 혹시 코로나에 걸리까 전전긍긍 걱정했다. 만약 내가 코로나에 걸렸다면 나의 친절과 배려는 그녀에게 오히려 큰 부담이 될 것이었고 나도 다른 사람에게 대책 없이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을 것이다.

나의 이런 성격은 비단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누구든 나에게 어려움을 토로하면 나는 그 일을 듣고만 있는 일이 너무 어렵다. 반드시 그 일을 해결해내는 해결사가 되고 만다. 물론 이런 성격 때문에 회사에서는 업무처리 능력을 인정받는다. 그래서 나는 ‘해결사 최’로 불리기도 한다. 과연 이런 일이 좋기만 한 것일까?

 나는 상황 판단이 무척 빠른 편이다. 아니 ‘무척 빠르다’가 아니라 ‘너무 빠르다’가 더 맞겠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이보영이라는 배우가 주인공이었는데 그녀는 상대의 얼굴만 쳐다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도 그런 능력이 있다. 나는 100%로는 아니지만 87% 이상은 그 사람의 표정으로 그 사람의 생각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상대의 생각을 너무 빨리 알아차리는 것은 생각보다 마음을 다치는 일이 많고 내 몸을 혹사할 일이 많았다.     

“그렇다면 공동의존자는 병입니까?”

나는 명교수님께 물었다.

“딱히 병은 아니지만, 비정상적인 사람에 대해서 자기를 지킬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게 어찌 됐든. 지나치게 최미경 님의 에너지를 주변 사람들이나 그들의 문제에 쏟아부으면 정작 최미경 님 자신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에너지가 남아있게 되지 않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런 상황을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다음 시간에 얘기 나눠보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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