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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칼렛 Jul 27. 2022

5. 술에 관대한 사회

알코올 중독자 아내의 심리치료 에세이

남편이 술을 마시고 행했던 기행들은 일일이 말하기도 벅찰 정도로 셀 수 없다. 그때까지는 남편이 컴퓨터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나는 초등학생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  방문교사를 하기도 했다. 경제적 형편은 빠른 속도로 어려워지고 있었다.  남편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2006년 12월의 끝자락이었다. 자다가 일어난 남편이 냉장고 거실에 냉장고 문을 열기에 목이 마른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은 냉장고 문을 열고 오줌을 벌벌 싸고 있었다. 순간 남편의 머리통에 남편이 성경처럼 읽고 있던 두꺼운 자본론 책을 날렸다. 남편은 고꾸라졌고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이 인간을 내 눈앞에 치우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정폭력의 가해자가 되어 신문을 장식하는 여자들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보통 알코올 중독자들은 폭력성을 갖기 마련이지만 남편은 혼자 술을 마시고 취했다. 오히려 내가 폭력적으로 변해갖다. 술을 마시고 술을 사러 갈 때 남편은 꼭 차를 타고 다녀왔다. 그걸 목격할 때 나는 남편을 물어뜯어 죽여버리고 싶은 살기가 반동했다.

나는 먼저 경찰서에 전화해서 이런 알코올 중독자를 몇 시간이라도 수용할 수 있는 기관이 있느냐고 물었다. 경찰에서는 그런 사람을 피해서 내가 집을 나와 아이 셋과 함께 살 곳은 있지만 남편을 수용할 곳은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학교에 다니는 아이 셋을 데리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후 남편이 술 마시고 무너질 때마다 나는 더 처참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을 팔뚝을 물어뜯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래도 남편은 당하고 있기만 했다. 나를 밀치기도 않고  책장에 기대어 내가 진정할 때까지 온갖 욕설을 받아내고 있었다. 차라리 그가 좀 못 배운 사람이라면 참을 수 있었을까? 그가 나이가 더 많이 먹어서 힘없는 노인이라면 참을 수 있었을까? 나는  남편이 친 사고에 절망했고 고 싶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감마 유형과 델타 유형으로 나뉜다. 감마 유형은 평소에는 수개월 이상 술을 안 먹고 지내기도 하지만, 한 번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폭음을 하면서 스스로 술 마시기를 멈추지 못하는 경우이다.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한 달 이상 계속 술만 먹는다.

델타 유형은 많은 양은 아니지만 거의 매일 술을 마시는 경우이다. 자신이 술에 대한 조종력을 상실한 상태라는 것을 모르고  가족들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박찬호가 우승을 해서 한잔, 박세리가 우승해서 한잔, 비가 와서 한잔, 바람이 불어서 한잔, 날이 더워서 한잔, 너무 추워서 한잔....

남편이 술을 마셔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반주로 시작한 한잔이  한 병을 다 마시고  입에 맞는 반찬이라도 있으면 밥을 먹다가도 슈퍼에 가서 술을 사 왔다. 나는 어린아이들을 씻기고 숙제를 봐주고 책을 읽어주는 시간 동안 남편은 두병, 세병 밤새도록 술을마쎴다.  

점점 그의 사랑하는 친구도, 친구 같은 고객들도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의 하루는 오직 어떻게 하든 마누라 몰래 소주 한 병을 사서 마누라 몰래 술을 마시는 문제가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고 있었다.

남편의 경우는 델타 유형에 해당되었다. 남편은 술만 안 마시면 정말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제 남편은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다. 컴퓨터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손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점점 손님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음주운전을 했고 그 음주운전에 대해서도 도덕적 불감증을 보이며  반복되었다.

알코올 의존성은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몸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 알코올성 치매 등의 정신 질환을 유발하여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술에 대해서 관대하다. 남편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을 알아도 오랜만에 친구가 오면 그들은 술을 권했다. 시댁 식구들도 이번에 한 잔 만이라면 술을 권했고 친정에 가도 조금만 마시라며 술을 따라 주었다. 모두  알코올 중독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행동이었다.

델타 유형으로 시작한 알코올 중독자도 증세가 심해지면 델타 유형을 유지한 채 감마 유형의 지경에 이른다.


 알코올 환자를 병원에 입원시키는 절차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 남편을 알코올 병동에 입원시키기 까지는 나도 만신창이가 된 상태여서 도저히 캐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라야 결정을 하니 나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내가 알코올 병동에 입원시키고자 해도 환자가 동의하지 선뜻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이 알코올로 음주 사고를 친다든지 내가 정말 저 인간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극에 달할 때에야 병원에 보낼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또 물리적으로도 환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절차가 복잡하다. 우선 119를 불러야 하고 119를 불러서도 환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바로 정신병동으로 옮길 수는 없다. 보통은 응급실에 가서 알코올이 빠질 때까지 열흘 정도 입원 치료를 하기 마련이다. 환자는 퇴원해서 한 달은 술을 끊어보려 노력하지만 다시 술을 마시고 또다시 인사불성이 되기 마련이다.

바로 알코올 병동으로 갈 때는 경찰이 출동해야 한다. 경찰이 출동해도 10분이고 20분이고 한 시간까지 환자를 설득해서 환자가 알코올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겠다는 대답을 해야 할 수 있다.


알코올 정문 병원에  가서 맨 처음  하는 일은 남편의 가계도를 그리는 일이었다. 남편의 가족사를 드문드문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남편의 가계도를 그려놓고 보니 처참했다. 우선 배우 유인촌을 닮았다던 남편의 큰형은 공부를 잘해 부산고등학교를 가고도 남을 실력이었는데 부산상고로 진학을 했다고 했다. 당시에는 판검사 시킬 거 아니면 상고를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인문계형의 형이 상업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했고 거기서 마음의 끈을 놓아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 남편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시누님의 말씀은 남편의 얘기와는 사뭇 거리가 멀어 죽은 동생에 대한 포장이 보태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성현이 아빠랑은 또 달랐어. 죽은 큰 동생은 정말 머리도 좋고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기고 정말 주변에서 입 안대는 사람이 없었어. 얘가 귀티가 잘잘 흐르는 게 정말 귀공자가 따로 없었지. 고등학교 2학년 때 자전거 타고 부산 영도다리 놀러 갔다가 트럭 운전사가  차문을 열고 내리는데  자전거를 타고 전력 질주하던 친구가 죽은 거라. 그 친구가 죽고 나서는 얘가 자꾸 죽은 친구가 보인다며 그렇게 마음을 주저앉히더라고. 그 죽은 동생 때문에 서면에 있는 100평짜리 집도 날리고 아버지도 술만 드시다가 금정산에서 돌아가셨잖아. 나도 그 때문에 고등학교도 제대로 못 마치고. 내가 서울 올라가서 성현이 아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데려다 키우다시피 했지. 정말 그 동생만 살았어도 우리 집안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시누님은 남편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키우고 고등학교 3년 내내 도시락을 싸주며 학교를 보낸 고마운 분이었다.

대학은 학비를 감당한 사람은 정유회사를 다니는 작은형이었다. 그 작은형은 큰형이 돌아가시자 팔자에 없는 맏아들 역학을 해야 했고  나중에는 정읍에서 주유소를 두 곳이나 운영하고 있었다. 중산층으로 잘 사는가 싶더니 당뇨로 몇 년 고생하다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남편을 시누이에게 맡기고 시누이가 시집가고 나서는 시아주버님에게 생활을 의탁한 시어머니에 대해서는 잘해야 1년에 한 번 보는 손윗동서에게 영화 한 편을 보듯 들을 수 있었다.     

나름 요조숙녀, 현모양처라고 자부하던 손윗동서는 얼굴은 말상에 키 크고 덩치도 컸다. 눈과 코까지는 인물이 좋았는데 입술에서 고집과 욕심을 드러나는 상이 었다. 내가 결혼해서 얼마 안 됐을 때 나름 맏동서라고 군기를 잡는다고 이러쿵저러쿵 시도하더니 그 관심마저 꺼버리고 오로지 자기 식구 넷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었다. 4월에 있는 시아버님 제사와 추서, 명절이나 되어야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혹시라도 시댁에서 자기들 생활에 끼어들어 폐를 끼칠까 봐 철옹성을 쌓는 스타일이었다.  

“동서? 아휴. 자네는 도련님 잘 만나서 시어머니 꼴 안 보고 산 것만 해도 정말 다행이야. 자네 시어머니 말이야. 내가 결혼해서 와보니 오십도 안됐더라고. 그런데 도련님 서울서 대학 다닐 때 생활비 하루만 늦어도 머리 질끈 동여매고 벽쳐다 보고 누워서 흰 죽 끓여라, 콩죽 끓여라……. 정말 내가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릴 때가 많아. 다른 사람 같아봐. 그 나이에 뭘 해도 하지 안 하겠는가? 그런데 우리 시어머니 하루 웬 종일 하고 다니는 게 곱게 차려입고 양산 쓰고 한복 치마 왼쪽으로 치켜세우고 화투판에 쫓아다니며 산 양반이야. 아무리 10원짜리 화투라지만 그 형편에 하다못해 노점상을 해서 자식 키우는 부모도 얼마나 많은가? 우리에게 도련님 학비 떠넘기고 그때 생각하면 내가 정말 화병 나서 죽어. 도련님은 어떻고? 도련님도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 한번 했는지 아는가? 방학 때 내려오면 다리 건너 약국 가서 거기 약사랑 바둑 두는 것이 일이었어. 정말 자네 시숙만 뼈골이 녹아 났지.”     

그럴 말을 할 때마다 손윗동서는 커다란 눈망울을 치켜세우며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치 형님에게 빚을 지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들어서 송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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