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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실종 vs 월북

by 반 필립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은 앞날에 남았으리” The best is yet to be


소설가 이문열의 ‘영웅시대’의 서문이다. 또한 영국의 목사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랍비 벤 에즈라’라는 시의 두 번째 줄 문구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 때 인용한 문구로도 유명하다.


고등학생 때 소설가 이문열의 ‘영웅시대’를 연거푸 읽으며 주인공이 조부와 비슷할 거라는 상상을 했다. 부농의 외아들 이동영은 동경에서 유학했고 사 남매의 아버지, 그리고 신분위장을 위해 동양척식 회사에서 일한 남로당 당원이고, 인민군 소좌였다. 그리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의 빨치산 핵심인물 염상진, 6 25 때 벌교로 내려온 인민군 고위간부 김범준을 나의 친할아버지와 오버랩시키는 상상도 자주 했다. 즉 이왕이면 소설의 주인공 같은 모습의 조부를 상상했다.


나의 조부의 무덤은 없다. 실종된 인물이다.

주민등록과 호적초본에는 그렇게 나와 있다. 문중의 족보에도 그러하다.


나의 조부가 북한으로 갔다는 사실을 안 것은 80년대 중반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즈음이었다. 어느 날 오후 사파리 잠바 안에 뜬금 없이 넥타이를 맨 눈빛이 날카로운 30대 중 후반 가량의 사내 두 명이 집을 방문을 했다. 귀에는 리시버를 꽂고 있었고, 동네에서 비교적 큰 대문을 가지고 있는 우리 집의 벨을 거침없이 연달아 누르고 대문이 열리자 당당히 들어왔다. 그리곤 할머니를 찾아 이렇게 묻고 면담을 시작했다.

“요즘 혼자 산에는 안 가시지요?”

이 질문이 할머니를 간첩으로 의심하며 혹시 주변 산에서 접선하는 사람은 있느냐는 의미인지 안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였다. 그 당시 가끔 할아버지에게서 일본 조총련을 거쳐 편지가 가끔 오고 있다는 사실로 그들이 조사 중이었다. 그 날 할머니는 말없이 눈물만 잠시 훔치시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전후 40년을 홀로 산 여장부답게 당당하셨다.

나의 조부 반윤식은 1950년 9월 인민군이 서울에서 철수할 때 같이 북으로 올라갔다. 북으로 올라간 행위는 그것이 자의냐 타의냐에 따라 ‘월북’ 혹은 ‘납북’으로 사전적으로는 정의가 되어 있으나 이를 상용함에는 그러지 아니했다. 어렸을 적 김영삼 문민정부 이전에는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의 일을 월북이든 납북이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실종자였다. 그러다 좌익을 빨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몰상식하다고 여겨지기 시작한 무렵부터 비공식적으로 일부에서 월북이라고 표현했다. 80년대 말 몇 번에 걸친 이산가족 찾기 이벤트에 아버지 고모 그리고 당사자인 우리 할머니는 조부를 찾지 않으셨다. 그 당시 고모부는 모 유명 방송국의 보도국 책임자였기에 우선순위 신청이나 혹은 따로 알아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이미 다른 살림을 차리셨을 것이라는 말씀만 하시며 찾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그 아들과 딸도 묵묵히 별 대꾸를 안 하였다.

할머니 나순임은 전라도 나주의 꽤 부잣집의 맏딸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반윤식은 지금의 양재동, 말죽거리에서 양계장 집 맏아들이었다. 이들은 그 당시에 다수가 그랬듯 사진만 보고 혼인을 했다. 해방 바로 전 1944년이었다. 나순임은 시골에서는 드문 일제 치하의 소학교를 졸업한 한글과 간단한 한문을 읽을 줄 아는 열일곱 처녀였다. 그러나 서울 사람 반윤식에게는 누군지 모르고 결혼한 더욱이 초등학교만 나온 전라도 시골사람 할머니는 부족한 사람이었나 보다. 반윤식에게는 나순임보다는 신식 교육을 받은 OO학당 출신 여자들이 좋았을 것이다. 최근 치매에 걸린 할머니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만나는 여자가 있어서 자주 집을 비웠다 했다.


2015년 12월 어느 날 나는 한국을 방문했다. 그 전해부터 치매 판정을 받으신 할머니는 유일한 손자인 나를 유독 찾으셨다. 그 날 만난 할머니는 거의 10분에 한 번씩 내가 어디에 사냐고 되 물었다. 그 외에는 모든 과거의 기억력이 뚜렷했다. 할머니는 알츠하이머, 단기 기억상실이 진행 중이었다. 모든 가족들은 다 알아보고 옛날 기억은 세세하게 다 머릿속에 살아 있지만 바로 몇 십분 전 상황은 기억하지 못했다. 소위 요즘 표현으로 ‘착한 치매’인 것이다. 그 날 나는 방안 옻나무 장롱 안에 할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의 반윤식은 20대 후반의 청년으로 장발에 뿔테 안경을 쓰고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같은 사진 속에는 당시의 지식인층 사람들과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하다 온 복장의 사람들도 같이 서있었다. 그리고 평양에 있는 사진도 발견되었다. 그중 한 장의 사진의 촬영지는 1947년에 평양이었다. 38도선이 설치되어 아마도 자유롭게 왕래는 못했을 것이다. 이 때는 할머니가 아버지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이다. 평양을 드나들고 인민군 장교였던 사람이 전쟁 중 납북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조부는 흔한 지식인들처럼 좌익이었고, 본인의 신념으로 월북한 것이다.


당시 일제 치하 말기의 20~30대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진보적 성향이었다. 영화, 드라마, 서적 등에서 나온 바로는 그랬다. 먹고살기 위해, 본인의 욕심을 위해 친일을 하던 이들이 많았지만, 부르주아 지식인들 중에서는 유난히 그러했다. 물론 이들을 중도좌파,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나뉘지만 전쟁이 발발 후 상당수는 서울, 경기 소위 해방구에 남아서 북쪽에 동조한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적어도 9.28 서울 수복 전까지는 그러했다고 한다. 그중 일부는 북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잔여 좌익 젊은이는 전쟁으로 인해 자연 전향하거나 포로로 수용되어 강제전향되었다. 그중 소수는 고문으로 혹은 빨치산 투쟁 등으로 지리산 등지에서 본인이 믿는 사상을 위해 저항하다 죽었다. 그럼 전향 세력을 포함한 대한민국에 잔류한 과거 좌익이었던 청년 1920~1930년 대생들의 자손들은 1940~1950년대생 들일 것이고, 내 또래의 아버지 어머니일 것이다. 월북한 부모를 둔 그들은 오뉴월 보릿고개, 겨울철 연탄가스 중독의 공포 속에서 살아남았다. 극도의 반공 사회였고, 격동의 개발도상국 대한민국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왼쪽에 치우치는 사상을 가지고 실종 혹은 월북했음을 떳떳이 밝히지 못하고 20세기를 살았다. 오히려 과거 남로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처럼 반대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며 우익으로 돌아서서 살아갔다. 그중 일부 지식인이나 이로 인해 고통을 받은 정치인들 외에는 그러했다. 나의 친지들 종친들도 장손인 나의 조부 이야기를 입에 담는 것을 꺼려왔다.

조부 반윤식은 아마 아버지 말씀대로 양계장을 인민군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억지로 끌려가셨을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탈출할 기회는 몇 달 동안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4살인 아들과 곧 태어날 딸도 있는 30살의 가장이었다. 또한 홀어머니도 있는 꽤 유명한 가문의 종갓집 장손이었다.

나보다 어린 그가 그 당시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대해 상상해 본다. 비겁하게 가족을 버리고 간 사람이지만, 어떤 면에는 자기 자신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시대적으로 흑과 백이 뚜렷한 시기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되는 때였지만, 그 선택은 많은 번민과 고뇌 후에 내려진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홀로 살아갈 처자식, 빨갱이 가족이라 비난을 받을 가족과 친지들을 생각지 않았을 리 없다. 얼마 전 작고하신 막내 조부님에 의하면, 서울이 수복된 후 북으로 후퇴하던 지프니 차에 올라타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한다.

“어머니 하고 동생들을 부탁한다”

그 흔한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더구나 아내, 아들 그리고 갓 출생했을 딸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할머니는 상처 받았고, 자라난 아버지, 고모는 자신들의 아버지를 원망하고 증오했다. 이는 다시 이를 악물고 여러 동네를 떠돌며 지금의 나와 동생을 키운 원동력도 되었다.

조부 반윤식에게는 본인의 사상의 조국이 그의 인생을 보다 좋은 날로 펼쳐지리라 생각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날 지프니 사이드미러 뒤의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보다는…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지만, 조부는 그다지 사상이 투철한 소위 좌파 영웅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혹은 이미 전쟁 전부터 북쪽에 두고 온 여인과 처자식이 따로 있었을 거라는 개연성 있는 가설도 해본다. 물론 아버지 고모에게는 믿고 싶지 않은 불편한 가설일 수 있다. 그러나 한 세대를 넘은 손자인 나에게는 그 격동의 시대에 있던 조부에게 도덕의 잣대를 대며 돌을 던질 수 없다.

자식인 아버지도 칠순이 넘으셨고, 할아버지의 편지는 80년대 말까지 배달된 후 더 이상의 소식은 없다고 한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그 나름의 운율(rhyme)이 있다’ -마크 트웨인-


불혹을 훌쩍 넘긴 나에게 조부와 같이 극단적인 사상과 이념을 양분해서 택해야 하는 현실이 다가올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국 시민으로 거주하는 나에게는 더욱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순간적 바꿀 수 없는 선택을 하며 때로는 이를 후회하며 살아간다. 명맥이 장손인 내가 한국에서 갑자기 도미해 아내와 딸과 살게 된 선택도 그 중하나이다. 언젠가는 훗날 필경 다시 가정을 꾸리셨을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할머니는 2018년 10월에 93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도 아마 2018년 전에 그러하셨을 것이다.


조부에게도, 나의 아버지에게도 그랬든, 우리에게는 아직 좋은 날이 남아 있기에 모두가 다시 선택을 해야 되는 길들을 걷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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