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Tribe in USA
기다란 어육 소시지를 두툼하게 썰어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올린다. 한 10조각 정도를 기름에 튀기듯이 올렸다가 재빨리 뒤집어야 한다. 아니면 다 타서 눌어붙고 만다. 뒤집고 불을 끈 후 밥솥에서 밥을 한 주걱 뜨고 김가루와 어분 양념이 들은 후리카케(일본어: 振り掛け)를 밥 위에 솔솔 뿌린다. 그리고 5조각 정도의 어묵소시지를 얹고 케첩을 뿌린다. 뚜껑을 닫으려다 무언가 아쉬워 얼른 남은 기름에 달걀 프라이를 딸아이가 좋아하는 반숙, sunny-side-up으로 밥 위에 올려 도시락을 완성한다.
미국 학교 급식이 변변치 못해 동양인 학생들은 도시락을 많이 싸 온다. 딸아이는 내 스타일의 80, 90년대 한국 학교에서 급식이 있기 전 중고교 도시락 스타일을 좋아한다. 아시아계 학생 비율이 절반 이상인 우리 동네 중학교를 다니는 딸아이의 반에서 도시락을 열면 부러움과 호기심으로 힐끗거리는 눈들이 보인다고 한다. 특히 최근 K-food에 열광하는 중국, 인도 아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급식으로 인해 도시락이라는 단어도 생소하고 그 흔했던 보온도시락통도 이제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큰 딸아이는 앞으로 4년 더, 그리고 나면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것이다. 나와 아내는 얼마 전, 차 한 잔 하며 앞으로 15년 동안 학부모 생활을 하며 도시락을 싸야 한다고 자조의 웃음을 나눈 것이 기억난다.
이제 7시가 넘어서니 큰 딸을 깨워야 한다. 아이 엄마는 큰애를 낳은 지 11년 만에 둘째를 낳았다. 이제 3살이 되어간다. 우리 집 여인들은 모두 미인인듯 하다. 그래서 아침잠이 많다. 아침잠이 없으니 일주일에 3번 정도는 내가 도시락을 준비한다. 하긴 아침잠은 나도 학생 때 많았던 것 같다. 옛 어른들의 나이 들면 잠이 없어진다는 말은 불변의 진리이다.
큰딸의 중학교는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위치해 있지만, 워낙 집이 언덕 위에 있고, 비가 또 오니 출근길에 데려다준다. 오늘은 딸아이가 최근 한국에서 갓 전학 온 아이들이 많아져서 자기들끼리 한국말로 삼삼오오 이야기하는 그룹이 많다고 한다. 포스트 코로나로 다시 유학생, 아니 부모가 주재원으로, 아니면 이민으로든 오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딸아이는 유치원까지는 한국에서 다녔으나, 부모가 한국어가 능숙하다 하지만 급할 때는 나에게 영어로 대화를 줄곧 한다. “아빠, 학교에 there is a Korean Chinese. She speaks Korean but has a little accent. 중국 친구가 있는데, 한국사람이래 한국말을 해 근데 억양이 좀 있어요.) 근데 개 중국사람이야 한국사람이야? ” 딸아이가 물어봤다. “ 아.. Her grand or grand grand parents were Korean just like us Immigrants to China 100 years ago. 우리 같이 OK? (할머니할아버지들이 한국사람이었을 거고 중국으로 100년 전에 이민 왔을 거야 우리가 미국 온 것처럼)” 딸아이한테 조선족을 설명을 해야 하는데. 길게 말하면 학교 가는 데 꼰데 취급받을 거라 짧게 얼버무렸다.
중국교포 조선족은 일제강점기 전에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한 후손들이 대부분이다. 훗날 미국교포 후손들은 어쩌면 "남한족" "서울족"으로 불려질지도 모른다. 수십 년 후사람들이 ‘나무위키’ 인터넷 검색을 하면, “남한족 혹은 서울족, SEOUL TRIBE라고도 불리는 사람들은 미국 이민 그룹으로써. 1기는 90년대 이전에 맨손으로 LA, 뉴욕으로 들어와 2세들을 키웠고, 2기는 2010년 전후 직장을 가지고 들어와 자녀를 키우며 어정쩡하게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니게 되었다. 한국어와 영어를 모두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 로 인터넷 검색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한국은 변화가 무척이나 빠르다. 10년 전 일들은 한국에서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이고 그때 대화를 시도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그때는 그랬나?라는 반문을 받는다. 반면 여기 미국에서의 10년 전은 엊그제 같고, 변화가 그다지 없다. 얼마 전 한국 어머니에게 소꼬리를 사 와 꼬리곰탕을 푹 끓여서 막내와 큰딸이 좋아했다고 하며 어릴 때 먹은 꼬리곰탕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는데, 구식 취급 당했다.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시며 요즘 사 먹으면 되지 두 식구 사는데 누가 그런 걸 번거롭게 끓여 먹느냐고 하셨다. 내가 미국에 가 있으니 한국에서 요즘 사람들이 그런 거 안 해 먹는 거 모르는구나 하신다. 여기서도 20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한국 설렁탕, 꼬리곰탕을 사 먹을 수 있지만, 우린 집에서 끓여 먹는 편이다. 한국 아파트 공동주택에서는 서로 눈치를 봐서 그럴까?... 오늘 아침 훑어본 한국 뉴스에서는 아파트 현관문에 "”저녁 7시 김치찌개 끓이신 분"… 아파트 이웃 항의 쪽지에 '황당'..”이라고 기사 난 것도 봤듯이 꼬리곰탕 끓이면 원시인 취급당할 듯도 하다.
갑자기 '도깨비'라는 드라마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주인공 배우 공유가 캐나다 퀘벡주의 공동묘지에서 묵묵히 앉아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수백 년 동안 거느렸다 죽어간 자신의 하인들이 묻혀있는 묘지들을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 나 역시 오랜 시간을 두 나라에서 보내며, 내 무덤을 여기에 사고 조상들의 묘도 이장해 오면 살지 않을까? 그럼 남한족 후손들이 미국 묘지에서 한국성이 써진 묘비명들 앞에서 성묘하는 모습?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며 어느새 시애틀 밑에 있는 직장에 도착했다. 시애틀의 겨울 비는 3일 쨰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